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야촌(1) 2010. 11. 21. 20:11

 작성일 : 2010. 11. 21

 

■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3호] 2010.09.12 입력

 

새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왕조의 안정적 유지라는 큰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새 왕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는 개국시조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의 자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계는 선양 형식으로 개국에 성공했지만 세자 책봉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부인 강씨의 입김에 따라 결정함으로써 새 왕조의 앞날에 큰 부담을 주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④ 역성혁명

 

출중한 무장인 이성계는 정도전 같은 전략가들의 보필을

받아 선양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이 위화도 회군을 건의했을 때 이성계 추대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태조실록은 남은 등이 돌아와 “전하(殿下:이방원)에게 알리니,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라고 처음에는 이방원도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고 전한다.

왕(王)씨가 종성(宗姓)인 나라에서 이(李)씨가 왕이 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조준 등이 기획한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 프로그램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태조실록에서 “이때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서로 다투어 추대하려고 했다”면서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미 소속되었는데, 왜 빨리 나아가기를 권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천명의 증거인 인심이 토지개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태조실록이 이에 드디어 “전하(이방원)가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이방원은 역성혁명파와 손잡고 부왕을 개국 시조로 만들기로 결심했다.그런데 이성계는 자신이 앞장서서 고려를 무너뜨리기보다 백관의 추대를 받아 할 수 없이 왕위에 오른다는 모양새를 원했다.

이성계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자 태조실록은 어떤 사람이 지리산에서 얻은 이서(異書)를 바쳤는데, 거기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삼한(三韓) 강토를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의(非衣)·주초(走肖)·삼전삼읍(三奠三邑)”이라는 등의 말이 쓰 있었다고 전한다.

목자는 이(李)씨를 뜻하고, 비의는 배극렴(裵克廉), 주초는 조준(趙浚), 삼전삼읍은 정도전(鄭道傳)을 뜻하는 것처럼 백관의 추대로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이양 받는 선양(禪讓) 형식을 원했던 것이다. 

그해 7월 12일 시중 배극렴은 왕대비(王大妃:공민왕 부인)에게 “지금 왕(공양왕)이 혼암해 군주의 도리를 이미 잃어서 인심이 이미 떠나갔다”면서 폐위를 주청했고, 형식상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했다.

 

공양왕은 ‘내가 본래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강제로 세웠다’면서 “내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事機)에 어두우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습니까(豈無<5FE4>臣下之情乎)’라는 태조실록의 토로에서 허수아비 군주의 비애가 묻어난다. 이렇게 공양왕(恭讓王)은 이름대로 공(恭)손히 왕위를 양(讓)보하고 원주로 갔다.

7월 16일 시중 배극렴과 조준·정도전 등 50여 명의 대소 신료들이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사저로 나갔다. 

이때 대사헌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을 띠자 남은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이방원이 “의리상 죽일 수 없다”고 말릴 정도로 이성계 추대는 대세였다.

 

태조실록은 “태조가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나 해 질 무렵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황망하여 거조를 잃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성계는 즉위 간청을 여러 번 사양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17일 드디어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으로 나가 왕위에 올랐다. 7월 28일에야 즉위 교서가 반포되었는데,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매도해 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고는,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 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라고 찬탈(簒奪)이 아니라 고려 왕조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유신(儒臣)들은 이것이 수사(修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맞서 싸우는 대신 개풍군 광덕면의 광덕산 두문동(杜門洞) 골짜기에 들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군사력이 강하기도 했지만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의 민심이 돌아서 함께 싸울 세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이성계가 지녔던 무장답지 않은 처세가 더해졌다. 동각잡기는 이성계가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해 아무도 욕하는 자가 없었고, 서로 이성계 부대에 소속되고 싶어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같은 책은 “태조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면서 활을 쏠 때도 상대편의 실력을 봐서 비슷하게 맞히다가 권하는 이가 있으면 한 번쯤 더 맞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이성계는 스스로를 낮추는 처신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고, 정도전·조준 등의 개국 프로그램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왕조 백관(百官)들의 추대 형식으로 새 왕조 개창에 성공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선양 형식으로 개창되었지만 불안한 신생 왕조일 수밖에 없었다.

신생 왕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속성 확보였고, 그 핵심은 세자 책봉이었다. 그래서 개국 공신들은 개국 직후부터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러나 개국 공신들과 이성계의 생각이 달랐다. 태조실록은 “처음에 공신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이 세자를 세우고자 청하면서 나이와 공으로써 세우려고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신덕왕후)를 중하게 여겨 방번(芳蕃)에게 뜻을 두었다(1년 8월 20일)”라고 전하고 있다.

 

강 씨 소생의 방 번과 방석(芳碩)은 나이로 보나 공으로 보나 대상이 아니었지만 베개송사에 넘어간 이성계는 강씨 소생의 장남 방번(만 11세)에게 뜻을 두었다. 태종실록은 배극렴이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라고 말하니 ‘태조가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태조가 조준에게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때가 평안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하오니 원하건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답했다. 강 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태조가 종이와 붓을 조준에게 주면서 이방번의 이름을 쓰라고 시키니 조준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않았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

태조실록은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고 무상(無狀)하므로 공신들이 어렵게 여기고 사적으로 서로 ‘만약 강씨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막내가 낫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강 씨 소생을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과 방 번 만은 안 된다는 공신들의 최대공약수가 방석으로 낙착되어 8월 20일 방석(만 10세)이 세자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향처(鄕妻:고향에서 얻은 부인 한씨) 소생의 장남 방우(芳雨)의 나이 만38세였으며, 공신들과 부친 추대 계획을 세웠으며 개국 석 달 전 정몽주를 격살한 공이 있는 5남 이방원의 나이 만25세였다. 

 

게다가 방원은 물론 차자(次子) 방과(芳果:정종), 사자(四子) 방간(芳幹)을 비롯해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대부분 사병을 갖고 있었다. 이성계는 상식을 무시한 세자 책봉이 화란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을 무시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는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새 국호를 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성계가 고려 충숙왕 4년(1335) 10월 11일 태어난 곳이 화령부(和寧府:영흥)였다. 명나라는 태조 2년(1393) 2월 “동이(東夷)의 국호 중에는 조선이 아름답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면서 조선을 선택했다. 

 

정도전도 조선 경국전에서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기자·위만이 바로 그들”이라고 고조선을 이은 국호로 생각했다.  새 왕조 개창 직후 이성계가 가장 걱정한 것은 왕씨들의 부활이었다. 이성계 즉위 사흘 후인 7월 20일 왕씨들을 지방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주청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부자와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 부자 등만 전조(前朝=고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외하고 나머지는 강화도와 거제도에 안치시켰다. 

 

그러던 태조 3년(1394) 동래현감 김가행(金可行) 등이 밀양의 맹인 복자(卜者) 이흥무(李興茂)에게 “전조(前朝) 공양왕과 우리 주상 중에 누가 명운(命運)이 나은가? 또 왕씨 중에는 누가 명운이 귀한가?”라고 물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도 새 왕조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하다는 증거였다. 고려는 무려 474년을 버틴 왕조였다. 

결국 이흥무가 명운이 귀하다고 말했던 왕화(王和)와 왕거(王琚) 등의 목이 베어졌고, 나아가 공양왕과 두 아들도 교살(絞殺)당했다.


이성계는 겉으로는 왕씨에게 유화책을 쓰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왕씨들을 죽였다.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섬으로 보내준다고 왕씨들을 배에 태운 후 뱃사람에게 구멍을 내도록 시켜 빠져 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왕씨들은 ‘전(全)’씨나 ‘전(田)’씨, ‘옥(玉)’씨 등 왕(王)자가 들어가는 성으로 바꾸거나 ‘용(龍)’씨로 변성(變姓)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작 걱정해야 할 대상은 왕씨들이 아니라 한 씨 소생의 자기 자식들이었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자식들이 부왕에게 칼을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