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심이 원한건 변화…신도시발 농업· 상업 혁명 시동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7호 | 20100731 입력
세종시는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정치논리가 우선했다.
그 결과 선거라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미래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사도세자의 배후도시라는 정치적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다.
조선의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을 선도하겠다는 미래 가치를 담아냈다.
화성 건설에는 플러스 알파뿐만 아니라 오메가까지 담겼기 때문에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수원 화성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의 성곽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미래를 지향하는 선도도시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⑨ 화성의 탄생
정조가 수원 화성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사도세자 묘소인 현륭원의 배후도시란 사실 자체가 정치적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노론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화성에 대해 자신들이 장악한 한양에 맞서는 신체제의 중심도시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정조의 친위부대인 막강한 장용외영이 이미 화성에 버티고 있었다.
수원 만석공원의 일월저수지
만석거 범람하던 진목천의 물을 이용해 만든 저수지다.만석거와 대유둔은 수원이 농업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화성을 정치적 논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를 갖는 신도시로 설계했다. 정조는 먼저 농업혁명을 추동하는 전진기지로 설계했다. 농업문제는 심각했다. 소수 벌열(閥閱) 가문이 농지를 독점하면서 다수의 자영 농민들이 몰락했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52세 때에 완성한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국왕이 선정을 베풀려고 해도 전제(田制=토지제도)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갈파하면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역설했다. 또한 병농일치의 군사제도인 부병제(府兵制) 실시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둔전(屯田)이었다.
정조는 재위 17년(1793) “고(故) 처사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수원의 형편을 논한 곳이 있는데, 고을 소재지를 옮겨야 한다는 계책과 성을 쌓아야 한다는 책략이 마치 100년 전에 살면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국조보감 정조 17년)”면서 “그는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사람과 같다”고 말했다.
유형원의 개혁론에 깊게 공감했음을 시사한다.
↑만석거 영화정(迎華亭), 정조는 화성을 노동과 휴식이 함께하는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정조는 소수 벌열 가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실현 가능한 토지제도 개혁은 농지 몰수에 의한 분배가 아니라 새로운 농토의 창출이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재위 11년(1787) 각신 윤행임(尹行恁)에게 “둔전은 훌륭한 제도이지만 우리나라는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었다”고 한 뒤 일부 산군(山郡)에 둔전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정조는 화성에 둔전 성격의 거대한 농장을 만들어 조선 농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황무지를 개간해 농토를 조성해야 하고 물을 공급할 저수지를 축조해야 했다.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수원부 북쪽 10리에 진목천(眞木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조는 진목천의 물을 이용해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화성 뒤쪽의 황무지를 개간할 예정이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대유둔 설치 절목’에 따르면 이렇게 만든 저수지가 측우기를 활용하고 최신 과학기술로 수문(水門)·갑문(閘門)·수차(水車)를 만든 둘레 1022보의 만석거(萬石渠)였다.
그리고 화성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토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유둔(大有屯)이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 역시 도급제 임금노동으로 조성했다. “이 어찌 다만 부민(府民: 수원 백성)뿐이겠는가. 동서남북에서 적당한 거처 없이 품팔이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올 것이다.
이들이 혹은 움집을 짓고 혹은 가게를 차려 술이나 밥을 팔아 그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을 바꾼다면 이 또한 홀아비와 과부의 이익인 것이다.(정조실록 18년 11월 1일)”
정조는 화성 성역(城役)이 농토에서 유리된 가난한 서민들의 일자리가 되리라고 예상했는데 과연 전국 각지에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일꾼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이들이 몰려들어 흥성거렸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항산(恒産)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화성을 튼튼하게 하는 근본 계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성은 만세토록 무너지지 않을 기반이 정해질 것이고, 백성 만여 호가 기름진 땅을 얻을 것이며, 창고에는 만 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니, 일거에 모든 이익이 다 갖추어지는 것이다.
어찌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조는 이렇게 조성한 대유둔을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 관예 등에게 3분의 2를 나누어 주고 3분의 1은 농토가 없는 수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둔소(屯所)에서는 농지와 모든 농사자재를 제공하는 대신 그 생산물을 5대5로 나누어 화성의 보수와 관리 비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대유둔은 첫해인 정조 19년(1795) 단위면적당 최고의 생산성을 올렸다.
장용영 병사들은 병농일치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었고, 수원의 가난한 백성들은 일터를 얻었다.
장용영이 최고의 군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역뿐이던 군역이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질 수 있는 생산적인 일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의 성공에 힘입어 재위 22년(1798)에는 새로운 저수지 축만제(祝萬堤)를 쌓고 그 물을 사용하는 축만제둔(祝萬堤屯)을 만들었으며, 황해도 봉산에도 장용영 둔전을 설치했다.
이렇게 정조는 화성에서 농업혁명의 전범을 보여주었고, 장용영 병사들과 백성들은 이에 환호했다.
정조는 화성을 농업 선도도시뿐만 아니라 상업 선도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도시의 성패는 인구 집중에 달려 있는데 이를 잘 아는 정조는 재위 14년(1790) 채제공에게 화성 인구 증가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다. 채제공은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廛房=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라며 상업도시를 만드는 자체가 인구 증가책이라고 보고했다.
정조와 채제공은 농업의 잉여생산물이 상업을 통해 소비되어야 사회 전체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상업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 중 하나는 일종의 관상(官商)인 서울 시전(市廛) 상인들이 사상(私商)들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조는 재위 15년(1791) 초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금난전권을 철폐해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용함으로써 상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정조와 채제공은 화성을 상업도시로 만드는 것이 신도시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채제공은 당초 서울의 상인들에게 무이자로 자금을 빌려주어 화성에 상설 상가를 조성하고 화성 인근에 면세특권을 주는 5일장을 열면 상업이 흥성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일부 대신이 “(화성에) 전방을 따로 짓는 것은 서울의 전방과 서로 방해가 될 염려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이에 수원부사 조심태가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 밑천이 있고 장사 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살게 하면서 관청에서 빌린 돈으로 이익을 남기며 살아가게 하자”는 수원 상인 활용 방안을 제시했다. 균역청 산하 진휼청(賑恤廳)의 자금 6만5000냥이 화성을 상업도시로 만드는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대부분의 성읍은 북쪽 관청을 중심으로 정(丁)자형 길을 조성하는 식으로 도로를 만들었으나 화성은 인위적으로 ‘십자로(十字路)’를 조성했다. 도로 양편에 상가를 조성해 상업도시로 만들려는 뜻이었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따르면 이때 1만5000냥을 수원 상인들에게 대여해 미곡전(米穀廛: 곡식상),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 옷감상), 유철전(鍮鐵廛: 놋과 철), 관곽전(棺槨廛: 관과 곽 등 장의상), 지혜전(紙鞋廛: 종이·신발상) 등의 시전을 개설했는데, 종로의 육의전처럼 수많은 사람이 흥성거리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정조는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화성에서 시작된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을 전국으로 확대할 생각이었다.
화성은 대유둔으로 조선의 농업혁명을 선도하고, 십자형 상가로 상업혁명을 선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정조 18년(1794) 정월부터 시작된 화성 축성은 정조가 당초 예상한 10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과 34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 10월 낙성식을 할 수 있었다.
시공연도에 6개월간 공사를 중지했으니 불과 28개월 만에 준공한 셈이었다.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치밀한 기획과 채제공의 총괄, 그리고 조심태의 현장 감독 능력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강제부역이 아니라 도급제 임금노동을 실시함으로써 노동 효율성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가 정약용이 설계한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한 후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기뻐한 것처럼 새로운 첨단 장비도 큰 몫을 했다. 새롭게 변화하는 조선의 첨단 역량이 총동원되었다.
정조는 또한 영화정 등을 지어 노동만이 아니라 휴식도 있는 도시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수원 춘팔경(春八景)과 추팔경(秋八景)이 되었다. 화성은 꿈과 노동과 휴식이 함께하는 이상적인 계획도시였다. 정조는 사회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를 부인하는 관념적 세계관과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정조는 화성을 이런 변화를 흡수하고 선도하는 도시로 건설했다.
이렇게 화성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미래가 되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민심이 원한 건 변화.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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