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작성일 : 2010. 11. 03 ■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3호] 20100703 입력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특권과 능력의 대결 과정이기도 하다. 혈통·신분·학벌 같은 각종 카르텔의 성(城)에 능력은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특권 카르텔이 계속 승리하면 그 사회는 정체되고 능력이 승리하면 역동적으로 변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암적 요소가 학벌 카르텔이란 점에서 정조 때의 능력 중시 경험은 큰 교훈을 준다. ↑청나라 나양봉이 그린 박제가(朴齊家) 초상. 조선에서는 서자라고 천대받았던 박제가는 이미 청나라에 문명(文 名)이 알려져 있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⑤ 북학파의 ‘도발’ 임란 때 백성들이 불을..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작성일 : 2010. 11. 03 ■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2호] 20100626 입력 내세관이 없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모든 보편적 종교와 공존이 가능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노론 유학자들은 유학(주자학)을 유교라는 유일사상의 종교로 만들었다. 노론 정권 유지의 이념이 된 유교는 다른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유일사상의 나라 한 구석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자라고 있었다. ↑전주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당한 전주 풍남문에 세워졌다. 1891년에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착공해 6년 만에 준공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④북경서 세례받은 이승훈 정조 7년(1783) 12..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71호] 20100620 입력 이념적 지향성이 강한 정치집단은 배타적 권력독점을 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이념은 치열한 논쟁을 거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이 권력의 힘으로 성역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정치집단이 배타적 독점 권력을 장악할 경우 사회는 크게 퇴보하고 이런 상태를 해소하려는 정치개혁 요구가 거세지게 된다. ↑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앞 시사단(試士壇). 정조가 영남 남인들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지방 별시를 실시한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비각이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③ 남인의 부상 정조 즉위 무렵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소론의 당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를 뒤..

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실 지붕 뚫고 암살 시도.

■ 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실 지붕 뚫고 암살 시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0호] 2010.06.12 입력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할 경우 정쟁은 극단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경우 상대방이 집권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정치의 모든 타협이 거부되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면서 정치 자체가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시는 경모당을 짓고 옥으로 만든 도장을 바쳤다. 노론에서는 정조를 압박 하기위해 이복동생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라고 주장했다. 사진은 헐리기 전의 경모궁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현재 서울대 의대 경내에 남아있는 경..

정치보복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 정치보복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9호 | 20100606 입력 한이 너무 많은 인물이 집권하면 ‘성공한 정치’를 하기 어렵다. 정치 보복의 유혹을 끊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한을 가지고 즉위했으나 과거로 돌아가 정치 보복에 나서지는 않았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소수 세력만 제거하고 나머지에게는 함께 미래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멀었다. ↑사도세자 사당 전남 무안군 남동리에 있는 사당이다. 마을 사람들의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나 세웠다고 하는데 민간에서 세운 유일한 사당이다. 이때 영조가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受點權)을 세손에게 주고 또 대리청정까지 시키지 않았다면 국왕은 다른 인물이 되고 정조는 노론에 의해 죽..

3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의 효율 극대화

■ 3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의 효율 극대화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8호] 20100530 입력 국왕이 직접 모든 국사를 챙긴다는 뜻이 ‘만기친림(萬機親臨)’이다. 세종은 모든 국사에 성실했으나 여러 종류의 지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세종은 모든 국가기관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북돋고 국가기관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을 주요한 일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왕권까지 과감하게 의정부 또는 세자와 나누었다. 왕권보다 중요한 것이 국사라는 생각에서였다. ↑영릉과 신도비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이장했는데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⑩ 시스템 통치 국..

언어 혁명→생활 혁명, 쉬운 법률 용어로 백성을 구하다.

■ 언어 혁명→생활 혁명, 쉬운 법률 용어로 백성을 구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7호]2010.05.23 입력 언어는 그 민족의 거울이다. 세종은 말과 글이 다른 언어생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소리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인간의 구강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언어정책으로 훈민정음의 발음체계가 크게 제한되면서 특정 발음을 못하는 절름발이 언어가 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정신으로 우리말을 돌아봐야 할 때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⑨훈민정음 창제정신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표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온 천하에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세종 27년(1445..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6호] 20100516 입력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문화 수준이 낮으면 강국이 될 수 없다. 일시적으로는 세상을 지배할지 모르지만 곧 높은 문화에 의해 녹아내리게 마련인 것이다. 세종은 외교정책상으로는 중국에 사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독자성을 추구했다. 금속활자를 만들고 아악(雅樂)을 정비했다. 무엇보다 훈민정음을 직접 만들어 백성들의 언어생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⑧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하고 이를 토대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해서 조선의 무궁한 번성을 기리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세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훈민정음(訓民正音) ..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

■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 문화 르네상스와 국력 신장을 이루다. 이덕일의 事思史 | 세종,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 [제165호] 20100509 입력 입지전적 인물이 많이 출현하고 그런 인물이 대접받는 사회가 희망 있는 사회다. 태종·세종이 정점인 조선 전기는 능력만 있으면 천인(賤人)이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고 이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만인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대한민국에서는 과연 능력이 학벌이나 연줄보다 우선되는지 600년 전의 시대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⑦ 천인 등용 앙부일귀 세종은 천인 장영실을 명나라에 유학까지 보내면서 과학기술을 익혀 오도록 했다.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귀는 전하지 않는다. 사진은 후대에 만든 앙부일귀의 모습이다..

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트린 신하까지 껴안다.

이덕일] 제164호 | 20100502 입력 작성일 : 2010. 11. 03 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트린 신하까지 껴안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⑥ 용인술 인재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보면 한 조직이나 국가의 현 상태와 미래를 진단할 수 있다. 세종은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취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활용했다. 심지어 자신을 모욕하거나 반대했던 사람들까지도 중용해 높은 관직을 주었다. 세종은 정치보복을 단절시키는 화해의 정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능력을 국가 발전에 활용하는 동참의 정치로 승화시켰다. ↑황희 초상. 황희는 세자 양녕의 비리를 비호하다가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당했다. 하지만 세종은 그를 중용해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재상으로 만들었다. 사진가 권태균 인재를 중시한 세종은 과거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