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성주목사 황준량 행장 - 이황(李滉)

■ 성주목사 황준량 행장 - 이황(李滉) (星州牧使黃俊良行狀) 성주 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는 준량(俊良)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 그의 먼 조상이다. 시중의 손자 근(瑾)이 공민왕(恭愍王) 때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과 상소(上疏)하여 지진의 변고를 극력 논란하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서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제학공(提學公)이 낳은 휘 유정(有定)은 본조(本朝 조선(朝鮮))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전서공(典書公)이 낳은 생원(生員) 휘 연(鋋)은 공(公)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전서공이 영천(榮川 경북..

남명 조 선생 신도비명 병서

■ 남명 조 선생 신도비명 병서 (南冥 曺先生 神道碑銘 幷序) 선생이 돌아가시자 산천재 뒤 언덕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 비문은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성 선생은 선생과 도를 같이 하는 벗이었다. 이 비문에는 선생의 학문 과정과 도덕규범 및 계파의 원류 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어 더 보탤 것이 없었다. 그 후 30여 년 뒤, 선생의 맏아들이 옛날 비석은 돌이 형편없어서 이지러진 부분이 이미 많아 오래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여 돌을 다듬어 고쳐 세우려고 했다. 그때 마침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하여 선생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여, 임금님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새로 다듬은 돌로 신도비를 만들면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기에,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一蠹 鄭先生 墓表銘 幷序) 선생은 휘가 여창(汝昌), 자가 백욱(伯勖)이며 하동(河東)이 본관이다. 증조부 지의(之義)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냈고, 조부 복주(復周)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으며, 부친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 32)에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부친께서 의주 통판으로 계실 적에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명설(名說)을 지어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선생은 통곡하다 죽을 뻔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 부친의 시신을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선생은 당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삼..

사계 김장생 시장(沙溪金先生諡狀).

가의대부(嘉義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시장(諡狀).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고, 자는 희원(希元)이며, 성은 김씨(金氏)인데, 학자들이 사계 선생이라 칭한다. 그 선조는 신라에서 나왔다. 신라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들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현달한 사람이 있었다.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

신독재 김집선생 시장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시장 선생의 휘는 집(集)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신라(新羅)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벼슬이 계속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2대를 내려와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으로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좌리 ..

고려 순천군 채홍철 묘지명(高麗順天君蔡洪哲墓誌銘)

[생졸년] 채홍철『蔡洪哲, 1262년(원종 3) ~ 1340년(충혜왕 1)』 유원(有元) 봉의대부(奉議大夫)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 효기위(驍騎尉) 대흥현자(大興縣子) 고려(高麗) 순성보익찬화 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 순천군(順天君) 채공(蔡公)의 묘지명 李穀(이곡) 찬(撰) 지원(至元) 6년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 채공이 79세의 나이로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차 예법에 따라 장례를 지내려고 할 적에, 그의 자서(子壻)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공의 행의(行義)는 한 시대에 높고, 공의 공덕은 온 나라에 드러났다. 그러니 명을 ..

김유은 공 행장(金遊隱公行狀) - 밀직공 이창로(李彰路)의 외 손서

金遊隱公行狀 - 송순(宋純) [생졸년] 14?? ~ 14?? 金公諱季甫。彥陽人。太傅平章諡威烈就礪之八世孫。太傅平章諡翼戴佺之七世孫。曾祖。禮儀判書,彥陽君湧輝。屢將重兵有功。■祖。純誠翼戴原從功臣,晉州牧使賞。倭寇晉州。屢捷戰亡。功烈顯著。父。行綾城縣令。贈吏曹參判躍。外祖。開城尹慶州李彰路。文忠公益齋齊賢之子也。公平生之心。正直忠毅。不與貴顯交遊。宣德壬子。以學生登武科。歷事世宗,文宗,端宗。舊本云魯山朝 官至刑曺都官正郞。而世祖元年乙亥。作詩贈同朝諸賢。與冢婦之季父歸來申公末舟。解紱南來。申歸于淳昌。公歸于南原屯山下。癖於漁樵。聾於世事。而於淳子江上。因作小亭。自號遊隱翁。自額鰲戴者。亦有所況。鰲戴三山。而公戴三朝之義。遊斯隱斯。終老江湖。去神仙不遠之意也。公與申公最友善。携酒以詩。間日相從。歸來亭鰲戴亭。苟爲一代之勝地矣。公每當皓月良宵。登斯望北。長嚱感歎。已成恒規。忽..

대산 이상정 묘지명 병서(大山 李象靖 墓誌銘 幷序)

[생졸년] 이상정「李象靖, 1711년(숙종 37) ~ 1781년(정조 5)」 大山先生墓誌銘 幷序 柳道源 謹撰 大山李先生以明陵辛卯正月二十九日。生于安東之蘇湖里第。十四。就學于外大父密庵先生。二十五。俱中大小科。戊午。除連原察訪。己未。棄歸。辛酉。除徽陵別撿。壬戌。陞承文正字。丁卯。除典籍。遷禮兵郞。戊辰。遭先考喪。辛未。除禮曹正郞。不赴。癸酉。除延日縣監。乙亥。罷還。壬午。除司憲府監察。至嶺下歸。辛卯。除康翎縣監。呈病于吏曹。尋爲臺章所論遞。今上卽位之元年丁酉。除司諫院正言。䟽辭尋遞。庚子二月。除兵曹佐郞。病遞。九月。陞資拜兵曹參知。屢䟽辭。不許。十二月。遞拜禮曹參議。亦䟽辭不允。辛丑三月。移拜刑曹參議。上九條䟽。八月。又上䟽遞。十月寢疾。十二月九日丁丑。易簀。明年壬寅三月。葬于府北鶴駕山巳向之原。士林會者千二百餘人。嗚呼。先生氣貌英粹。資性端愨。自在幼穉。未嘗違忤父母。..

하연선생 신도비문(河演先生 神道碑文)

神道碑文 - 南智 緬惟我世宗大王勵精治道。尤致詳于庶獄庶愼。凡廷僚之可大用者。旣簡在心。必試之方岳。嶺。新羅舊疆。東邊海。海之島南極于倭。西北接兩湖。迤至于關。地踔遠。環一節聽治大小七十有餘邑。號難治。歲乙巳。命大司憲河公。旣之任。政明修擧。治成績煕。有決輒當。一日。閱久牒得細大疑滯凡一笥。以狀請于朝。擇庶僚之有才幹可參決決疑。公所恢恢爾。特謙邦不自專。恐一事或誤。致曠分憂也。余不佞承乏佐幕。幕禮畢。可辨者專。可質者覆。公亦不異焉。遂猥推詡器局。賜交忘年。雖公之誤知余。而余之得幸於嶺大矣。後數十年乙丑。右揆缺。公以宿德拜右揆。丁卯。陞左。己巳。余亦濫躋政府。公謂余曰。首領官老監司。萬一蹉跌。不可說也。蓋用嶺幕相得。至是而幷武黃閣。公之戲余而寓其喜。可知也。嗚呼。公旣歿。余又崇風瘖。殆不能言。公之胤子友明請余以幽竁之文。文又余不能。夫書者未必盡其言。言者未心盡其意。顧兹文不能言不能。疾..

조선시대 경주(慶州)의 효행 사적

■ 조선시대 경주의 효행 사적 조선시대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경주(慶州) 효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삼강행실도』, 『동경잡기』, 『금오승람』, 『경주시사』, 『왕도경주』 등의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효행사적을 형태별로 구분해 보면, 삼년시묘 효행, 단지의 효행, 고기봉양 효행, 살을 베어 치유한 효행, 종기를 빨아 치유한 효행, 호랑이와 관련된 효행, 불 속에 뛰어 들어 부모를 구출한 효행, 금식효행, 아버지의 눈을 뜨개 한 효행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족별 효행을 살펴보면, 전 가족 효행, 양세효자, 형제효자, 삼형제 효자, 사형제 효자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 3년간 시묘(侍墓)한 경주(慶州)의 효자들..... 삼년 시묘는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