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1. 03
■ 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5호] 20100718 입력
국가 정책을 목적의 선함이나 당위성만으로 추진해서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
정책에 관계된 여러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하고 무엇보다 민심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책 추진 능력과 도덕성이 겸비된 세력이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추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 과정은 이런 정책 수행의 전범을 보여준다.
<1>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릉.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불렀다.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높여졌다.
<2> 사도세자 책봉죽책문. <3> 사도세자가 김가진에게 쓴 편지. 경남대박물관에서 기증 받은 데라우치 소장 문서
중 일부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⑦ 수원 용복면 현륭원
정조의 숙원사업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양주 배봉산 갑좌(甲坐) 언덕에 묻고 수은묘(垂恩墓)라고 불렀다.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무덤이 릉(陵), 왕세자나 세자빈 또는 왕비가 아니었던 국왕의 사친(私親) 무덤이 원(園)인데 사도세자의 경우 그보다 아래인 묘였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장헌(莊獻)세자,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렸다. 정조는 즉위 직전인 영조 52년(1776) 2월 세손 자격으로 수은묘를 배알했는데, 실록은 ‘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해 슬픔이 좌우를 감동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가 감여(堪輿: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이유는 사도세자 묏자리 때문일 것이다.
사도세자 묏자리는 정조뿐 아니라 어깨너머라도 풍수를 배운 사람이면 모두 문제 있는 형국(形局)이라고 여기는 자리였다.
그러나 영우원 이장을 시도하면 노론에서 의구심을 품을 것이었다.
자칫 정국이 파탄날 수도 있었고, 정도(正道)가 아닌 좌도(左道)를 신봉한다는 비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고, 풍수가들도 노론의 눈치를 보면서 침묵했다.
이런 상태로 재위 13년이 흘렀다. 그러던 정조 13년(1789) 7월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면서 이 문제를 거론한 인물은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다.
화평옹주는 영조24년(1748) 세상을 떠났는데 동생 화완옹주와 달리 사도세자와 친했기에 그가 살았으면 사도세자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박명원은 “신은 본래 감여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라면서 영우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박명원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넷이었다.
“첫째는 원소의 띠가 말라 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정조실록』 13년 7월 11일)”
박명원은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들이 지극히 애통해하는데 여기에다 뱀 같은 것들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과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서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뱀 등속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강조했다.
박명원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사(地師: 풍수가)들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라고 건의했다. 박명원은 왕실 외척 처신의 모범을 보여주는 부마였다.
화평옹주 상사(喪事) 시 영조가 직접 문상하겠다고 하자 ‘임금은 상가를 방문할 수 없다’면서 땅에 엎드려 간쟁했다. 그러자 영조가 “네가 나를 부옹(婦翁)으로 여긴다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기도 했다.
정조는 박명원의 상소에 대해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두고 답답해하기만 했던 문제”라면서 2품 이상 벼슬아치를 희정당으로 불러 박명원의 상소를 읽게 하고 의견을 물었다.
박명원의 상소는 정조와 사전 교감 끝에 나왔을 개연성이 크다. 노론도 그렇게 의심했겠지만 처남 묘소가 악지(惡地)라며 천장을 요구하는 자형의 요구에는 누구도 시비 걸기가 어려웠다. 대신들은 한목소리로 성명(成命) 받들기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눈물을 삼키며, “나는 본래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는데 지금 도위(都尉=부마도위)의 소를 보고 또 본원(本園: 영우원)에 대한 경들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고 감격했다.
정조는 심지어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고 말할 정도로 부친 묘소를 이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무려 만 13년이란 기나긴 준비 끝에 만장일치로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하게 되었으니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 14년 동안 오직 금년만이 연운(年運)·산운(山運)·원소(園所) 본인의 명운(命運)이 상길(上吉=아주 좋음)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더욱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위의 소를 보고 여러 경들의 말을 듣건대 숙원을 이룰 수 있겠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정조실록』 13년 7월 11일)”
정조가 은밀히 기내(畿內)의 명당자리를 모두 간심(看審)한 지는 오래되었다.
조선은 왕실 차원에서 명당자리에 미리 흙을 모아 봉분을 만들고 나무로 봉표(封標)해 민가의 사용을 금했다.
왕기(王氣) 서린 명당자리를 미리 선점하는 왕실의 안보 책이었다.
그런 봉표지(封標地)들이 문의(文義) 양성산(兩星山), 장단(長湍) 백학산(白鶴山), 광릉(光陵=세조의 능) 근처 달마동(達摩洞), 가평 등지에 나뉘어 있었다.
정조는 이 모든 명당지들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 이 지역들을 모두 간심했다는 뜻이다.
정조가 염두에 둔 장지는 ‘수원 읍내에 있는 세 봉표지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곳’이었다.
정조는 이곳이 “옥룡자(玉龍子=도선)가 말한 반룡농주(盤龍弄珠=누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함) 형국이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는 곳”이라면서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이 수원의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으로서 용이 엎드렸다는 지명 자체가 명당의 뜻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용복면을 장지로 결정해놓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사전 정지 작업을 했던 것이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지금 경 등을 대하여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음으로 돕고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정조실록』 13년 7월 11일)”라는 말도 했다.
지관(地官)을 보내 다시 살피게 한 결과도 ‘지극히 길하고 모든 것이 완전한 묏자리’라는 것이었다.
영의정 김익,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채제공 등도 “천지와 함께 영원한 더할 수 없는 길지(吉地)”라고 보고했다.
정조는 영우원 이장에 대해 조정 대신들의 동의를 얻은 데 만족하지 않았다.
정조는 이장지 백성들의 동의를 얻는 절차도 중시했다.
정조가 민심 획득을 위해 세운 원칙은 단 한 명의 백성도 이 문제로 불평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첫째는 이주할 백성들에게 후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물론 더 살기 좋은 새 이주지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둘째는 백성들의 강제 부역을 금지하는 일이었다. 이주해야 할 백성은 약 200여 가구였다.
정조는 균역청의 돈 10만 냥을 수원에 떼어주어 이주비용으로 사용하게 하고 내탕금(內帑金: 국왕의 자금)까지 희사했다.
정조는 “내가 즉위한 이후로 한 번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힌 일이 없는데, 더구나 본원(本院: 영우원)에 관계된 일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조는 ‘털끝만 한 폐도 백성들에게 끼치지 않겠다’면서 영가(靈駕: 상여)도 백성들의 부역이 아니라 일꾼을 고용(雇用)해 운반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조 13년(1789) 10월 4일 사도세자의 영구(靈柩)는 양주 배봉산을 떠나 수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27년 전 뒤주에 갇히던 날 만 열 살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빌었던 그 아들에 의해 천하의 길지로 이주하는 길이었다. 영우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거의 한 자 남짓 고여 있어서 지관들의 평이 과장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사도세자의 영여(靈輿=시신을 실은 수레)가 수원부의 신읍에 들렀다가 이장지에 도착한 것은 10월 7일이었고, 이장 작업이 완료된 것은 10월 16일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새 안식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다.
대신들은 이로써 사도세자 묘 이장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정조에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정조는 당초 수원부사 조심태(趙心泰)에게 이장지에 살던 백성들이 이주할 넓은 터를 찾게 했다.
조심태는 “팔달산 아래의 땅이 국세(局勢)가 크게 트여 가히 큰 고을을 조성하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보고했다.
처음부터 200여 호가 이주할 터가 아니라 ‘큰 고을’이 들어설 터를 고르게 한 것이다.
정조는 신도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신도시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부활하는 도시이자 조선이 닫힌 과거를 딛고 열린 미래로 나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도시여야 했다. 정조는 사도세자 묘 이장을 계기로 조선의 질서를 바꾸는 대역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 . 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 역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심이 원한 건 변화 …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 시동 (0) | 2010.11.14 |
---|---|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0) | 2010.11.14 |
“왕의 동생을 제거하라” 오빠 잃은 정순왕후 정조에 복수 칼 겨눠. (0) | 2010.11.14 |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0) | 2010.11.13 |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0) | 2010.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