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무보(武譜)

■ 무보(武譜) 조선시대 무관 출신들의 가계를 정리한 책으로, 이들의 가계 번성을 살펴본 조선후기 천(天).지(地)·인(人)의 3책으로 엮어진 필사본이다. 저자는 미상이다. 조선시대에는 문반(文班) 무반(武班)을 가리켜서 양반이라 불렀다. 그러나 유학사상의 발효로 고려 말기 이후부터는 무관보다는 문관을 더 추존하고 희구(希求)하는 사회 풍조로 바뀌면서 은연중 무반 출신은 문반의 냉대를 받아 왔다. 그래서 세족(世族)과 문벌(門閥)을 자랑하는 조신(朝臣)들도 문과에 급제한 자들을 우대했고, 무과 출신들을 냉대했다. 이 때문에 문보(文譜)는 집집마다 거의 있으나 무보(武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책은 이러한 뜻을 잘 아는 사람의 뜻이 담긴 책으로 무반 출신들을 모아서 그 자손들의 성쇠를 병기해 인맥의 형..

율곡 이 선생 묘표(栗谷李先生墓表)

[생졸년]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 ~ 1584년(선조 17) ■ 우찬성 증 영의정 시(諡)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묘표 선생은 덕수 이씨(德水李氏)이고 휘(諱)는 이(珥), 자는 숙헌(叔獻)이며 학자들은 율곡(栗谷) 선생이라 일컫는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휘 돈수(敦守)가 그 비조(鼻祖)이다. 부친 휘 원수(元秀)는 사헌부 감찰 증 좌찬성이며,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진사(進士) 명화(命和)의 따님으로 영수(英秀)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다. 병신년(1536, 중종 31) 12월 26일에 강릉(江陵)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을 낳으려는 날 저녁, 꿈속에서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뛰어올라 방 안에 들어오더니 아이를 안아서 품속에 ..

토정 이지함 시장(土亭李之菡諡狀) - 이관명(李觀命)

■ 토정 이지함 시장(土亭李之菡諡狀) - 이관명(李觀命) [생졸년] 1517년(중종 12) ~ 1578년(선조 11) / 향년61歲 [본 관] 한산이씨(韓山李氏) [저 작] 토정비결(土亭祕訣) 선생의 휘(諱)는 지함(之菡)이고, 자는 형중(馨仲)이다.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였는데 사는 집을 흙으로 쌓아서 정자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는데 시호가 문효공(文孝公)이고 호가 가정(稼亭)인 휘 곡(穀)과 시호가 문정공(文靖公)이고 호가 목은(牧隱)인 휘 색(穡) 부자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하여 큰 명성이 있었으니, 가정공은 바로 선생의 7대조이다. 문정공이 휘 종선(種善)을 낳았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상락부원군 방신우 사당비(上洛府院君方臣祐祠堂碑)

■ 상락부원군 방신우 사당비(上洛府院君方臣祐祠堂碑) 광록대부 평장정사 상락부원군 방공 사당비(光祿大夫平章政事上洛府院君方公祠堂碑) 이제현(李齊賢) 지정(至正) 5년 5월 을미 일에, 좌부대언 중정대부(左副代言中正大夫) 신(臣) 인복(仁復)이 예문 춘추관에 왕명을 전달하여 말하기를, “고 평장정사 상락부원군(平章政事上洛府院君) 신 우(祐)는 중국에 벼슬하여 매우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능히 내가 국가를 지키는데 충성을 다하였다. 이제 비록 그가 사망하였으나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 나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영관사(領館事) 신 모(某)에게 명령하여 그의 행실을 비석에 기록하여 앞으로의 사람들에게 권장하려 한다.” 하였다. 신이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방씨(方氏)는 대대로 경상도 오성현(吳..

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 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李象靖 撰 [생졸년] 1392년(태조 1) ~ 1480년(성종 11)/壽88歲 공자가 은(殷)나라에 인자(仁者) 세 사람이 있다고 칭하셨는데, 그중에 죽은 자도 있고 죽지 않은 자도 있었지만 또한 각각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기자(箕子)는 안에서 그 난리를 만나 자신의 명철함을 감추면서 올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으니, 처신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서 특별히 기자의 명이(明夷)를 말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은(耕隱) 이 선생이 아마도 그 경우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은 휘가 맹전(孟專)이고 자는 백순(伯純)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예원(藝苑)에 들어가 세종조(世宗朝)에 사간원 정언, 지제교를 역임하였다. 중년에 시사(時事)가 위태..

남명 조식 선생 묘갈명(南冥曺植先生墓碣銘)

■ 남명 조식 선생 묘갈명(南冥曺植先生墓碣銘) 성운(成運) 찬(撰)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본래 크게 드러난 성씨로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많다고 일컬어졌다. 선대에 고려 태조 때 벼슬하여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된 휘 서(瑞)라는 이가 있었으니, 덕궁공주(德宮公主)가 그의 어머니이다. 그 후손이 이어져 창성하였고, 휘 은(殷)에 이르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은이 휘 안습(安習)을 낳았으니 성균관 생원이다. 생원이 휘 영(永)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영의 아들은 휘 언형(彦亨)이니 처음에 재예로 이조 정랑에 선발되었는데, 지조가 꼿꼿하여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고 벼슬은 승문원 판교에 그치고 졸하였다. 그의 부인은 이씨(李氏)이니 충무위(忠武衛) 이국(李菊)의 따님으로, 부..

도사 이구준 묘지명 병서(都事李耈俊墓誌銘 幷序)

■ 도사 이구준 묘지명 병서(都事李耈俊墓誌銘 幷序) 숭정(崇禎) 임오년(1642, 인조 20) 정월 23일, 나의 작은 외숙 도사공(都事公)이 이천(利川) 풍담(楓潭)의 치재(恥齋)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부고를 받고 달려가니, 염(殮)을 하고 입관하지 않은 터라 시신에 기대어 곡을 하였다. 물러 나와 가옥을 살펴보니 누추한 좁은 집은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이고,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무릇 상구(喪具)에 관련된 것은 염습에 필요한 의물(儀物)을 비롯해 관곽(棺槨)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교하고 치밀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음죽군(陰竹君, 이성기(李聖基)이 월제(月製)에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뒤에야 외숙의 가정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

영창대군 묘지명병서(永昌大君墓誌銘 幷序) 

■ 영창대군 묘지명병서(永昌大君墓誌銘 幷序) 부친을 대신하여 짓다. 영창대군이 화를 당한지 11년이 지난 모월(某月) 모갑(某甲)에 예에 따라 이장을 할 때에 임금께서 대군의 행적을 가지고 나에게 명하여 묘지명을 짓게 하였다. 신(臣)은 삼가 의거하여 한두 가지를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공의 휘는 의(㼁)로, 선조(宣祖) 소경대왕(昭敬大王)의 아들이며 모친은 소성정의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 김씨(金氏)이다. 만력(萬曆) 병오년(1606, 선조39) 모월 모갑에 정릉동(貞陵洞) 행궁 정침에서 태어났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으며, 유모의 품안에 있으면서 매일 양전(兩殿)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혹 중궁(中宮)에게만 문안을 드린 경우는 하루 종일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선조가 병이 들어 지팡이를 ..

길창부원군 권협 묘지명(吉昌府院君權悏墓誌銘)

■ 길창부원군 권협 묘지명(吉昌府院君權悏墓誌銘) 공은 휘는 협(悏), 자는 사성(思省), 성은 권씨(權氏)로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증조부 권욱(權旭)은 사도시 부정으로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고, 조부 권진(權振)은 전생서 참봉으로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고, 부 권상(權常)은 지극한 행실이 있어 선조 때에 선공감 정에서 통정대부로 특진하였고, 또 수고(壽考)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뒤에 은혜를 미루어 영의정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云傑)의 딸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봉되었다. 공은 명나라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 32년(1553, 명종 8) 5월 24일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신도비명(神道碑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신도비명(神道碑銘) 선생은 휘는 현광(顯光)이고, 자는 덕회(德晦)고, 별호는 여헌이며, 성은 장씨(張氏)이다. 고려의 상장군(上將軍) 김용(金用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시조. 본성은 장(張))이 처음으로 옥산(玉山)에 본적(本籍)을 두었다. 12세(世)에 와서 부윤(府尹)인 장안세(張安世)가 있었으며, 부윤은 좌윤(左尹) 장중양(張仲陽)을 낳았고, 좌윤은 장령(掌令) 장수(張脩)를 낳았다. 장수는 곧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선생에게는 6세조(世祖)가 되는 분이다. 증조는 증(贈) 좌승지(左承旨) 장준(張俊)이며, 조부는 증(贈) 이조 참판 장계증(張繼曾)이고, 부친은 증(贈) 이조 판서 장열(張烈)이다. 모친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 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