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明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 明나라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2호] 20100418 입력 흔히 외교는 평화적 수단이고 군사는 전쟁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양자는 모두 국제정치의 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세종은 국제무대에서 목소리의 크기는 실력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명나라에 사대해 국체를 보존하는 한편 신뢰를 획득해 북방 강역 확대에 나설 수 있었다. 실리를 중시하는 외교가 세종 외교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종이 취한 명과의 사대 외교는 다양한 포석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④ 사대교린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원..

기득권층 반발에 從母法 복원, 노비제 확대 ‘시대 역행’

■ 기득권층 반발에 從母法 복원, 노비제 확대 ‘시대 역행’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1호] 20100410 입력 왕조시대의 국왕은 의민(依民=by the people)보다는 위민(爲民=for the people)을 추구했고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또한 사대부 계급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 때문에 ‘수령고소금지법’처럼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해가 직결된 문제는 일반 백성들의 의사도 중시하는 선진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경직도(耕織圖) 노비들이 탈곡하고 지붕을 잇는 것을 노비 주인이 손자를 데리고 구경하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부분, 작자 미상)하고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제정한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환원했다. 사진가 ..

책에서 찾은 聖君의 길, 지식경영의 시대를 열다.

■ 책에서 찾은 聖君의 길, 지식경영의 시대를 열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60호 | 2010.04.04 입력 세종은 지식경영자였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세종은 공리공론보다는 역사처럼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산 지식’을 선호했다. 그리고 독서를 여가가 아니라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도 세종처럼 방대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경복궁 경회루 앞 수정전. 그 앞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현전 초석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석재를 감싸고 있던 사진 속 나무는 2년 전까지 서 있었으나 최근 ‘정비’라는 이름으로 베어졌다. 언제까지 ‘정비’ 라는 명목으로 유적 파괴가 계속..

"권력은 나눌 수 없다" 태종의 혹독한 가르침

■ 「권력은 나눌 수 없다」태종의 혹독한 가르침.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9호 | 20100328 입력 모든 시대에는 명암이 존재하는데 세종시대 또한 마찬가지다. 세종이 강행했던 ‘수령고소금지법’은 백성들의 큰 반발을 샀다. 애민 군주로 알려진 세종이 왜 이런 악법을 고수했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지만 순리를 거스르는 이런 법은 조선의 개국정신과도 맞지 않았다. 이런 진통들을 겪으며 세종은 비로소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이란 깨달음으로 나아갔다. ↑만송원 쓰시마섬 이즈하라시에 있다. 쓰시마섬의 토착 영주인 소씨(宗氏)의 원찰이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통해 세종에게 군권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쳤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① 애민 군주의 출발 세종 4년(1422) 5월 8일. 세종은 와병 중..

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현실과의 타협은 숙명

■ 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현실과의 타협은 숙명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8호 | 20100321 입력 목숨 걸고 권력쟁취에 나섰다가 불행해진 정객이 많은 반면 권력이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아도 없지 않다. 권력을 줍는 행운을 누릴 수는 있지만 성공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치가로 성공하려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성종은 현상적 처방에 만족했다. 성종이 외면한 시대의 문제는 고스란히 연산군의 어깨에 지워졌다.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사진가 권태균 국왕이 서총대에 친히 나가서 활쏘기 우승자에게 말 두필을 하사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고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절반의 성공 성종 ⑦ 무예 장려 성종 때 사림들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두 가지 ..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7호 | 20100314 입력 현안을 바라보는 정치가와 일반 국민들의 시각이 서로 다를 때 비극이 온다. 국민들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릇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 성종은 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내를 내쫓고 죽여버렸지만, 백성들은 왕비가 아무 죄 없이 쫓겨나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훗날 큰 화를 낳을 것도 알고 있었다. ↑왕비 윤씨를 상상해 그린 초상화. 성종과 세 명의 대비는 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죽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죄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성종 ⑥ 낮과 밤의 두 얼굴 성종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무너진..

조용히 힘 키운 성종, 왕명 거스른 한명회 축출

■조용히 힘 키운 성종, 왕명 거스른 한명회 축출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6호 | 20100307 입력 때로는 이념이 총칼보다 강하다. 사회의 불신이 팽배한 주류 집단을 공격하는 세력은 중간파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공신 집단은 정치·경제적 권력을 독점했지만 전횡과 부패 때문에 명분과 인심을 잃었고 그 공간을 사림이 차지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의 사림이 공신 집단과의 투쟁을 선악의 싸움으로 생각하면서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이목 사당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 김종직의 문인인 이목은 성종 때 사림의 선봉장이었으나 연산군 때 사형당했다. 절반의 성공 성종 ⑤ 압구정 사건 사림들은 성리학의 대의(大義)와 의리(義理) 같은 명분론을 중시했다. 수양의 즉위를 찬(簒..

신진 사림에 탄핵·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신진 사림에 탄핵·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5호| 20100228 입력 역사는 모든 시대적 금기가 언젠가는 깨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금기는 혼자만의 단독행동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금기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이를 실천할 조직이 등장해 깨트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세조 시대에 만들어진 시대적 금기에 도전하는 세력이 재야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사림이라 불리는 신진 정치세력이었다. ↑예림서원 김종직은 훈구 공신들에 맞서는 사림이란 신진 정치세력을 최초로 형성했다.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예림서원. 경남 밀양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 ④홍문관 설치 ▲남효온의 육신전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훗날..

대비 윤씨「권력남용」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 대비 윤씨 「권력남용」 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4호| 20100220 입력 한 체제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패했더라도 당위성만으로 그 체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과 그 이념을 실천할 세력이 존재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조 때 비대해진 공신집단을 대체하려면 왕권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왕권을 보좌하며 공신집단과 맞서 싸울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재야에서 그런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절반의 성공 성종 ③승정원 벽서 사건 ▲성종 어진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공신집단보다 왕권이 미약한 현정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성종 즉위 초는 공신들의 천국이었다. 성종 1년(1470) 1월 11일 한명회와 신숙주는 분경(..

권력은 공신들 손에 … 열두 살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 권력은 공신들 손에...열두 살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이덕일 |제153호| 20100212 입력 절반의 성공: 성종 ② 귀성군 제거 사건 현실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 못지않게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때가 아닌데도 섣불리 나섰다가 불행한 종말을 맞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갓 즉위한 성종은 어리지만 ‘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 공신집단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종은 공신집단에 맞서는 대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또한 정치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터득했던 것이다. ↑압구정 한명회는 속세에 뜻이 없음을 표하기 위해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으나 훗날 많은 문인들의 조롱을 받았 다. 예종의 급서에 의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종 즉위년(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