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21세의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

야촌(1) 2010. 11. 14. 00:41

■ 21세의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① 건국의 뿌리

이덕일 | 제180호 | 2010.08.22 입력

 

변절과 구국의 결단으로 칭송받는 방향전환이 때론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고려 말 이성계 일가는 대표적인 부원(附元)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북방영토 회수운동에 전격 가담하면서 친(親)고려세력으로 전환되었다. 

부원세력에서 친고려세력으로의 극적인 방향 전환이 변방의 일개 무장 세력이었던 이성계 일가가 조선을 개국하는 뿌리가 되었다.

 

 

↑경기전(慶基殿)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했던 곳으로 전북 전주시 풍남동에 있다.

    세종 24년(1442) 건립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영조 24년(1748)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장지(葬地)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공민왕 9년(1360) 부친이 사망하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師弟)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한 것 같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정정해 주었다. 가동(하인)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절히 청해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이야기다.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無學)이라는 것이다. 부친 장지에 관한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만 25세 때부터 개국을 꿈꾸었다는 뜻이 된다.

 

이 외에도 건국 조짐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전한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권근(權近·1352∼1409)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建元陵神道碑銘)'에서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書雲觀)에 전하던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가 있는데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자(木子)는 이(李)씨를 파자한 것으로 역시 개국한다는 뜻이다. 

‘구변진단도’란 ‘아홉 번 변하는 진단(震檀·우리나라)의 그림’이란 뜻의 일종의 도참서(圖讖書)로, 천문(天文)·역수(曆數)·기후 등을 관측하던 고려 서운관에서 일부러 감추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1.준경묘(濬慶墓)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다.

   목조 이안사의 부친 이양무의 묘인데,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이주한 후 사망해 이곳에 묻혔다.

 

2.덕안릉 함경도 영광군 풍상리에 있는 목조 이안사의 무덤이다. 

   18세기에 그려진 39왕릉산도(王陵山圖)39에 나온다


선조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본조 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에서 고려 서운관에는 “왕씨가 멸망하고 이씨가 흥한다(王氏滅李氏興)는 말도 있었지만,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비밀로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본조 선원보록’에는 이성계가 잠저(潛邸·즉위 전의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지리산 바윗돌 속에서 얻었다’는 글을 바치고 사라졌는데,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三韓)의 지경을 바로잡는다(木子乘猪下, 復正三韓境)”는 내용이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는 닭 우는 소리와 세 서까래 이야기다. 이성계가 안변(安邊)에서 살 때 수많은 집의 닭이 한꺼번에 우는 와중에 허물어진 집에 가서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꾸었다. 설봉산(雪峰山) 이승(異僧)에게 묻자 “닭들이 동시에 운 것은 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지위)요, 세 서까래를 진 것은 왕(王)자란 뜻”이라고 풀이했다.

 

이 일화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등 여러 문집에 실려 있다. 

닭 우는 소리는 고려의 제8대 현종(顯宗·992~1031)의 사적에도 나온다. 

 

현종은 어린 시절 궁에서 쫓겨나 신혈사(神穴寺=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을 때 꿈속에서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다. 술사에게 뜻을 묻자 “닭 우는 소리는 고귀위요,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이니, 이는 즉위할 징조”라고 답했다는 것이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성계의 고귀위 일화의 출처를 짐작하게 해 주는 사례다.

이런 징조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국의 물적 토대가 무엇이었느냐다. 이성계는 즉위 후 4대조인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부터 목조(穆祖)로 추존했다. 제후는 4대 조를 추존한다는 원칙 때문만이 아니라 이안사가 건국의 기틀을 놓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3장은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살으샤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이안사가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했다. 

'용비어천가' 1장이 “해동 육룡(六龍)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인데, 육룡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을 뜻한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안사는 전주에 있을 때 관기(官妓)를 두고 산성별감과 다툼이 생겨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경흥 동쪽 30리의 오동(斡東·현재의 중국 옌지(延吉) 부근)으로 이주했다. 

 

이안사는 여기에서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지원을 받아 원나라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된다.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것이 개국의 터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 4장은 이에 대해 “야인(野人) 사이에 가사 야인이 가래거늘(해롭게 함) 덕원(德源) 옮으심도 하늘 뜻이시니…”라고 묘사해 이안사의 잦은 이주가 건국의 천명에 따른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최근 이성계 가문이 동북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던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 옷치긴 가문의 통치지역 내에 있던 고려계 몽골 군벌이라고 보는 논문이 나왔듯이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이안사의 원나라 관직은 원 세조 12년(1275·충렬왕 1년)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이어받는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협력하기도 하는 이행리는 '고려사절요'충렬왕 7년(1281)조에 따르면 개경에 와서 충렬왕을 알현했다고 전한다. 이행리가 공손한 것을 본 충렬왕이 “경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이니 근본을 잊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李子春:환조)에게는 형 자흥(子興)이 있었으므로 집안의 종통을 잇기는 어려웠다.


이행리의 아들 이춘(李椿:도조)이 원 순제 지정(至正) 2년(1342) 7월에 죽고 장남 자흥도 그해 9월 죽자 원나라는 자흥의 아들 천주(天柱)가 어리다는 이유로 임시로 숙부 이자춘에게 관직을 이어받게 했다.

 

이때 이춘의 계처(繼妻·아내가 죽은 후 맞은 아내)인 쌍성총관(雙城摠管)의 딸 조씨(趙氏)가 이자춘의 관직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하는데 이자춘이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종통의 지위를 굳혔다.

그래서 '용비어천가' 8장에서 “세자(환조)를 하늘이 가리사 제명(帝命:원 황제의 명)이 나리시어 성자(聖子)를 내셨나이다”며 장자(長子)가 아닌 이자춘이 종통을 이은 것을 하늘의 간택과 원나라 황제의 명령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천호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이자춘은 곧 원나라의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 요양성(遼陽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해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호적)를 작성하면서 원주민을 우대하자 이주민 세력인 이자춘이 반발한 것이다.

 

중원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원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민왕은 북방 강역을 되찾으려는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을 일으키는데 이자춘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부원세력이었던 이성계 일가는 친고려세력으로 말을 갈아탄다.

공민왕 4년(1355) 이자춘이 입조했을 때 공민왕은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몸은 비록 밖(원나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우리 왕실에 있었으므로 우리 할아버지(祖考)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히 여겼다”며 “내가 너를 성취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다. 

 

이듬해(1356) 이자춘이 다시 입조하자 공민왕은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유인우(柳仁雨)가 동북면(함경도 일대)을 공격할 때 병마판관 정신계(丁臣桂)를 이자춘에게 보내 내응할 것을 종용했다.

 

이때 이자춘이 고려에 가담해 고려가 99년 만에 동북면 지역을 회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 부원세력이란 꼬리표를 떼게 된다. 공민왕은 재위 5년(1356) 이자춘을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으로 올리고 집 한 채를 하사하는데, 이때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다.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공민왕 앞에서 격구(擊毬)를 하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활약을 펼쳤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만 21세의 격구 천재가 36년 후 고려를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 21세 '격구천재' 이성계,고려 조정에 얼굴 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