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 벼’ 기현상

야촌(1) 2010. 11. 14. 00:24

작성일 : 2010. 11. 14

 

■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벼’ 기현상.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78호 | 20100807 입력  

 

정치세력이 분열돼 미래와 과거를 각각 지향하면 양자의 공존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념을 표방하든 과거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기존 체제의 유지로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 지향의 정치세력에 둘러싸인 채 24년간 고군분투했던 정조는 끝내 대개혁의 칼을 뽑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것은 비단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의 미래도 함께 죽은 것이었다.

 

↑정조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데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사도세자 묘소인 융건릉 곁에 있다. 노론 벽파는 시신을 땅에 묻자마자 정조가 키워온 남인들을 공격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⑩오월 그믐날 경연 교시


정조는 재위 19년(1795) 7월 채제공과 함께 남인의 중심인물이던 공조판서(정2품) 이가환을 충주목사(정3품)로, 우부승지(정3품)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 종6품)으로 좌천시켰다. 전 평택현감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 보냈다.

 

정조실록은 ‘이때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 대부분이 점점 사학(邪學: 천주교)에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충주가 가장 심했으므로 특별히 이가환을 그곳의 수령으로 삼고, 또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삼은 뒤 각각 속죄하는 실효를 거두도록 한 것이었다’라고 그 배경을 쓰고 있다. 한때 천주교도였던 전력을 씻으라는 뜻의 좌천이었다.


전라도 진산에서 권상연·윤지충 등 양반 천주교도들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이후 사대부들은 대부분 천주교를 버렸으나 중인들은 계속 신앙을 고수했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밀입국시켰던 최인길·윤유일·지황 등 중인 신자들이 정조 19년 5월 포도청에서 장사(杖死)한 사건이 발생하자 노론에서 ‘조정 내 남인들이 배후’라는 식으로 공격해 정조는 남인들을 일시 퇴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속히…(이가환) 도당을 제거하심으로써 혼란의 근본을 끊어버리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하는 판국이었으므로 좌천에 그친 것만도 정조의 보호와 배려가 작용한 것이었다.

 

 

↑정조 상여 그림 정조 국장도감 가운데 있는데 임금의 상여를 뜻하는 대여(大輿)

    라고 표시돼 있다.

 

남인들의 복귀 시기를 모색하던 정조는 재위 21년(1797) 4월 이가환(李家煥)을 도총부 도총관으로 특배(特配: 임금이 직접 임명함)하고, 6월에는 정약용을 승정원 부승지로 등용해 남인들에 대한 신임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노론의 집요한 공세에 지쳤던 이가환·정약용 등은 정계 복귀에 부정적이었다. 


이가환은 “오직 영광의 길(벼슬)을 영원히 사직해 여생을 마치고 싶다”면서 취임을 거부했고, 정약용도 “차라리 산속에 모습을 숨김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잊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이들은 논란 많은 정계를 떠나 고향에 은거하고 싶어 했지만 정조는 돌아갈 고향도 없었다.

 

또한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상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실력까지 갖춘 남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취임을 거부하는 이가환에게는 유배를 명했다가 다시 명을 받들라는 식으로 취임시켰고,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했다. 정약용의 연보인 사암(俟菴)선생연보에는 정조의 첨서낙점(添書落點: 임금이 직접 이름을 써서 임명하는 것)으로 곡산부사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노론의 강한 반발이 있었다. 정조는 최근 공개된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서 “허울뿐인 말단 벼슬조차 소론과 남인에 의망하지 않았으니 어찌 말이 되겠는가? 정(丁)을 서(西)로 보내지 않은 것은 선을 권장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1797년 6월 27일)”라고 꾸짖어 노론이 정약용을 황해도로 보내라는 말을 거부하자 직접 임명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조는 그해 12월 이가환을 한성부 판윤(서울시장)으로 삼았다. 정조 23년(1799) 1월 남인 영수 채제공이 만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정조는 이가환·정약용 등을 그 후계자로 양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북경에서 서학서를 가져온 이승훈의 죄도 재위 24년(1800) 2월 1등급을 감함으로써 사면이 멀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드디어 재위 24년(1800) 5월 30일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 오월 그믐날 경연의 교시)라 불리는 중대 발언을 통해 정국을 긴장에 빠뜨렸다. 무엇보다 정조가 오회연교에서 ‘모년의 의리(사도세자 사건)’를 거론한 것은 노론 벽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신하들이) 의리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의리와 배치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것이 한 번 굴러 모년의 대의리(영조 38년의 사도세자 사건)에 관계되었고 두 번 굴러 을미년(영조 51년의 세손 대리청정 방해사건)의 상황이, 세 번 굴러 병신년(정조 즉위년의 정조 즉위 방해사건)의 상황이, 네 번 굴러 정유년(정조 1년의 정조 암살기도 사건)의 상황이 벌어졌다…(정조실록 24년 5월 30일).”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방해하고, 심지어 자객 전흥문을 보내 암살하려고 했던 신하들은 모두 노론 벽파였다. 정조는 이런 행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면서 이들이 반성하고 옳은 길을 걷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정조는 또 자신은 일정 기간의 시련을 준 뒤 큰일을 맡겼다면서 조만간 중대한 인사이동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재상 후보는 남인 이가환이었고, 정약용도 중용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오회연교는 모든 당파에 조만간 남인이 대거 등용되리란 뜻으로 해석되었는데, 정약용의 연보인 사암선생연보는 이런 정국 구상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정조는 그해 6월 12일 밤 고향 마재에 은거 중인 정약용에게 규장각 아전을 보내 한서선(漢書選) 등의 책을 전달하며 “(이달) 그믐께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6월 말께면 경연에 참석할 수 있는 주요 벼슬에 등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때 규장각 아전은 정약용에게 “제가 직접 하교를 받들 때 전하의 안색과 말씀하시는 어조가 매우 온화하고 매우 그리워하는 듯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최근 공개된 어찰에서 정조는 그해 6월 15일 심환지에게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놓고 일부 학자가 정조의 유언인 것처럼 해석했지만 이는 특정 당파의 자리에서 역사를 바라본 아전인수에 불과하다.

 

6월 14일자 정조실록은 “이달 초 열흘 전부터(自是月旬前) 종기가 나서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다”고 기록해 정조의 병이 종기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 자신도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라고 ‘가슴의 화기’가 더 큰 병인(病因)인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6월 15일 어의 백성일(白成一)은 “고름은 거의 다 사라졌고 뿌리(根)도 없습니다. 

가슴의 화기가 내려가면 이 증세도 저절로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정조의 진단에 동의했다. 

그런데 6월 16일 정조는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화병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서 그 책임을 조정의 행태에 돌렸다.

 

정조는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畏)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일부의 행태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한 번의 거조(擧措=행동거지)면 결판이 날 텐데 그들은 오히려 두려운 줄을 모른다는 말인가?(정조실록 25년 6월 16일)”라고 조만간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길지도 모른다고 시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15일 거의 다 나았다던 정조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다.

 

노론 벽파에서 작성한 정조실록은 정조 치료의 진상이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6월 24일 심환지의 친척이기도 한 어의 심인(沈<93D4>)이 수은 성분인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하는 연훈방(烟熏方)을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정조는 6월 27일에는 “혹시 백성들의 일에 관한 사항이 있으면 비록 이런 상황이라도 자주 여쭈어 조치하도록 하라”고 명하는데 이때가 사망 하루 전이었다. 6월 28일 정조실록은 ‘정조가 영춘헌(迎春軒)에 거동해 신하들을 접견했다’면서도 “이때 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서로 모순된 상황을 적고 있다.

 

같은 날 정조실록은 “주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다. 마침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므로 신하들이 큰 소리로 신들이 들어왔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대답이 없었다(6월 28일)”라고 적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순왕후가 직접 약을 받들어 올리고 싶다면서 모든 신하를 밖으로 물리쳤다. 그렇게 방 안에는 위독한 상태의 정조와 정순왕후만 있는 가운데 잠시 후 정순왕후가 통곡으로 정조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렸다.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은 정조의 최대 정적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런데 순조실록은 “이에 앞서 대행대왕(정조)의 병세가 위독한 상태에 있을 적에 대왕대비가 언서(諺書)로 하교해 전 승지 윤행임을 발탁해 승정원 도승지로 삼았다”라고 기록해 정조가 죽기 전에 이미 정순왕후가 불법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조의 승하는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전면 부활을 의미했다. 정순왕후는 만 10세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했다. 그러면서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몰락했던 친정을 부활시키고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승진시키고 노론 벽파에게 전권을 주었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그의 24년 치세를 되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며칠 전 경기도 양주·장단 등의 고을에서 벼들이 갑자기 하얗게 죽자 노인들이 “상복을 입은 벼(居喪稻)”라고 슬퍼했다. 이런 조짐 속에서 개혁군주 정조는 세상을 떠났고 그 빈자리를 노론 벽파가 채우면서 조선은 다시 24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왕을 말하다-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 벼’ 기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