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한반도 분단의 역사, 그 배경과 현안

파일명:한반도분단과평화1강20120227.hwp 2012. 02. 27. 성공회대학교 한반도분단과 평화 제1강 한반도 분단의 역사, 그 배경과 현안 이재정/석좌교수 leejj4100@skhu.ac.kr /교수실 7711 1. 19세기말 이후 힘의 외교무대 가. 청일전쟁의 배경과 경과 1880년대 후반 일본은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해외시장 또는 해외 거점이 필요 했고, 일본국내의 정치적인 불안을 타개할 필요도 있었다. 여기에 제국주의 열강들도 동아시아에서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이나 미국이나 모두 일본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러시아가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가장 두려운 세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 열강..

기자(箕子)의 평양과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

■箕子의 平壤과 高句麗의 平壤 기자(箕子)는 락수(濼水)의 동평양지방(東平壤地方=지금의 永平)과 요수(遼水)의 서평양지방(西平壤地方=지금의 廣寧) 사이의 공지(空地)에 처음 거주(居住)하였다. 후(後)에 자손(子孫)들이 次次 강성(强盛)하여져서 강토(疆土)를 날로 개척(開拓)하여 가자 도읍(都邑)을 동평양지방(東平壤地方=지금의 요양(遼陽)으로 옮겼다. 그 후(後) 연나라의 장군(將軍) 진개(秦開)와의 싸움에 패(敗)하여 영주(幽州), 계주(薊州), 역주(易州)의 땅 二千里를 잃었으며 그의 41世孫인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망(亡)하였으니 그 역년(歷年)은 929年이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은 기씨(箕氏)의 뒤를 계승(繼承)하여 군사(軍士)를 강(强)하게 하고 국토(國土)를 넓혀갔는데..

전두환 "김재규는 국방장관을 원했다" - 이법철 칼럼

[이법철 칼럼] "출세욕이 왜 그렇게..." 최종편집 2012.01.14 20:23:07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김재규, 국방장관직을 원했다” 신정(新正) 인사와 구정세모(舊正歲暮) 인사를 겸해 지난 1월 12일 낮, 연희동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불교 믿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한 분이기에 나는 각별한 심정으로 뵙고 금년 82세의 고령이었지만, 건강속의 장수를 의미하는 축수(祝壽)를 하였다. 그 때 누군가의 입에서 ‘군인의 충의(忠義)’에 대해 거론되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그 때 김재규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시해 하기 전 국방부장관직을 원했다는 것을 처음 들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은 나를 만나면, 언제나 합천의 집안 얘기를 많이 한다. 외할아버지가 독실한 불자인데..

신재순 “10·26 당시, 난 딸 둔 이혼녀였다”

[J스페셜-월요인터뷰] [중앙일보] 김병일 | 입력 2011.10.24 03:01|수정 2011.10.24 08:21 신재순 “10·26 당시, 난 딸 둔 이혼녀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여인’ 신재순 32년 만에 밝힌 박정희 시해 그날 밤의 진실 ▲신재순 여사(1957.10.15~)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54)씨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LA 중앙일보 백종춘 기자]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 분수령이 됐던 1979년 10월 26일, 그 궁정동 만찬에 불려갔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목격자의 한 명이 됐다.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그녀는 지금 중견 배우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㊶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上) 입력: 2008년 08월 22일 17:42:21 당쟁 소용돌이서 국정을 바로잡다 채제공의 죽음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 받기가 어렵다. 운명하고 난 뒤, 관의 뚜껑을 덮고 나야만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다. ↑번암 채제공의 73세 때의 초상화. 정조의 어진을 그렸던 당대의 화가 이명기의 솜씨다. |사진작가 황헌만 1720년에 태어나 80수를 누리고 1799년 초봄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명재상이자 경륜 높은 정치가에다 시문에도 뛰어났던 채제공은 죽은 뒤에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채제공은 숙종 46년에 태어나 영조 11년인 1735년에 16세로 향시에 급제하고 ..

계유정란(癸酉靖亂)

계유정란(癸酉靖亂)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난이다. 조선 세종을 이은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 및 그를 보좌하던 김종서ㆍ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안평대군을 축출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정인지ㆍ한명회 등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으며,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 등 소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했다.

‘무관의 제왕’ 흥선군 권문세가와 전면전

■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제185호 | 20100925 입력 어떤 정치 지도자가 혜성같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혜성같이 등장한 지도자가 성공의 결실을 거두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기존 체제와 맞서 싸우면서 미래를 지향해야 하지만 대부분 기존 체제와 싸우다가 끝을 맺기 마련이다. 혜성같이 등장했던 대원군의 앞에도 마찬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 ① 대원위 분부 시대 ↑대원군 초상 대원군은 극적으로 집권했지만 그 앞에는 과거와 전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의 철종이 사망했다. 5남 6녀를 두었으나 금릉위 박영효에게 시집간 4녀 영혜(永惠)옹주를 제..

퇴계의 물러나는 정치, 율곡의 나아가는 정치 …

퇴계의 물러나는 정치, 율곡의 나아가는 정치 … 오늘 필요한 정치는 [중앙일보] 2011. 04. 02 00 : 25 ↑퇴계 이황(왼쪽)과 율곡 이이(오른쪽). 현실 정치를 가능한 떠나려 했던 퇴계와 타계할 때까지 정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율곡은 여러 모로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왕조 600년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두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정치는 별개의 분야가 아니었다. 사대부 혹은 선비라 불리는 성리학자(주자학자)가 곧 정치의 주역이었다. 정치가로서 퇴계와 율곡 중 누가 더 뛰어날까. 신간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는 그런 궁금증에 도전한다. 두 성현 앞에 감히 불경(不..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⑤ 불우한 말년

"지는 해 이성계 “밝은 달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84호]2010.09.18 입력 최고 지도자 자리는 일체의 사심이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순간 공적인 가치가 추락하면서 조직은 수렁으로 빠져든다.이성계는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적인 사연으로 후계자를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왕조에 의해 거부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최고 지도자 자리는 일체의 사심이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순간 공적인 가치가 추락하면서 조직은 수렁으로 빠져든다.이성계는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

병자노란(丙子虜難)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버 ▼원문보기1b 처음으로 서명 : 조야기문[됴야긔문(朝野記聞) ■ 병자노란(丙子虜難) 임신년(壬申年)겨울의 츈신신득연(申得淵)이 노(虜)듕의 드러가다 이 호(胡) 와 닐오 맛당이 형뎨로  셰 업시고 고쳐 군신의 언약을 호(胡) 오기 기려 텬의 녜 련다 고 날마다 황금 만냥 금 만냥 오포 십만동 뎌포 일만동과 졍병 삼만 젼마 삼쳔필을 구니 됴뎡이 황금은 소산이 아니라 야 호피로 예 주고 기여 각물은 졀반을 혀 주어변이텩(邊以惕)신경념(申景濂)등으로 일시의 가게  어단을 닷가 맛뎟더니호(胡)셩부(開城府)의 니러 어단을 믜치고평산(平山)의 ▼원문보기1b 처음으로 니러 복믈을 다 리고 가다[주:잡록(雜錄)]계유년(癸酉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