■ 역사/역사이야기 172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작성일 : 2010. 11. 21 ■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3호] 2010.09.12 입력 새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왕조의 안정적 유지라는 큰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새 왕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는 개국시조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의 자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계는 선양 형식으로 개국에 성공했지만 세자 책봉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부인 강씨의 입김에 따라 결정함으로써 새 왕조의 앞날에 큰 부담을 주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④ 역성혁명 출중한 무장인 이성계는 정도전 같은 전략가들의 보필을 받아 선양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이 위화도 회군을 건의했을 때 이성계 추대는 이미..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2호]20100905 입력 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은 무력으로 가능하지만 새 체제를 여는 것은 무력만으로는 불 가능하다. 새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새 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 사상은 관념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실제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색 신도비와 사당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 ③ 과전법 실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우왕 14년(1388) 3월 명나라가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

전쟁 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

■ 전쟁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1호] 2010.08.29 입력 전통시대에는 왕의 즉위나 새 나라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다. 천명을 받았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민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집권세력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과 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민심은 새 나라가 열리기를 희구한다. 황산대첩비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다. 이성계는 운봉전투로 남방 사람들에게도 무명을 떨쳤다. 일제는 반(反)시국적인 고적(古蹟)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이 비를 깨뜨렸다. 지금 서있는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삼봉집 목판 정도전이 쓴..

21세의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

■ 21세의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① 건국의 뿌리 이덕일 | 제180호 | 2010.08.22 입력 변절과 구국의 결단으로 칭송받는 방향전환이 때론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고려 말 이성계 일가는 대표적인 부원(附元)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북방영토 회수운동에 전격 가담하면서 친(親)고려세력으로 전환되었다. 부원세력에서 친고려세력으로의 극적인 방향 전환이 변방의 일개 무장 세력이었던 이성계 일가가 조선을 개국하는 뿌리가 되었다. ↑경기전(慶基殿)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했던 곳으로 전북 전주시 풍남동에 있다. 세종 24년(1442) 건립되었다. 영조 24년(1748)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

임금을 묻은 다음 날, 노론은 역사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 임금을 묻은 다음 날, 노론은 역사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⑪ 정조 독살 의혹 이덕일 | 제179호 | 2010.08.15 입력 ‘정조 독살설’이 현재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가 조금만 더 살아 그의 정책들이 계속 유지됐다면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각종 사회적 갈등을 정치로 풀기 위해 노력했던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사후에 비로소 민란이 발생해 백성과 국가권력이 직접 충돌한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심장하다. ↑다산 초당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전남 강진의 만덕산 기슭에 있다. 정약용의 일가는 정조 사후에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당해 폐족 신세가 된다. 최근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면서 일부 학자는 ‘심..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 벼’ 기현상

작성일 : 2010. 11. 14 ■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벼’ 기현상.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78호 | 20100807 입력 정치세력이 분열돼 미래와 과거를 각각 지향하면 양자의 공존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념을 표방하든 과거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기존 체제의 유지로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 지향의 정치세력에 둘러싸인 채 24년간 고군분투했던 정조는 끝내 대개혁의 칼을 뽑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것은 비단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의 미래도 함께 죽은 것이었다. ↑정조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데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사도세자 묘소인 융건릉 곁에 있다. 노론 벽파는 시신을 땅에 묻자마자 정조가 키워온 남인들..

민심이 원한 건 변화 …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 시동

■ 민심이 원한건 변화…신도시발 농업· 상업 혁명 시동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7호 | 20100731 입력 세종시는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정치논리가 우선했다. 그 결과 선거라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미래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사도세자의 배후도시라는 정치적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다. 조선의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을 선도하겠다는 미래 가치를 담아냈다. 화성 건설에는 플러스 알파뿐만 아니라 오메가까지 담겼기 때문에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수원 화성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의 성곽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미래를 지향하는 선도도시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⑨ 화성의 탄생 ..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6호| 20100725 입력 동양사회에서 국가 정책은 하늘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것이란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곧 민심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각이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백성들을 설득하고 백성들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국가 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⑧ 민심 확보책 정조는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선의 최정예 부대로 육성하려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착공한 재위 18년(1794)은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환갑을 맞는 해였다. 또한 ..

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 … 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작성일 : 2010. 11. 03 ■ 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5호] 20100718 입력 국가 정책을 목적의 선함이나 당위성만으로 추진해서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 정책에 관계된 여러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하고 무엇보다 민심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책 추진 능력과 도덕성이 겸비된 세력이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추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 과정은 이런 정책 수행의 전범을 보여준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릉.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불렀다.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높여졌다. 사도세자 책봉죽책문. 사도세자가 김가진에게 ..

“왕의 동생을 제거하라” 오빠 잃은 정순왕후 정조에 복수 칼 겨눠.

작성일 : 2010. 11. 03 ■ “왕의 동생을 제거하라” 오빠잃은 정순왕후 정조에 복수칼 겨눠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4호] 20100711 입력 아무리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돼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정치공세는 사익(私益)이나 당익(黨益)을 실현하기 위한 소모적 정쟁에 불과하다. 이런 정치공세는 구체성이 떨어지거나 과장돼 있기 일쑤다. 이런 정치공세를 현실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정치공세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⑥ 왕대비의 반격 ▲장용영(壯勇營) 내부 평면도. 정조 23년(1799) 제작됐다. 정조는 이율·홍복영 역모사건에 구명겸이 연루된 의혹이 드러나자 새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