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전쟁 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

야촌(1) 2010. 11. 21. 19:58

■ 전쟁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1호] 2010.08.29 입력

 

전통시대에는 왕의 즉위나 새 나라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다. 천명을 받았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민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집권세력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과 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민심은 새 나라가 열리기를 희구한다.

 

 

<1>황산대첩비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다. 이성계는 운봉전투로 남방 사람들에게도 무명을 떨쳤다. 

       일제는 반(反)시국적인 고적(古蹟)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이 비를 깨뜨렸다. 

      지금 서있는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2>삼봉집 목판 정도전이 쓴 삼봉집의 목판이다. 정조 때 왕명으로 재간한 것이다.  <사진가 권태균>

     

이성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 ② 天命

 

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근본적 힘은 군사력에 있었다. 그의 군사력은 원나라 지방 세력의 일부였다. 

원나라가 약해지면서 그의 부친 이자춘은 집안의 군사력을 고려에 소속시켰다. 

 

이성계는 탁월한 무력으로 변방을 뛰어넘어 중앙으로 진출했다. 이성계 자신부터 힘이 장사였다.

함흥에서 큰 소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데 불을 붙여 던져도 말리지 못했으나 이성계가 양 손으로 두 소를 붙드니 더 이상 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전할 정도다. 

 

삼국사기는 활 잘 쏘는 사람을 부여말로 주몽이라고 했다는데, 이성계가 바로 고려 말의 주몽이었다. 

우왕 3년(1377) 경상도 원수(元帥) 우인열(禹仁烈)이 이성계와 서청(西廳)에 마주 앉았을 때 쥐 세 마리가 처마를 타고 달아났다.

 

이성계가 아이에게 활과 고도리(高刀里:작은 새를 잡는 데 쓰는 살) 세 개를 가져오게 하고는 “맞히기만 하고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나온 쥐를 쏘니 화살과 함께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달아났으며, 다른 두 마리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가 태조실록 총서에 전한다.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세운 첫 전공은 부친 이자춘의 사망 이듬해인 공민왕 10년(1361) 8월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으로 1500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로 도망간 박의 일당을 잡아 죽였다. 

 

이 사건 이후 이성계는 북쪽의 홍건적(紅巾賊)과 남쪽의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국적 무명(武名)을 얻고 민심을 획득해간다. 하북성(河北省)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인 홍건적이 요동으로 진출했다가 원나라에 쫓겨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공민왕 10년(1361) 10월이었다. 

 

반성(潘誠)·관선생(關先生)·사유(沙劉) 등이 이끄는 홍건적 10만 명은 삽시간에 삭주(朔州)·이성(泥城) 등을 함락시키고 개경(開京)까지 위협했다. 공민왕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까지 파천하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고려에서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삼고 각 도에서 20만 명을 징발해 이듬해 1월 개경에서 관선생과 사유 등을 잡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사절요는 이때 이성계가 2000명을 거느리고 선두에 섰다고 전한다.

 

이때만 해도 이성계는 여러 무장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공민왕 11년(1362) 2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침략했을 때에야 이성계는 비로소 독자적 무명을 떨친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심양(瀋陽)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을 자칭하던 나하추는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 때 쫓겨난 원나라 쌍성총관 조소생(趙小生)의 부추김을 받고 고려를 침략했다.

 

공민왕 5년의 북강회수운동은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고려에 가담한 것이 결정적 전기가 되었으므로 나하추의 침략은 이성계 집안과도 관련이 있었다. 공민왕은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격퇴하라고 명했다.

세종 때 편찬한 고려사 등이 이 전투에 대해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것은 이성계가 독자적 무명(武名)을 얻은 계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하추의 부하 중에 갑옷과 투구는 물론 얼굴을 가리는 면구(面具)와 턱을 가리는 이갑(頤甲)까지 두른 장수가 있었다. 이성계는 먼저 말을 쏴서 그 장수가 말고삐를 당기느라 입을 벌리게 만들고 입을 쏴 죽였다는 내용도 있다.

 

정도전이 태조 2년(1393) 납씨곡(納氏曲:납씨가)을 지어 “공을 이룸이 이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년만년 전하리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 전투는 조선 개창의 한 명분이 되었다.

 

권근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명에서 “(나하추를 격퇴한) 그 다음 해인 계묘년(공민왕 12)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니, 공민왕이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워졌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해 장(將)·상(相)에 이르게 되었다”며 이성계가 이 전투를 계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계는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에서 왜적을 물리치면서 남방 백성들에게까지 무명(武名)을 드리우게 된다. 

이때도 이성계의 신궁(神弓)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자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삼아 보냈는데, 이때 적장 중에 아지발도(阿只拔都)라는 백마 탄 소년장수가 있었다.

 

그 역시 얼굴까지 갑옷으로 가렸으나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 의형제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이지란)에게 “내가 투구 꼭지를 맞춰 떨어뜨리면 네가 쏘라”고 말한 후 투구를 떨어뜨리자 퉁두란이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일화는 퉁두란으로 대표되는 여진족 부대가 이성계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음을 말해준다.

 

이성계 부대는 기마병 위주의 여진족·몽골족 등이 포함된 다민족 혼성부대였기에 강했던 것이다. 

훗날인 선조 8년(1575)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치계(馳啓)로 전투 현장인 운봉 동쪽 16리 지점에 황산 대첩비를 세우는데,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은 비문에서 “성스러운 무력의 크고 맑은 공이 높고도 넓으셔서 만민이 영원히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이때의 승전으로 만민이 의지하는 천명이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황산대첩비를 읽고서(讀荒山大捷碑)라는 시에서 “이 거사로 한밤중 골짝에 있던 배 이미 자리 옮겨/위화도 회군할 때를 기다릴 것도 없었도다(此擧夜壑舟已徙/不待威化回軍時)”라고 노래하고, 황산대첩비 발문에서는 “신무(神武)로써 승리를 거둔 것이지 인력(人力)이 아니다”라며 천명의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권근도 건원릉 신도비명에서 “(개국은) 모두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늘이 천명을 내렸을지라도 이를 현실로 만드는 능력이 없다면 한갓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무공을 세운 장수마다 모두 천명이 내렸다고 주장한다면 나라는 안정될 틈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운봉전투는 왜구의 주력이 이미 진포 전투에서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화포 공격에 무너지고 남은 패잔병에 불과했을 뿐이다. 

 

운봉전투로 이성계의 무명이 더욱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이름을 가진 인물은 많았다. 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건원릉(健元陵)조는 “(이성계가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도통(都統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으니 이 자를 가지고 정국(正國)할 자는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태조실록에도 실린 이 글은 역으로 이성계 외에도 시중 경복흥과 최영이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개국 시조가 된 것은 이성계에게만 천명이 내렸기 때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경복흥과 최영은 고려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성계가 공민왕 5년(1356) 부친 이자춘을 따라 처음 개경에 갔을 때는 만 21세 때였다. 

그 전까지 이성계는 원나라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고려 왕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동북아의 질서가 바뀌는 원·명(元明) 교체기라는 혼란기 속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허약함을 보았고,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계의 군사는 사실상 사병에 가까웠다. 그러나 군사력이 있다고 500년 고려 왕업을 목적(牧笛)에 부치고 새 나라를 개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국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고, 그 이념에 바탕한 새 정책이 필요했다. 

이는 말 위의 사람인 이성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재의 지식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한 불우한 지식인의 머리에 이런 이념과 정책이 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풍운아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부록은 우왕 9년(1383) 가을 정도전이 함경도 함주(咸州)에서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비밀히 말했다고 전한다. 

 

이성계가 “무엇을 이름인가?”라고 묻자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라고 답했지만 그 의미가 개국을 뜻한다는 것은 이심정심(李心鄭心)으로 서로 알아차렸다.

 

이때 정도전이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인간을 굽어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인간부앙편진종=人間俯仰便陳)”라는 것이었다. 용비어천가와 삼봉집등은 “태조에게 천명이 있음”을 빗긴 말이었다고 전한다.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가니 작은 일에 구애받지 말고 대사를 이루라는 뜻이리라. 이 만남이 사실상 조선 개국을 결정지은 계기였다. 이성계의 군사력은 정도전의 이념과 결합하면서 비로소 혁명 무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 전쟁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 원동력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