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토정 이지함 시장(土亭李之菡諡狀) - 이관명(李觀命)

야촌(1) 2022. 6. 3. 21:13

■ 토정 이지함 시장(土亭李之菡諡狀) - 이관명(李觀命)

 

[생졸년] 1517년(중종 12) ~ 1578년(선조 11) / 향년61歲

[본 관] 한산이씨(韓山李氏)

[저 작] 토정비결(土亭祕訣)

 

선생의 휘(諱)는 지함(之菡)이고, 자는 형중(馨仲)이다.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였는데 사는 집을 흙으로 쌓아서 정자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는데 시호가 문효공(文孝公)이고 호가 가정(稼亭)인 휘(穀)과 시호가 문정공(文靖公)이고 호가 목은(牧隱)인 휘 (穡) 부자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하여 큰 명성이 있었으니, 가정공은 바로 선생의 7대조이다.

 

문정공이 휘 종선(種善)을 낳았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옛터에 정표비(旌表碑)가 있다.

 

찬성공이 휘 계전(季甸)을 낳으니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열공이 휘 우(堣)를 낳으니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참판공이 휘 장윤(長潤)을 낳으니 현감(縣監)을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공이 휘 치(穉)를 낳았는데 현령(縣令)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선생의 아버지이다. 정덕(正德) 12년 정축년(1517, 중종12) 9월 20일에 선생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재질이 있어 정신과 기운이 맑고 밝았으며,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여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 성암공(省庵公 이지번(李之藩)에게 배웠다.

 

장성해서는 모산수(毛山守) 이정랑(李呈琅)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초례(醮禮)를 올린 다음 날 외출했다가 저물녘 돌아왔는데, 집안사람들이 그의 새 도포가 없어진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구걸하는 아이가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서 도포를 잘라 세 아이에게 입혀 주느라 도포를 다 썼다고 하였다.

 

평소에 글을 읽자면 해가 지고 밤을 새웠다. 광릉(廣陵)에 있는 촌장(村莊)으로 나갔을 적에 종을 보내 등유(燈油)를 가지고 오게 하자 모산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사위가 지나치게 글을 좋아하니 몸이 상할까 걱정이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도끼를 허리에 차고 산속에 들어가 관솔을 베어 당(堂) 안에 불을 피우자, 연기가 자욱하고 불이 뜨거워 사람들이 앞다투어 피했는데 선생은 바르게 앉아 게을리 하지 않은 지 한 해가 넘는 동안에 뭇 성인의 경서와 백가(百家)의 글에 두루 관통하니, 붓을 잡고 문장을 지으면 물이 솟아오르고 산이 치솟는 것 같았다.

 

장차 과거 공부를 할 듯했는데 이웃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회를 베풀고 노는 자를 보고서 마음속으로 천히 여겼다. 이후 비록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더라도 번번이 제술을 하지 않았고, 제술을 하더라도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사람들마다 각기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스스로 이를 즐긴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성암공에게 말하기를 “제가 아내의 집안을 살펴보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떠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고 처자를 데리고 보령(保寧)에 임시로 거처하였는데, 이듬해 부인의 집안이 과연 화를 당했다.

 

부모님을 장사 지낼 적에 그 묏자리를 살펴보고 ‘두 명의 정승이 나오겠지만 막내아들에게 이롭지 않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마침내 막내로서 강행하여 스스로 그 재앙을 감당하였다.

 

훗날 형의 아들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충간공(忠簡公) 이산보(李山甫)는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나, 선생의 아들은 요절하여 현달하지 못했는데, 선생이 항상 말하기를 “내 자손들이 지금은 비록 영락(零落)하나 훗날 꼭 현달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하였다.

 

선영이 바닷가에 있었기에 세월이 오래되면 조수에 침수될까 걱정되어 제방을 쌓으려고 했으나 막대한 자금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어염(魚鹽)과 장사를 하면서 돈을 마련하느라,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일은 이루지 못했지만 마음은 변치 않았으니 독실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다음 해에 큰 흉년이 들자 개연히 만인을 구제하고자 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교역하여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았는데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풀어 주어 처자식은 굶주린 기색을 띠었다.

 

일찍이 넓은 집을 지어 남루한 거지들을 머무르게 하고는 그들에게 수공업을 가르쳐서 의식(衣食)을 각자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중 가장 무능한 자에게 볏짚을 주고 짚신을 만들게 하자 하루의 일로 한 말의 쌀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큰형, 작은형과 우애가 돈독하여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면 하루도 거처를 달리한 적이 없었다. 제사를 지낼 적에 반드시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라 정성을 극진히 하여, 선인을 마치 살아 계신 분을 섬기듯이 하였다.

 

자손들을 가르칠 때 여색(女色)을 가장 경계하라고 하면서 “이 점을 엄히 단속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濟州)에 갔을 적에 제주 목사가 그 이름을 듣고 객관에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기생을 택하여 잠자리를 시중들게 하면서 곳간의 곡식을 가리키며 “네가 이군(李君)의 총애를 얻는다면 이것을 상으로 주마.”라고 하였다. 기생이 기필코 그를 홀리고자 밤새도록 아양을 떨었으나 끝내 더럽히지 못하자 제주 목사가 더욱 존경하였다.

 

성암공이 서울에 있으면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보령에서 도보로 찾아가 뵈었고, 성암공이 세상을 떠나자 “형님에게 스승의 도리가 있다.” 하고는 3년 동안 심상(心喪)하였다.

 

선생은 자신을 다스리는 데 엄격하여 천길 벼랑이 우뚝 솟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화기애애하였다. 다른 사람이 한 가지 선행(善行)이라도 있다고 들으면 천리를 멀게 여기지 않고 가서 만나 보았다. 

 

안명세(安名世)가 죄 없이 죽자 추도하기를 마지않았다. 박춘무(朴春茂)의 편안하게 스스로 지켰던 행실과 서치무(徐致武)의 은거하면서 도를 즐긴 것은 선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권면하여 성취시킨 것이다.

 

선생은 타고난 기품이 남달랐으며, 극기(克己)의 공부에 힘을 써서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더러 겨울에 벌거벗은 몸으로 눈 덮인 바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한여름에 물을 안 마시는가 하면, 열흘 동안 익힌 음식을 안 먹는다거나, 수백 리를 걸어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기도 하였다.

 

한번은 대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다가 잠을 잤다. 이때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몸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두 발을 벌리고 꼿꼿이 선 채로 코를 골았는데, 말과 소가 부딪혔다가 뒤로 물러났지만 선생은 우뚝한 산처럼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일찍이 선생이 굶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디는 것을 보고 농담하기를 “타고난 기운이 이와 같은데 어찌하여 신선을 배우지 않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용모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어찌 사람을 이처럼 얕잡아 보시오.”라고 하자, 남명이 웃으며 사과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허자(許磁)와 이기(李芑)의 사화(士禍)를 겪은 뒤라서 덕을 감추고 화를 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한계를 알게 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재능을 감추고 세상에 뒤섞여 살았다.

 

누차 조정의 부름을 사양했지만 일찍이 말하기를 “백 리의 고을을 다스린다면, 가난함을 넉넉하게 하며 야박함을 돈후(敦厚)하게 하며 어지러움을 잘 다스려지게 하여 충분히 국가의 보장(保障)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포천 현감(抱川縣監)이 되었을 적에 상소하여 이에 도덕ㆍ인재ㆍ백용(百用)에 관한 말로 세 가지 대책을 만들었으니 표준을 세워 백성에게 복을 내리는 도리에 대해 정성스럽게 언급하고 임금과 신하의 의리에 대해 반복해 가며 강조하였다.

 

상소 말미에 재화를 생산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 다시 부연 설명하기를 “포천의 백성은 어미 없는 헐벗은 거지 같아서 오장이 병들고 온몸이 야위었으니 어찌 차마 그들이 죽어 가는 것을 두고만 보겠습니까. 지금 만약 바닷속의 무궁무진한 물고기를 잡아 올리고, 끝없는 소금물을 굽는다면 몇 년 안에 수천 섬의 곡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널리 은혜를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는 데 일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군자는 의리만 말하지 이익을 말하지 않는다. 어찌 감히 재리(財利 재물과 이익)의 일을 가지고 군부(君父) 앞에서 아뢴단 말인가.’라고 말하는데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한답니까.

 

빈지초연(賓之初筵)에서 관을 한쪽으로 기울여 쓰고 자리를 옮겨 다니는 무례함을 꾸짖기는 하였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한다면 관을 바르게 쓰지 못한 채 허겁지겁 구할 것이니, 어느 겨를에 용모가 공손하지 않은 것을 꾸짖겠습니까.

 

옛날에 자사(子思)는 먼저 이익을 말하였고주자(朱子)는 조적(糶糴)에 힘썼으며여상(呂尙 강태공(姜太公))은 성인의 무리인데도 어염의 이익을 유통시켰습니다. 

 

혹자는 망언을 하면서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을 저지하니 하늘이 반드시 그를 싫어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누누이 아뢴 수천 자는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간절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며, 그 계책은 문왕(文王)이 기주(岐周)를 다스리고맹자(孟子)가 생업을 제정한 것과 은연중에 부합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어진 사람의 말은 그 이익이 넓다.’라는 것이다.

 

어찌 쓸데없이 허황되게 하는 빈말과 비할 바이겠는가. 조정에서 그 계책을 써 주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뒤에 아산 현감(牙山縣監)이 되어 또 군액(軍額)을 줄여 줄 것과 부세를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는 법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진달했는데 말이 또한 명백하고 마땅하였으나 버려두고 쓰지 않았다.

 

읍에 물고기를 기르는 못이 있어 백성들에게 해마다 물고기를 관아에 바치도록 하자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선생이 못을 메워 후환을 끊어 버렸다.

 

아산 향교의 유생들을 교도하면서 문무의 재주를 강습하여 국가의 쓰임에 대비하려고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관아에서 병으로 별세하였으니 만력(萬曆) 6년(1578, 선조11) 7월이었다. 향년 62세이다. 온 고을 사람들이 달려가 울부짖으며 곡하였는데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듯이 슬퍼하였다.

 

선생은 걸출하고 고상(高爽)하며 마음이 맑고 욕심이 적었다. 식견이 뛰어나서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꿰뚫어 보았다. 재능을 깊이 감추고 멀리 떠난 것은 마치 법도를 벗어난 듯하지만, 평소 그 행실을 살펴보면 진실로 법도에 맞았다.

 

그 학문은 경(敬)을 주장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실천을 독실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성인의 경지도 배우기만 한다면 가능하다. 오직 자 포 자기하여 행하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의리를 논하고 시비를 분별함에 있어서 광명정대하고 통찰력이 월등하여 사물을 끌어다 유형별로 연결시키고 세밀히 분석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서 탄복하게 하였으므로 혼매한 자는 밝아지고 의혹을 품은 자는 풀렸다.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율려(律呂)ㆍ산수(算數)ㆍ지음(知音)ㆍ관형(觀形) 등과 같은 잡술(雜術)에도 깊이 이해하고 널리 통탈하였으나 이는 다만 그 부수적인 것일 뿐이었다.

 

재주는 시대를 바로잡기에 충분하고 행실은 세상에 법도가 될 만하며 지혜는 은미함을 밝히기에 충분하고 도량은 대중을 포용하기에 충분하며 덕성은 인심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으나 속에 쌓인 포부를 펴보지 못했다.

 

말년에 작은 고을을 맡았으나 또한 한두 가지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뜻을 지닌 채 별세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집안에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선생의 〈대인설(大人說)〉에 이르기를 “사람은 네 가지 바라는 것이 있으니 안으로는 신령하고 강하기를 바라며 밖으로는 부유하고 귀하기를 바란다. 귀함은 벼슬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부유함은 바라지 않는 것보다 더 부유한 것이 없고, 강함은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 없고, 신령함은 알지 않는 것보다 더 신령한 것이 없다.

 

그러나 알지 않는데도 신령하지 못한 것은 어리석은 자가 그렇고, 다투지 않는데도 강하지 못한 것은 나약한 자가 그렇고, 바라지 않는데도 부유하지 못한 것은 빈궁한 자가 그러하고, 벼슬하지 않는데도 귀하지 못한 것은 미천한 자가 그러하다.

 

알지 못하면서도 신령하며, 다투지 않으면서도 강하며, 바라지 않으면서도 부유하며,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귀한 것은 오직 대인(大人)만이 그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 〈과욕설(寡欲說)〉에 이르기를 “맹자는 ‘마음을 수양하는 데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적다는 것은 욕심이 시작된 것이니, 적게 하고 또 적게 하여 적음도 없는데 이르면 마음이 텅 비어 신령해진다.

 

신령함의 비춤이 밝음이 되고, 밝음의 실제가 성(誠)이 되며, 성의 도(道)가 중(中)이 되고 중이 발한 것이 화(和)가 된다. 중과 화는 공(公)의 아버지요, 삶의 어머니이니 간곡하고 지극하여 그 안이 없고, 넓고 커서 그 밖도 없다.

 

밖이 있다는 것은 작음의 시작이니,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형기(形氣)에 얽매이게 되면 내가 있는 줄만 알고 남이 있는 줄을 모르며 남이 있는 줄은 알아도 도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물욕에 번갈아 가리게 되면 본성을 해치는 것이 많아져서 욕심을 적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으니 더군다나 욕심이 없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한 글자 한마디가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음을 볼 수 있고 그 마음에 보존된 바를 알 수 있다.

 

아,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재위 기간에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우시어, 이때에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선생 같은 도덕과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같은 절의가 한 시대에 함께 빛났는데, 선생이 이에 도의(道義)로 사귀어 곁에서 주선할 적에 그 권계(勸戒)하는 뜻과 장려하는 말이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중봉은 타고난 자품이 질박하고 돈후하며 겉치레를 일삼지 않아 세상에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여러 선생들이 그 재주가 부족하여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의심하면서 다만 절의로 목숨을 바칠 사람이라고 허여하였는데 선생만은 “예로부터 큰일을 맡는 사람은 항상 가난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거워하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 속에서 나왔으니 조군(趙君)의 인품은 보통 사람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중봉의 집에 갔는데 그때 장성(長星)이 하늘에 뻗쳐 있자, 선생이 말하기를 “별의 응험(應驗)이 십수 년 뒤에 있을 것이니 천리(千里)에 피가 흐를 것이다.

 

그대가 옛사람의 책을 많이 읽어 임금께 재앙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도를 권면한다면 거의 흉조를 바꾸어 길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16년 뒤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율곡이 향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선생이 꾸짖으며 그대가 어찌 차마 물러나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비유컨대 부모님께서 중병에 걸려 약을 드렸는데 부모님이 노하여 혹 약사발을 땅바닥에 던진다면 자식 된 자가 물러가 약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중봉이 상소하기를 신이 스승으로 삼은 분이 셋이 있는데 바로 이지함이이성혼입니다. 세 사람은 학문의 성취가 각자 다르지만 마음이 맑아 욕심이 적고 뛰어난 행실로 세상에 모범이 되는 것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 아무개는 천성적으로 선(善)과 의(義)를 좋아하였으니 성혼과 이이가 가장 공경하고 존중하는 대상입니다. 두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서 폐단을 제거하고 곤궁한 백성을 구휼하는데 원대한 규모를 수립하였고, 간사한 일을 막고 아전을 단속할 적에는 화내지 않아도 위엄이 있었으니, 온 경내가 신명하다고 칭송하였습니다.

 

항상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잃을까 두려워한 것은 이윤(伊尹)의 뜻이었고 털끝만큼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것은 동방의 백이(伯夷)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율곡이 일찍이 칭송하기를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욕심이 적어 명리(名利)와 성색(聲色)에 담담하였다. 때론 농담을 하여 점잖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으니 사람들은 그 온축된 바를 헤아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형중(馨仲 이지함의 자)을 물건에 비유하자면 바로 기이한 화초, 진괴(珍怪)한 새나 돌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생은 물에 비친 달처럼 마음이 맑고 간하지 않은 국처럼 담박한 마음을 지녔다.

 

충심과 성실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효성과 우애로 귀신도 감동하였으며 득실(得失)과 영욕(榮辱)은 끓는 물을 눈[]에 붓는 것같이 여겼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세 선생만 한 이가 없는데 그들이 이와 같이 칭찬하였으니, 천년 뒤에도 이를 통해 선생의 인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유풍과 여운의 향기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았으니 사림(士林)들 가운데 큰 스승으로 우러러 흠모하지 않은 이가 없다.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선생의 문집에 발문(跋文)을 쓰기를 선생은 재주가 높고 기질이 맑아서 항상 세상일에서 초연하였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평생의 저술 이래 봐야 몇 편 정도이지만 봉황의 깃털 하나만 보아도 오채(五彩)의 무늬가 이루어졌음을 충분히 알 수 있고,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한 데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 이야말로 학자에 대해 잘 관찰하였고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하겠다.

 

세상 사람들은 그 외면만을 보고서 혹은 ‘고인일사(高人逸士)’라고 하고 혹은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구속을 받지 않는 자라고 하니, 또한 선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이를 만하다.

 

선생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장남 산두(山斗)는 일찍 죽었고, 차남은 산휘(山輝)이며, 나머지 아들은 장성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선생이 항상 산두는 내 벗으로 삼을 만하며, 산휘는 내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선생이 병석에 누웠을 때 직접 장구를 치면서 산휘로 하여금 장구 소리를 듣고 길흉을 점치게 하니 산휘가 “소리가 매우 조화로우니 병은 근심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거짓으로 고한 뒤, 재빨리 문밖으로 나아가 가슴을 치고 울면서 “병은 더 이상 손쓸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이 별세하였다.

 

장손 거인(據仁)은 별제(別提)인데 2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술(述)과 달(達)이다. 술은 1남 1녀를, 달은 6남 3녀를 낳았다. 선생의 자손이 처음에는 요절하여 실낱같이 이어지다가 백 년이 지난 지금에는 쓰러진 나무에서 움이 트듯 내외 손자와 증손이 날로 더욱 번성하여 모두 백여 명이나 되니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술(述)의 손자 정래(禎來), 정래의 아들 만(滿)ㆍ심(深)ㆍ완(浣)ㆍ자(滋) 및 형의 아들 직(溭), 직의 아들 경석(慶錫), 달의 손자 정익(禎翊)ㆍ정억(禎億)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에서 아름답게 칭송하고 있으니, 선생이 누리지 못한 복을 자손에게 내려 준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말씀이 또 징험된 것이다.

 

보령(保寧)은 바로 선생의 고향이다. 유신(儒紳)이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켜 사당을 짓고 영령을 편안히 모셨는데 금상(今上 숙종) 12년 병인년(1686)에 화암서원(花巖書院)이라고 사액하였다. 

 

중봉이 선묘조(宣廟朝)에 상소하여 선생의 시호를 청하고 만력 무인년(1578, 선조11)에 경연관(經筵官) 홍적(洪迪)이 삼공(三公 정승)에 추증하기를 청하였으나 국가가 다사다난하여 결국 시행되지 못하다가 금상 31년 을유년(1705)에 판윤(判尹) 민진후(閔鎭厚)가 아뢰어 포증(褒贈)하기를 청하여 계사년(1713)에 이르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판부사(判府事) 김우항(金宇杭)이 또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셨으니, 사후에 영광스럽게 해 주는 은전에 더 이상 유감이 없게 되었다.

 

변변치 못한 내가 근간에 일찍이 선배들의 문장 여기저기에 나오는 선생의 고상한 의론과 기이한 행적을 취해 보고서 무릎을 치고 탄복하며 주제넘게 상론(尙論 옛사람에 대해 평론함)하기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으로 한가한 세월 속에서 초연히 스스로 즐긴다.’는 것이야말로 선생의 뜻을 먼저 알았다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조예가 고명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나 뜻을 세움이 확고한 남명(南溟 조식(曺植))과 견줄 만한 인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삼가 선생의 현손인 헌납(獻納) 정익(禎翊)이 기록한 가승(家乘)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찬술하여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청한다. <끝>

 

[註解]

 

[주01] 사는 …… 때문이다 : 《국역 아계유고》 권6 〈숙부 묘갈명(叔父墓碣銘)〉에 “사는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하여 정자를 지었으므로 자호를 ‘토정’이라고 하였다.[以所居屋, 築以土, 平其上爲亭, 故自號土亭.]”라고 하였다.

 

[주02] 평소에 글을 읽자면 : 한국문집총간 47집에 수록된 《아계유고(鵝溪遺稿)》 권6 〈숙부묘갈명(叔父墓碣銘)〉에 “평소에 글을 읽을 때가 흔치 않았지만, 일단 책을 펴 들면 반드시 하루가 지나고 밤이 새도록 보았다.[平居罕讀書, 開卷, 必竟晷達夜.]”라고 하였다.

 

[주03] 부인의 …… 당했다 : 1545년(인종1) 일어난 ‘을사사화’ 이후, 윤임의 사위인 이홍윤(李洪胤)이 “간신 무리를 일망타진하겠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1549년(명종4)에 친형 이홍남이 귀양에서 풀려나기 위해 “동생 이홍윤이 배광의ㆍ김의순(金義淳) 등과 역모를 꾸몄다.”라고 승정원에 고변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지함의 장인인 이정랑을 괴수로 지목하여 능지처참하고 그의 가옥과 전답을 몰수하였다. 《국역 명종실록 4년 5월 3일, 18일》

 

[주04] 형의 …… 이르렀으나 :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는 1588년(선조21)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이산보는 1592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고 1604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05] 제사를 …… 하여 : 한국문집총간 47집에 수록된 《아계유고》 권6 〈숙부묘갈명〉에는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였으되, 전적으로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선인을 섬기기를 생전에 섬기던 것처럼 하였다.[祭祀極其誠, 不盡依文公家禮, 而事先如事生.]”라고 되어 있다.

 

[주06] 3년 동안 심상(心喪)하였다 : 스승의 상에 상복을 입지 않으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이르기를 “스승을 섬기되 범함도 없고 숨김도 없으며, 좌우로 나아가 봉양함이 일정한 방소가 없으며, 부지런히 일하여 죽음에 이르며, 심상(心喪) 3년을 한다.[事師, 無犯無隱, 左右就養, 無方, 服勤至死, 心喪三年.]”라고 하였다.

 

[주07] 안명세(安名世)가 …… 죽자 :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을 숙청하자, 안명세가 자세한 전말을 시정기(時政記)에 작성하였다. 1548년(명종3) 2월 12일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윤인경(尹仁鏡)ㆍ이기ㆍ정순붕 등 찬집청(撰集廳) 당상들이 을사년의 일을 참조한다는 명목으로 시정기를 살피고 약간 조목을 입계(入啓)하였다.

 

그 내용은 안명세가 역적의 정상(情狀)이 너무도 뚜렷한데 ‘역적’이라고 쓰지 않았고 사실이 아닌 임금의 과오에 대해 기록하였다는 등의 죄상을 열거하고 붙잡아다 국문을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안명세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기ㆍ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다가 2월 14일, 당현(唐峴)에서 참수되었다. 《국역 명종실록 3년 2월 12일ㆍ13일ㆍ14일》

 

[주08] 박춘무(朴春茂) : 1568~1646.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내문(乃文), 호는 나곡(蘿谷)이다. 부친 박맹원(朴孟元)의 명으로 이지함의 문하에 나아가 역리(易理)를 통하여 병법(兵法)을 익혔다. 임진왜란 때 형 박춘영(朴春英)과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워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선되었다.

 

[주09] 서치무(徐致武)의 …… 것 : 허봉(許篈)의 《조천기(朝天記)》에 따르면 “서치무는 본래 사천(私賤)으로서 천성이 깨끗하고 늠름하였다. 서치무의 주인이 그의 재산을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이지함이 이를 듣고서 그의 재산을 유산(流散)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이후 서치무를 아껴 서로 허여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한라산(漢拏山)을 함께 유람하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10] 허자(許磁)와 이기(李芑)의 사화(士禍) :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명종의 외숙이자 소윤(小尹)의 거두인 윤원형(尹元衡)과 인종의 외숙이자 대윤(大尹)의 거두인 윤임(尹任)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을 계기로 윤원형이 그의 일파인 이기, 허자, 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음모를 꾸며 윤임과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이고 많은 명사(名士)들을 축출하였다. 《국역 명종실록 즉위년 8월 22일ㆍ24일ㆍ28일, 9월 11일》

 

[주11] 임금과 신하의 의리 : 원문의 ‘원수고굉지의(元首股肱之義)’는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뜻하는 말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고요가 “원수가 현명하시면 고굉이 어질어서 모든 일이 편안할 것입니다[元首明哉, 股肱良庶, 萬事康哉.]”라고 하였다.

 

[주12] 빈지초연(賓之初筵)에서 …… 하였지만 : 《시경》 〈빈지초연〉에 “빈객이 이미 취한지라 곧 고함을 치며 떠들어서……기울어진 관이 삐딱하여 자주 춤추기를 그치지 않도다.[賓旣醉止, 載號載呶……側弁之俄, 屢舞傞傞.]”라고 하였다. 빈객이 처음 자리에 나갈 적엔 온온(溫溫)히 공손하여 위의(威儀)가 반반(反反)하다가 술에 취하면 그 위의를 잃고 덕을 해침을 풍자한 시이다.

 

[주13] 자사(子思)는 …… 말하였고 : 맹자(孟子)가 자사에게 배울 적에 “백성을 기르는 방법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자사가 “먼저 백성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맹자가 “군자가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또한 인의(仁義)일 뿐인데 하필 이익입니까?”라고 묻자, 자사가 답하기를 “인의는 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이(利)는 의(義)의 화함이다.’라고 하였고 또 ‘씀을 이롭게 하고 몸을 편안히 하여 덕을 높인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이로움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資治通鑑 卷2 周紀》

 

[주14] 주자(朱子)는 조적(糶糴)에 힘썼으며 : 조적은 바로 남송(南宋) 시대 주희(朱熹)가 주창했던 사창제(社倉制)를 말한다. 1168년(효종4) 숭안현(崇安縣)에 흉년이 들자 상평창의 구휼미를 빌려 와 봄에 양식이 부족한 사람에게 쌀을 빌려 주고 가을 추수 후 이자를 갚도록 하여 백성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429 朱熹列傳》

 

[주15] 여상(呂尙)은 …… 유통시켰습니다 :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평정한 뒤 강태공을 제(齊)나라 영구(營丘)에 봉하였다. 강태공은 이곳을 다스리면서 상공업을 장려하고 어염의 이익을 유통시켜 제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었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주16] 포천의 …… 것입니다 : 상소의 전문이 한국문집총간 36집에 수록된 《토정유고(土亭遺稿)》 권상(卷上)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에 보인다.

 

[주17] 문왕(文王)이 기주(岐周)를 다스리고 : 문왕이 기주를 다스릴 적에 경작하는 자에게 9분의 1의 세금을 받고 벼슬하는 자들에게는 대대로 녹(祿)을 주는 등의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정사(政事)를 펴고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환(鰥), 과(寡), 고(孤), 독(獨)을 가장 우선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孟子 梁惠王下》

 

[주18] 맹자(孟子)가 …… 것 : 맹자가 말하기를 “5묘(畝)의 집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세 된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와 큰 돼지를 기름에 새끼 칠 때를 잃지 않게 한다면 70세 된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늙은 자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여민(黎民)이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 이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하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주19] 어진 …… 넓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3년조에 “어진 사람의 말은 그 이로움이 넓도다. 안자(晏子)의 한마디에 제(齊) 나라 임금이 형벌을 줄이게 되었다.[仁人之言, 其利博哉! 晏子一言, 而齊侯省刑.]” 하였다.

 

[주20] 조정에서 …… 돌아갔다 : 《국역 선조수정실록》 7년 8월 1일 기사에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건의하여 해읍(海邑)의 어량(漁梁)을 절수(折受)받아 곡식을 사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이 따라 주지 않았다. 이지함은 본디 고을 원(員)으로 오랫동안 머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주21] 아산 현감(牙山縣監)이 …… 진달했는데 : 상소의 전문이 한국문집총간 36집에 수록된 《토정유고(土亭遺稿)》 권상(卷上)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 폐단을 진달한 상소[莅牙山時陳弊上疏]〉에 보인다.

 

[주22] 욕심이 시작된 것이니 : 원문에는 ‘欲之始’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36집에 수록된 《토정유고》 권상 〈과욕설〉에는 ‘無之始’ 즉, “욕심이 적다는 것은 없음의 시작이니”로 되어 있어 해석에 차이가 있다.

 

[주23] 장성(長星) :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해를 중심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운행하는 별로, 예로부터 병란(兵亂)을 예고하는 요성(妖星)이라 하여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資治通鑑 卷14 漢紀》

 

[주24] 율곡이 …… 하였다 : 1578년(선조11) 4월에 이이(李珥)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이지함이 병든 부모와 수발하는 자식의 비유를 들며 나무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이는 “말은 매우 절실하나, 다만 군신과 부자는 차이가 있지 않겠소.”라고 답했다. 《栗谷全書 卷30 經筵日記, 韓國文集叢刊 45輯》

 

[주25] 중봉이 …… 하였다 : 공주(公州)의 주학 제독관(州學提督官)으로 제수된 조헌(趙憲)이 학정(虐政) 등의 폐단에 대해 올린 상소문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19년 10월 1일》

 

[주26] 형중(馨仲)을 …… 돌이다 : 김계휘(金繼輝)가 이지함을 제갈량(諸葛亮)에 비하는데 어떠한지 물은 것에 대해 이이가 답한 말이다. 《石潭日記 卷下》

 

[주27] 선생은 …… 여겼다 : 한국문집총간 44집에 수록된 《율곡전서》 권14 〈토정 이공 지함 제문[祭土亭李公之菡文]〉에 실려 있다. 원문의 ‘대갱(大羹)’은 다섯 가지 맛으로 간하지 않은 고깃국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풍격(風格)이 고아(古雅)하고 담박(淡朴)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주28] 큰 스승으로 …… 없다 : 원문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은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구절에서 온 말로, 높은 산과 큰길처럼 훌륭한 스승을 뜻한다.

 

[주29] 선생은 …… 것이다 : 이 내용은 한국문집총간 113집에 수록된 《송자대전》 권148 〈토정선생유고 발문[土亭先生遺稿跋]〉에 보인다.

 

[주30] 산휘로 …… 하니 : 이지함의 아들 이산휘(李山輝)가 평소 음악을 잘 알았기 때문에 보는 이들마다 신명하다고 했다. 《土亭先生遺事 卷下 記, 韓國文集叢刊 36輯》

 

[주31] 중봉이 …… 청하고 : 조헌이 상소하여 이지함을 조식(曺植)ㆍ박훈(朴薰)의 관례에 따라 관작을 추증하고 치제할 것을 요청하였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19년 10월 1일》

 

[주32] 민진후(閔鎭厚)가 …… 청하여 : 민진후가 이지함의 포증을 청한 내용이 《국역 숙종실록》 31년 6월 10일 기사에 보인다.

 

[주33] 김우항(金宇杭)이 …… 윤허하셨으니 : 김우항이 이지함에게 증시(贈諡)하도록 청하기를 “이지함은 선조조의 명신(名臣)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그는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고 칭찬하여 관작과 시호를 추증할 것을 청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역명(易名)의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국역 숙종실록 39년 5월 20일》

 

[주34] 내성외왕(內聖外王)의 …… 즐긴다 : 내성외왕은 ‘안으로 성인의 경지를 갖추고 밖으로 왕도정치를 펼친다.’라는 뜻으로 《장자》 〈천하(天下)〉에 나오는 말인데, 정호(程顥)는 일찍이 소옹(邵雍)의 학문에 대해 ‘내성외왕지학(內聖外王之學)’이라고 평한 바 있다.

 

또 그의 시집인 《격양집(擊壤集)》에 “생각건대 한가한 가운데의 즐거움을 나처럼 온전히 차지한 이 없네.[料得閒中樂, 無如我得全.]”라고 하여 한가한 세월 속에서 스스로 즐겼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原文]

 

土亭李公諡狀

 

先生諱之菡字馨仲。自號土亭。以所居屋築土爲亭也。韓山李氏。代有聞人。至稼亭諡文孝公諱穀,牧隱諡文靖公諱穡父子。仕麗朝有大名。稼亭寔先生七代祖也。文靖生諱種善。入本朝官至左贊成諡良景。性至孝。遺址有旌表碑。贊成生諱季甸。府院君贈領議政諡文烈。文烈生諱堣。大司成贈參判。參判生諱長潤。縣監贈判書。判書生諱穉。縣令贈左贊成。卽先生考也。以正德十二年丁丑九月二十日生先生。生有異質。神氣淸爽。聲音弘亮。見者奇之。少孤。從其伯省庵公學。及長贅于毛山守呈琅之門。醮之翌日。出而暮還。家人見其新袍亡。問之則見丐兒寒。割而與之衣三兒。袍卽盡矣。平居讀書。竟晷達夜。出廣陵村庄。送奚取燈膏。毛山止之曰郞嗜書過。恐傷也。乃腰斧入山中。斫松燎於堂。煙漲火熱。人爭避。先生端坐不倦者歲餘。羣聖人書百家之文。無不貫穿。下筆爲文章。水湧山出。若將爲擧子業。隣有聞喜設筵戱者。見而心賤之。後雖入科塲。輒不製。製又不呈。人問之則曰人各有所好。我自樂此。一日謂省庵公曰。吾觀婦門無吉氣。不去禍將及。挈妻子寓居保寧。明年婦家果遘禍。其父母之葬也。相其地當出兩相而不利季子云。先生乃以季强之。自當其灾。後兄子鵝溪山海,忠簡公山甫。官至一品。先生之嗣夭而不顯。先生常曰吾子孫今雖零替。後必衆多有顯者矣。以丘墓濱海。恐歲遠爲潮水囓。將築堤。非累鉅萬不可。仍自販於漁鹽商賈之間。靡所不爲。事未成而心不已。篤於誠孝類此。後歲大歉。慨然欲拯濟萬人。懋遷有無。積粟如山。盡散貧民。妻子有飢色。嘗作廣屋。置寒乞人。敎之以手業。各周其衣食。最下無能者。與之藁。使作芒鞋。一日之工。無不辦斗米。與伯仲友愛篤。非遠離。未嘗一日異處。祭祀必依朱文公家禮。盡其誠。事先如事生。訓誨子姓。最戒女色曰。此而不嚴。餘無足觀。嘗乘船涉海入濟州。州牧聞其名。迎入館。擇美妓薦枕。指倉穀謂曰若得李君幸。以此賞之。妓必欲亂之。達宵納媚。竟不汚。州牧益尊敬。聞省庵公在洛中病。自保寧徒步往見。及公歿。謂有師道。心喪三年。先生嚴於自治。壁立千仞。而接人則和氣藹然。聞人有一善。不遠千里而見之。安命世死非其罪。追悼不已。朴春茂恬靜自守。徐致武隱居樂道。先生終始勸勉以成就之。先生稟氣異常。而用力於克己上。寒暑飢渴不能入。或冬月裸體坐雪巖。或盛夏不飮水。或浹旬不火食。或徒步數百里無困憊色。嘗携竹杖行路。而睡時兩手據杖。鞠躬低頭。而兩足分踏定立。鼻息如雷。牛馬觸之退却。先生凝然山峙。少無動撓。南溟嘗見先生忍飢耐寒而戱之曰。稟氣如此。何不學仙。先生斂容曰何輕人若是。南溟笑而謝之。先生非果於忘世。而適値磁,芑斬伐之餘。斂德避難。不欲使人知其畦町。故鞱光混世。累辭徵招。而嘗曰得百里之邑而爲之。貧可富薄可厚亂可理。足以爲國家保障。晩年應辟爲抱川縣監。上疏乃以道德人才百用之說。設爲三策。眷眷乎建極錫福之道。反復乎元首股肱之義。而末復推演生財救民之務曰。抱之民如無母寒乞兒。五臟病一身瘁。何忍立視其死乎。今若採海中無窮之魚。煮斥鹵不盡之水。數年之內。可得數千斛穀。此豈非博施濟衆之一助乎。或者曰君子言義而不言利。何敢以財利之事。達之於君父之前乎。忍哉言也。賓之初筵。責側弁坐遷之無禮。而赤子入井。將不正冠。顚倒以救之。何暇責乎容之不恭乎。昔子思先言利。朱子務糶糴。而呂尙聖人之徒。且通魚鹽之利。或人妄爲說以沮救民之策。天必厭之。縷縷數千言。出於愛君憂民惻怛之誠。而其所謨猷。暗合於文王之治岐。鄒聖之制産。眞所謂仁人之言。其利博哉。豈可與空言廓落無用者比哉。朝廷不能用已而棄官歸。後爲牙山縣監。又陳疏請减軍額。除一族法。言亦明白的當而寢不用。邑有池養魚。使民歲漁納官。民甚苦。先生塞其池絶後患。敎誘縣學。章甫之徒。講習文武才。期備邦家之用。未幾以疾卒于官。萬曆六年七月也。壽六十二。一邑之民。奔走號哭。如悲親戚。先生俊偉高爽。淸心寡欲。識見超邁。貫徹天人。深晦遠引。若出範外。而夷考其行。允蹈規矩。其爲學。以主敬窮理踐履篤實爲先。嘗曰聖可學而能。惟患暴棄不爲耳。其於論義理辨是非。正大光明。通暢發越。引物連類。毫分縷析。使人聳聽歆服。而昏者明惑者解。若其天文地理醫藥卜筮律呂筭數知音觀形等術。曲解旁通。而此特其緖餘耳。才足以匡時。行足以範世。智足以燭微。量足以容衆。德足以鎭物。而不得展布所蘊。晩試小邑。亦未究一二。齎志而歿。豈非天乎。先生不喜著述。其傳于家者無幾。其大人說曰人有四願。內願靈强。外願富貴。貴莫貴於不爵。富莫富於不欲。强莫强於不爭。靈莫靈於不知。然而不知而不靈。昏愚者有之。不爭而不强。懦弱者有之。不欲而不富。貧窮者有之。不爵而不貴。微賤者有之。不知而能靈。不爭而能强。不欲而能富。不爵而能貴。唯大人能之。其寡欲說曰孟子曰養心莫善於寡欲。寡者欲之始。寡而又寡。至於無寡。則心虗而靈。靈之照爲明。明之實爲誠。誠之道爲中。中之發爲和。中和者。公之父生之母。肫肫乎無內。浩浩乎無外。有外者小之始。小而又小。梏於形氣。則知有我而不知有人。知有人而不知有道。物欲交蔽。戕賊者衆。欲寡不得。况望其無乎。於此可見先生隻字片言。無非遏欲存理之意。而其中之所存可知也。嗚呼。明宣在宥。天佑斯文。時則有若栗谷,牛溪兩先生之道德。有若趙重峰之節義。並耀一世。先生乃以道義之交。左右周旋。其勉戒之義。奬詡之辭。同出至誠。重峰天資樸厚。不事外飾。世無知者。雖諸先生疑其才短不適用。只以伏節死義許之。先生獨曰自古當大事者。恒出於安貧樂道愛君憂國之人。趙君爲人。非凡人所知。一日往重峰家。時長星竟天。先生曰星之應當在十數年後。流血千里。君多讀古人書。勸人主以消灾滅殃之道。則庶幾變凶爲吉。後十六年果有壬辰之亂。栗谷將歸鄕里。先生責之曰。君何忍退歸。譬如親有重病。以藥進則親怒。或以椀擲地。爲子者其可退去而不藥乎。重峰上疏曰臣所師者三人。李之菡,李珥,成渾也。三人者學問所就。雖各不同。其淸心寡欲。至行範世則同。又曰李某樂善好義。出於天性。成渾,李珥最所敬重。出宰二縣。祛弊賑窮。立宏遠之規。束奸御吏。不怒而嚴。一境稱神明。常懼一物失所。伊尹之志也。不以一毫自凂。東方之伯夷也。栗谷嘗稱之曰先生天資寡欲。於名利聲色淡如也。有時戱語不莊。人不能測其蘊也。又曰馨仲比之於物。是奇花異草珍禽怪石也。又曰先生水月情懷。大羹腸胃。忠信感物。孝友通神。得失榮辱。沸湯沃雪。知先生心。莫如三先生。而其所稱道若是。千載之下。可以此知先生之爲人也。其遺風餘韻。芬至今未沫。士林莫不有高山景行之慕。尤齋先生題先生文集曰。先生才高氣淸。常超然於事物之外。平生著述之存於今者若干篇。而觀鳳一羽。足以知五采之成章。溯其本則皆自淸心寡欲中流出矣。噫。此可謂善觀而善言學者矣。世徒見其外。而或以爲高人逸士。或以爲卓犖不羈。亦可謂淺之知先生也。先生四男。長山斗早歿。次山輝。餘未長而夭。先生常稱山斗可以爲吾友。山輝可以爲吾師。先生寢疾。親自擊缶。使山輝聽缶聲。以驗吉凶。山輝佯曰聲甚和。病非可憂。亟出門揮淚扣胸曰病不可爲。未幾先生易簀。長孫曰據仁。別提。生二男二女。男曰述曰達。述一男一女。達六男三女。先生子孫初則夭椓不絶如縷。到今百年之後。顚木有㽕。內外孫曾。日益滋蕃。總百餘人。不能盡記。而述之孫禎來。禎來之子曰滿曰深曰浣曰滋及兄子溭。溭之子慶錫。達之孫禎翊,禎億。皆登文科。世艷稱之。豈非先生不食之報。而先生之言又驗矣。保寧乃先生桑榟之鄕。儒紳興慕。刱祠妥靈。上之十二年丙寅。賜額曰花巖。重峰於宣廟朝疏請先生諡。萬曆戊寅。經筵官洪廸請爵三公。國家多事。竟未施行。上之三十一年乙酉。判尹閔鎭厚白請褒贈。至癸巳贈吏曹判書。判府事金宇杭又請贈諡。上特允之。哀榮之典。復無憾矣。不佞間嘗竊取先生高論奇蹟雜出前輩文字中。擊節歎賞。而妄爲尙論曰。以內聖外王之學。超然自樂乎閒中之日月者。可謂先獲先生之志。而其在我東。花潭之造詣高明。南溟之立志牢確。謂之伯仲者非耶。謹就先生玄孫獻納禎翊所錄家乘。撰次如左。以請易名之典云爾。<끝>

 

병산집 > 屛山集卷之十一 / 諡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