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6호| 20100725 입력
동양사회에서 국가 정책은 하늘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것이란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곧 민심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각이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백성들을 설득하고 백성들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국가 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⑧ 민심 확보책
정조는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선의 최정예 부대로
육성하려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착공한 재위 18년(1794)은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환갑을 맞는 해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00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정조는 늦어도 사도세자가 칠순을 맞는 갑자년(1804)에 완공할 계획으로 착공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0년의 건설 기간을 잡은 셈이었다. 정약용의 연보인 사암(俟菴)선생연보에 따르면 정조는 재위 16년 부친상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수원성제(水原城制)’, 즉 화성 설계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정약용이 과거 한강 주교(舟橋=배다리) 설계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을 기억한 것이다.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유성룡이 지은 성설(城設)을 참고해 성설(城設)을 작성해 올렸다.
정약용의 성설은 성의 크기에 대한 분수(分數), 길을 만드는 치도(治道), 성에 해자를 두르는 호참(壕塹) 등 여덟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설계도였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화성 건설과 관련해 단 한 명의 억울한 백성도 없게 하겠다’는 정조의 뜻에 따라 백성들의 강제 부역(賦役) 대신 임금 노동으로 건설하기로 한 점이다.
정조는 또 정약용에게 궁중에 비장한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 를 내려 주면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계장치에 대해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도서집성은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든 백과사전이고, 기기도설은 스위스 출신의 선교사·과학자인 요하네스 테렌츠(J. Terrenz: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책으로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각종 기계 장치에 관한 책이었다.
정약용이 기중기, 즉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기중기 설계도)을 만든 것은 이처럼 정조의 구체적인 지시와 자료 제공에 의한 것이었다. 정조는 화성 착공 1년 전(1793)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장용영이란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했다.
노론에서 장용영 강화에 의구심을 품자 정조는 “내가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직위(直衛:호위기구)를 중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생각지 못하는 사변에 대비하려는 것도 아니다(일득록 7권)”라고 방어에 나섰다. 노론은 겉으로는 예산 부족을 핑계로 장용영 강화에 반대했지만 그 속셈은 국왕의 무력 강화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규장각 각신 정민시(鄭民始)에게 “장용영에 들어가는 한 해 비용은 저것을 줄여 이것을 마련한 것으로서 당연히 지출해야 할 비용이 아니면 따로 요리해서 경상비용 밖에서 마련한 것이니 돈 한 푼이나 쌀 한 톨도 애당초 경상비용에서 가져다 쓴 것이 없다(일득록 8)”고 설득하기도 했다.
정조가 “어공(御供: 임금에게 바치는 것)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부터 스스로 줄이고 없애 조금씩 자금을 고생해서 마련했다”고 말한 것처럼 왕실 경비를 아껴 예산을 마련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조가 “내가 장용영을 세운 것은 단순한 뜻이 아니라 우러러 선대의 지업(志業)을 이어받아 후대에 규범을 끼쳐 주려는 뜻이 또한 그 사이에 깃들여 있다”고 말한 것처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조선의 최정예 군대로 육성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훗날 정조가 죽은지 2년 만에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에 의해 철폐되고 만다.
장용영을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한 정조는 안심하고 화성 건설의 첫 삽을 떠도 된다고 여겼다.
재위 17년(1794) 12월 정조는 영중추부사 채제공과 비변사 당상(堂上) 등을 불러 이 문제를 최종 논의했다.
정조는 “수원(水原)의 성 쌓는 역사를 나는 10년 정도면 완공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만일 적당한 사람이 감독한다면 어찌 꼭 10년이나 끌겠는가”라며 “경영은 또 적임자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조는 화성 축조에 백성들의 강제 부역도 금지하면서 정부 예산도 전용하지 않겠다는 상반된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정조는 내탕금과 금위영·어영청의 정번군(停番軍)이 납부하는 자금으로 재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금위영과 어영청 소속의 번상군(番上軍) 중 돈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이들이 정번군이었다.
이 돈을 화성 축조 자금으로 사용하면 정부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훈련대장 조심태가 정번군이 납부하는 돈이 연간 2만여 냥으로 10년이면 25만 냥이 될 것이라고 보고하자 정조는 “40만, 50만 냥 정도면 넉넉히 준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채제공이 “30만 냥이면 충분히 경영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라고 답하자 조심태는 “30만 냥을 가지고는 부족할 듯합니다”라고 정조의 면전에서 반박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정조가 적임자를 천거하라고 말하자 “훈련대장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방금 자신의 견해를 반박한 조심태를 천거했다. 조심태가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고 이장지의 백성들을 새 고을로 이주시키는 데 한치의 착오도 없이 완성했다는 이유였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이 일은 사체가 중대하여 대신이 총괄해서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일은 경 외에는 적임자가 없다”면서 성역(城役)을 총괄하게 했다. 화성은 ‘정조의 기획, 채제공 총괄, 조심태 실행’이란 3박자의 조화로 건설된 신도시였다.
화성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라는 정치적 성격의 도시였지만 정조는 그런 정치적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반대론을 잠재웠다. 정조는 재위 18년(1794) 새해 첫날을 사도세자의 사당인 창덕궁 경모궁(景慕宮)에서 맞이했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을 경모궁에서 재숙(齋宿)하며 새우고 새해 첫 행사로 사도세자에게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후 사도세자의 신령이 가호하기를 기원하며 화성 건설을 기공했던 것이다.
그달 초에는 직접 현륭원으로 가서 성묘했는데 정조실록은 “상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륭원 제단 앞에 설치된 사도세자의 진영(眞影=초상화) 앞에서 몸을 땅바닥에 던지고 통곡하며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쥐고 뜯다가 손톱이 상할 지경이었고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겨우 현륭원 참배를 마친 정조는 높은 곳에 올라 팔달산 밑 신도시 터를 바라보면서,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 6호였는데 지금은 1000여 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地理)의 흥성함이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를 모두의 축복 속에 완공하는 것이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먼저 철거당하는 백성들의 문제가 있었다.
정조는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조는 “이 성을 쌓는 것은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해서이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하다....이미 건축한 집을 어찌 성역(城役)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라고 철거에 반대했다.
백성들의 강제 부역 대신 임금 노동을 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여기에는 강제노동이 점차 임금노동으로 전환되는 사회 변화를 내다보고 이런 변화를 선도하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부역금지와 전면적인 임금노동제를 이상에 치우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채제공까지도 정조 18년(1794) 5월 “화성 성역(城役)은 국가의 대사”라며 “백성들과 승군(僧軍)들을 며칠 동안 성역에 부역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듯합니다”라고 백성과 승려들의 부역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본부의 성역에 기어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라고 반대했다. 정조는 화성 성역을 통해 백성들이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생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조는 무더운 여름에 일꾼들이 쓰러질 것을 걱정해 어의(御醫)들과 상의해 ‘더위를 씻는 알약’인 척서단(滌暑丹) 4000정을 만들어 현장에 내려 보냈다.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정 또는 반 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면 기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약이었다.
그럼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정조는 7월 “일찍이 옛사람들이 오행(五行)에 부연시키는 말을 보면 ‘많은 백성을 수고롭게 부려서 성읍을 일으키면 양기(陽氣)가 성하기 때문에 가물이 든다’고 했다”면서 공사를 일시 중지시켰다.
정조의 이런 구도자(求道者)적인 국정수행 자세에 반대론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신도시 건설이란 거대한 역사에 단 한 명의 백성의 원망도 없게 하면서, 가뭄까지 하늘의 조짐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국왕을 향해 반대론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조에게 국정은 지극한 신앙의 실천 그것이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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