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길창부원군 권협 묘지명(吉昌府院君權悏墓誌銘)

야촌(1) 2022. 6. 1. 14:29

■ 길창부원군 권협 묘지명(吉昌府院君權悏墓誌銘)

 

공은 휘는 협(悏), 자는 사성(思省), 성은 권씨(權氏)로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증조부 권욱(權旭)은 사도시 부정으로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고, 조부 권진(權振)은 전생서 참봉으로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고, 부 권상(權常)은 지극한 행실이 있어 선조 때에 선공감 정에서 통정대부로 특진하였고, 또 수고(壽考)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뒤에 은혜를 미루어 영의정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云傑)의 딸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봉되었다. 공은 명나라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 32년(1553, 명종 8) 5월 24일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재예(才藝)가 일찍 성취되었다.

 

24세 때에 정시(庭試)에서 제1인으로 발탁되고, 그 다음해 우리 선조 10년에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에 뽑혔다가 얼마 안 되어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사간원에 있을 적에 기축원옥(己丑冤獄)을 논핵하여, 좌상(左相) 정철(鄭澈)이 강계(江界)에 안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상이 서도에 파천할 때에는 공이 집의(執義)로서 간하기를,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禮)에 한 나라의 임금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고, 대부(大夫)는 백성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비록 따르지는 않았어도 그 말에 감동하여 차고 있던 칼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이듬해 황제(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여, 남북 관병(官兵) 4만을 인솔하고 서경(西京 평양)을 수복할 때, 공이 어사(御史)로서 해서(海西 황해도), 경기(京畿) 등 도의 말먹이와 양곡을 수송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당시에 정철이 삼남 도체찰사(三南都體察使)로 기용되어 곧 상께 아뢰어 공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그는 공과 원한이 깊었던 터라, 당장에 유감을 풀어 버릴 생각으로 자신은 강화(江華)에 머물면서 공을 남방으로 보내어 병무에 관한 일을 다스리게 하니, 이때는 적의 서울 점거로 남방의 길이 통하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것이니,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왕이 욕을 당하는데 신하된 도리로 죽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때에 제독이 고양(高陽)에서 패전하고 왜적과 화의(和議)를 맺었으므로 모든 길이 비로소 통하였다.

 

공이 어사(御史)로서 호남(湖南)을 순무(巡撫)하다가 대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돌아왔다. 왜적은 그대로 남쪽 변방에 있으면서 다시 쳐들어오겠다고 하였는데, 정유년(1597, 선조 30)에 과연 더 많은 군사로 우리나라를 침공하니, 인심이 크게 놀라 안팎이 소란하였다.

 

상(上)이 여러 신하 중에서 위급을 알리는 사신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응교(應敎)로서 특별히 차출되어, 경사(京師 중국 서울)로 갈 적에 부사(副使)도 없이 전적으로 맡아 했다. 공이 명을 받고 곧 출발하여 30일 만에 경사에 당도하여 주문(奏文)을 올린 뒤에, 날마다 병부(兵部)의 군문(軍門 총병관(摠兵官)의 존칭)에게 우리나라는 허약하고 왜적은 강성하여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상황에 있음을 호소하였는데, 말만 했다 하면 눈물이 흘렀다.

 

군문이 지도(地圖 우리나라 지도)를 찾아내놓고, 이어서 우리나라의 성지(城池), 기계(器械), 병갑(兵甲), 저축과 왜병이 점거한 요해지를 묻자, 공이 지지(地誌)를 외어 여지도(輿地圖)를 그리고, 적의 침입로와 우리가 참패한 상황을 모두 갖추어 자세하게 열거하여 빠뜨린 계책이 없으니, 군문이 크게 기뻐하며 훌륭한 인재라 하였고, 좌우에 서 있던 군리사(軍吏士)까지도 놀라며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곧 주문을 거듭 올리고 성지(聖旨)를 받들어 남북(南北)의 수륙 관병(水陸官兵)과 산동(山東)의 양곡을 보내게 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사세가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수송하는 길이 멀어서 반드시 서로 미치지 못할 것이니, 바라건대 우선 요동(遼東), 광녕(廣寧)에 있는 양곡과 영평(永平)에 있는 남병(南兵)을 보내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근각(筋角 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물건)과 초황(硝黃 화약을 만드는 데 사용됨)을 무역하기를 청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남북의 정병(精兵)을 징발하니 온 자가 1만 2천이었고, 뒤따라 온 대군(大軍)과 합하니 14만 명이었다. 겨울에 왜적이 경기에 육박하여 천병(天兵)이 이를 격퇴하였다. 적은 바닷가에 주둔하였는데 보루를 구축한 것이 6백 리를 잇달았으므로, 대군이 모두 남하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호조 참의로서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갔는데, 이때에 해우(海右 해서(海西))는 막 병란에 시달려 모든 것이 어지러운 데다가, 또 군대가 안정되지 않아 날마다 거기(車騎)가 길에 잇달았으므로 온갖 것을 수급해야 했다.

 

그러나 공은 몸소 부지런히 애써 장병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또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호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아가서는 대란(大亂)이 처음으로 안정된 터라 주민의 노력을 덜어 주는 데 힘을 썼다.

 

3년 만에 승정원에 들어와 우승지가 되었으며, 2년 뒤 형조 참의로 승진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다.

이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위차(位次)를 의정(議定)하였는데, 공이 원종(原從)에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정유년에 왜적을 격퇴하고 병란을 진압할 적에 모(某)의 공력이 많았으니 원종에 둘 수는 없다.”

하고, 원공(元功) 3등에 기록하도록 명하고 효충장의 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는 호(號)와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하고, 길창군에 봉했다.

 

다음해에 대사헌으로서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전라도관찰사 겸 견성윤(全羅道觀察使兼甄城尹)이 되었을 때에, 정형(政刑)을 공평하게 하고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상국 김류(金瑬)가 속읍(屬邑)을 맡았을 적에 법에 걸려 축출당했으나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기를,

“청렴 정직하고 사심 없기가 옛 염문사(廉問使)와 같은 기풍을 지녔다.”

하였다.

 

정미년(1607, 선조 40)에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무신년에 상(上 선조)이 승하하였을 적에는 공이 상례 조상(喪禮詔相 조상(詔相)은 상례 때에 그 위의(威儀)를 알리는 것)을 관장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새로 즉위하고 정인홍(鄭仁弘)이 권세를 부리자, 선조 때의 공경(公卿)과 모든 근신이 교체되어 공도 예조 판서에서 파직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태묘(太廟)를 감수(監修)했다는 것으로 정헌(正憲)에 올랐으며, 갑인년(1614, 공해군 6)에 신구(新舊)의 공신을 제향하고 숭정대부에 가자(加資)되어 1품에 오른 지 2년 만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2년 뒤 1월 27일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치니, 춘추가 66세였다.

 

부음을 아뢰니 의례에 따라 부조(賻吊)를 내리고 의정부 영의정 길창부원군으로 추증하였으며, 유사(有司)를 시켜 장례가 끝나기까지의 일을 돌보도록 하였는데, 분묘는 부평의 수탄(水呑)에 있다.


공은 젊어서 순천 도정(順川都正) 이관(李琯)에게 수학하여 수신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선부군(先府君)이 늘 교유(交遊)를 삼가고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는 훈계를 하였기 때문에, 공이 자신의 행동을 반드시 올바르게 하고 사람과 교제함에는 반드시 삼가서, 정의만을 행하고 이해를 돌보지 않았다.

 

조정에 40여 년 있는 동안 한결같이 관직에 태만하지 않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고 장중(莊重)하여 말이 적었고 거처를 반드시 엄숙하게 하였다. 3형제가 모두 높은 벼슬로 조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가문이 번창해도 늘 겸양하여 교만한 빛이 없었고, 한결같이 간결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부모가 노쇠해서는 언제나 조정에서 퇴근하면 반드시 곁에 모시고, 종일토록 섬기고도 오히려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상사에 성(誠)과 신(信)을 다하고도 예(禮)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선공(先公 공의 아버지)의 상사 때에는, 공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經筵)을 모신 날이 많았으므로, 상이 유사로 하여금 그 상사를 돌보도록 하고 은례(恩禮)를 매우 후하게 하니, 영광스럽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 벼슬이 높아지고 나이 5, 60세가 되어서도 반드시 살아 계신 이를 섬기듯이 사랑을 극진히 하여, 수륙(水陸)의 맛 좋은 음식이 있으면 또한 천신(薦神 신주께 드림)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한 가지 일이라도 감히 효도를 잊지 않았는데, 자신이 생을 마칠 때까지 그 마음이 줄지 않았다.

 

아들이 없이 과부로 사는 누이가 있었는데, 꼭 한집에서 식사하도록 하여 부모가 보살피듯 하였으며, 나이 많은 형 지중추공(知中樞公)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봉양하고, 때맞춰 의복을 장만해 드리는 등 모든 것을 그 뜻에 맞도록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녹봉(祿俸)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가난한 친척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고, 집에는 살림살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묻지 않았으며, 포용하는 마음이 돈후한데다가 겸손하고 검소하여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며, 남의 허물은 말한 적이 없고 남의 잘한 일은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이래로는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시사(時事)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더니, 병이 위독할 즈음에 대비(大妃 영창대군의 어머니)의 폐위를 의결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래도 부축 받아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인도(人道)가 사라졌다.”

하고, 형 참판공과 마주 대하여 개연(慨然)히 말이 없다가 지필(紙筆)을 가져다 두어 마디 말을 적어서 서로 보일 뿐이었다.

 

이때에 간하던 많은 사람이 모두 죄를 입자, 광해조 정승 한효순(韓孝純)이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할 적에, 참판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말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하고, 사절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니, 죄에 걸려 파직을 당하였다.


공은 평생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 한원(翰苑)에 있을 적에 동료 중에 정여립(鄭汝立)을 추천하는 자가 있었지만, 공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사람의 명예가 날로 높아져서 온 세상에 따르는 자가 많았지만, 공과 집의(執義) 이경중(李敬中)만은 취하지 않았다.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추천한 자는 모두 죄를 입었지만, 공은 인정을 받아 선조가 매우 의지하고 신임하였다.

 

이분의 이력을 기술하면,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성균관의 전적ㆍ직강ㆍ사예, 호조 좌랑,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좌랑ㆍ정랑, 시강원 사서ㆍ문학(文學)ㆍ필선(弼善), 사간원의 정언ㆍ헌납, 사헌부의 지평ㆍ장령ㆍ집의, 홍문관의 부수찬ㆍ수찬ㆍ부교리ㆍ교리ㆍ응교ㆍ지제교를 지냈다.

 

정유년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후에는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 호조의 참의ㆍ참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사헌부 대사헌, 예조 판서, 도총부 도총관, 외직에 전보된 것이 통진ㆍ나주 두 고을, 방백으로 부임한 것이 황해ㆍ전라 등 도관찰사 두 번이었다. 부인은 최씨인데 관향은 전주로 사간원 헌납 최극성(崔克成)의 손녀요, 공조 정랑 최말(崔沫)의 딸이다.

 

부인은 평생에 말을 급하게 하거나 얼굴빛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비복(婢僕)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꾸짖은 적이 없었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에는 이미 벼슬이 높고 번창한 집안이었어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만들어서 봉양하였으며, 정경부인에 봉하여졌다. 가정(嘉靖) 30년(1551, 명종 6) 11월 3일에 태어나 만력(萬曆) 48년(1620, 광해군 12) 11월 19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70세였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풍덕 군수(豊德郡守) 권신중(權信中), 의금부 도사 권필중(權必中), 연일 현감(延日縣監) 권경중(權景中), 사헌부 감찰 권정중(權正中),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 권근중(權謹中), 호조 좌랑(戶曹佐郞) 권심중(權審中), 진사 권위중(權偉中)이며, 사위는 이조 좌랑 유업(柳?), 형조 참의 이시환(李時煥)이다.

 

군수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대임(權大任), 권대명(權大鳴), 권대식(權大式)인데, 권대임은 옹주(翁主 선조의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 정선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가서 길성위(吉城尉)가 되었고, 사위는 박상빈(朴尙彬)이다.

 

도사는 6남 5녀가 있는데, 아들은 권대덕(權大德), 권대순(權大淳), 권대숙(權大淑), 권대주(權大胄), 권대하(權大夏), 권대화(權大華)요, 다섯 사위는 최진(崔璡), 이경회(李慶會), 정랑 윤유근(尹惟謹), 좌랑 이창현(李昌炫), 지여관(池汝寬)이다.

 

현감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대복(權大復), 권대장(權大壯)이요, 사위 2인은 현령 유중형(柳重炯), 이덕승(李德升)이다. 사어는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관찰사 권대운(權大運), 현감 권대윤(權大胤), 권대원(權大遠), 권대술(權大述)인데, 대윤은 중부(仲父) 감찰 권정중에게 양자로 갔으며, 사위는 사간(司諫) 이후(李垕), 이시계(李時繼), 송변(宋㺹)이다. 좌랑은 2남 3녀가 있는데, 권대민(權大敏), 권대익(權大益)이요, 사위 3인은 송도응(宋道凝), 이우(李?), 노사민(盧思敏)이다.

 

진사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공산 현감 권대재(權大載)요, 사위는 이담(李墰), 최동로(崔東老), 이명린(李命麟)인데, 모두 생원(生員)이다. 증손과 현손까지 합하면 1백여 인이나 되니, 하늘이 반드시 후덕한 이에게 보시(報施)함이 실로 이와 같다.


공의 훌륭한 공로 중 그 큰 것만을 든다면, 나라가 크게 어지러울 때 온 힘을 다하여 산 넘고 물 건너 4천 리를 돌아다니면서 천자의 위령(威靈)을 감동시키고 대군을 동원, 왜적을 토벌하여 사직(社稷)을 보존한 것이다. 공이 이미 컸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상(上)이 발탁하여 원공(元功)의 서열에 두게 하였다.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당하여 배척을 당한 것이 거의 10여 년이었으나, 얼굴에나 말에 근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아가면 어진 이를 숨기지 않았고 물러서서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았으니, 《주전(周傳)》에 이른바 ‘충(忠)과 의(義)로써 나라와 국민을 구제하고 생을 잘 마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는 것이 공(公)을 두고 한 말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인에 독실하고 / 篤於仁。
순수하고 충성스러워 / 純且忠。


왕실을 위하여 / 勤王室。
몸을 바쳤고 / 致匪躬。


좋은 시기를 당해서는 / 際昌辰。
높은 벼슬에 복록까지 누렸네 / 崇且亨。


이정에 공로를 새기니 / 勒功彛鼎。
그 이름 백대에 전해질 것이며 / 百代之名。


또 저 하늘의 보답으로 / 又其天道之報。
자손이 계속 번성하리 / 子孫之繩繩。

 

[註解]

 

[주01] 기축원옥(己丑冤獄) :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로, 당시 많은 인사가 사사(賜死)되거나 귀양 갔다.

 

[주02] 이정(彛鼎) : 종묘에 사용되는 그릇에 새겨서 그 이름을 잊지 않도록 한다는 데서 인용된 말이다. 《禮記 祭統》

 

기언 별집 제18권 / 구묘문(丘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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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吉昌府院君權公墓誌銘

 

公諱悏。字思省。姓權氏。高麗太師幸之後也。皇曾祖考旭。司䆃寺副正贈承政院左承旨。皇祖考振。典牲署參奉贈戶曹參判。皇考常有至行。宣祖世以繕工監正。特加通政。又以壽耇進同中樞。後推恩追爵領議政,東興府院君。妣安定羅氏。禦侮將軍云傑之女也。追封貞敬夫人。皇明世宗皇帝嘉靖三十二年五月廿四日公生。生有異質。才藝早成。二十四。擢庭試第一人。其明年我昭敬十年。登謁聖乙科及第。選槐院。俄遷藝文館檢閱。辛卯。在諫院。論己丑冤獄。左相澈江界安置。壬辰之亂。上西狩。公爲執義。爭之曰。不可。禮。國君死社稷。大夫死衆。上雖不從。感其言。賜佩劍以賞之。明年。帝遣提督李如松。率南北官兵四萬。克復西京。公以御史。管輸海西,京畿等道蒭粟。時澈復三南都體察使。卽啓上。以公爲從事。彼旣深恨於公。以爲一朝釋憾。身留江華。而遣公南路。治兵事。賊方據京城。南方道不通。人皆曰。此迫人於死地。必死無生還。公曰。主辱矣。人臣義不辭死。無畏色。時提督敗折於高陽。與賊連和。諸路始通。公以御史巡撫湖南。大夫人歿而歸。賊仍居南邊。聲言再擧。丁酉。果益兵臨我。人心大懼。中外擾亂。上選於群臣。公以應敎。特差告急正使。如京師。亦無副介而專任之。公受命。卽行三十日。薄京師。旣上奏。日愬兵部軍門。以國弱賊強。危迫存亡之急。言輒泣下。軍門索地圖。仍回我城池,器械,兵甲,積儲與賊兵屯據要害。公誦地誌。作輿地圖。具列賊路與我殘破狀。開示纖悉。擧無遺策。軍門大悅。以爲賢才。而以至軍吏士立左右者。亦莫不變色歎息云云。卽覆奏。奉聖旨。發南北水陸官兵及山東粟。公曰。事已急矣。調兵遠餽。道里窵絶。必不相及。乞先發遼,廣粟及南兵已在永平者出救。請貿筋角,硝黃以還。於是發南北精兵。至者一萬二千。又大兵繼之。合十四萬人。冬。賊薄畿甸。天兵擊却之。賊仍屯兵海上。築壘相望六百里。大兵皆南下。明年。以戶曹參議。出爲黃海道觀察使。時海右新刳於兵。庶事板蕩。方師旅未定。車騎過者日相接於道。需應萬端。公身勤苦。不失將士心。又撫存不怠。庚子。出爲羅州。當大亂初定。爲治以弛力寬民爲務。三年。入政院。至右承旨。二年。改刑曹參議。明年。復爲戶曹。時議定宣武功臣位次。公在原從。上曰。丁酉却賊捄亂。某功力居多。不宜在原從。命錄元功三等。賜效忠仗義宣武功臣號。秩嘉善大夫。封吉昌君。明年。以大司憲。特加資憲。爲全羅道觀察使兼甄城尹。政刑平而黜陟嚴。金相國瑬。嘗爲屬邑以法逐去。亦不以慍。而以稱曰。廉直無私。有古廉使風云。丁未。入爲禮曹判書。戊申。上登遐。公掌喪禮詔相。光海旣新立。鄭仁弘用事。易置先王公卿諸近臣。公罷禮曹。己酉。以監修太廟。陞正憲。申寅。享新舊功臣。加崇政。進一品。二年。奉使如京師。還。又二年正月廿七日。卒於正寢。春秋六十六。訃聞。賜賻弔如儀。追爵議政府領議政,吉昌府院君。有司治葬事。至成葬。墳墓在富平之水天。公少受學於順川都正琯。得聞修己之方。先府君每以愼交遊勤己奉公爲訓。故公行己必正。交際必愼。行其誼。不顧其利害。立朝四十餘年。一以怠官曠職爲戒。莊重少言語。居處必嚴。兄弟三人。皆至貴顯。比肩於朝。門戶盛大。恒退讓無滿色。一以居簡守禮爲家令。父母已老。每退朝。必侍側。終日事之。猶恐不得盡於懽心。及其居喪。喪事必誠必信。亦猶恐不得盡於禮也。己丑。先公之喪。公在玉堂。侍經筵日久。上令有司恤其喪。恩禮甚厚。莫不曰榮。後官益盛。年至耆艾。必致愛如事存。其有水土佳味。亦非薦不食。一事不敢忘孝也。沒身不衰。有一妹。寡居無子。必同館而爨。一如父母之視之也。兄知樞公年高。事之如事父。凡甘旨之養。衣服溫涼。亦無不順適。每受祿俸。必頒諸親戚之貧者。不以有無問於家。敦厚有容。謙約下士。未嘗言人之過。而喜揚人之善。戊申以來。閉門自守。言不及時事。方疾革。聞廢太妃之議決。猶扶而起。仰天太息流涕曰。人之道滅矣。與兄參判公相對。慨然無與言。取紙筆書數語以相示而已。時諸諫者皆得罪。及光海相孝純率百官庭請。參判公嘆曰。言之徒無益。謝不出。因坐廢。公平生喜讀易。善於知人。嘗在翰苑。有僚友欲以鄭汝立擬薦者。公曰。此人非吉人。終不許。當時。其人名譽日盛。擧世多趨之。唯公及執義李敬中。不取也。及己丑事作。諸薦引者皆得罪。公知遇宣祖甚倚任之。敍其履歷。藝文館檢閱,承政院注書,成均館典籍直講司藝,戶曹佐郞,刑曹禮曹兵曹佐郞正郞,侍講院司書文學弼善,司諫院正言獻納司憲府持平掌令執義,弘文館副修撰修撰副校理校理應敎知製敎。自丁酉使還。政院至右承旨,刑曹參議,戶曹參議參判,漢城府右尹,憲府大司憲,禮曹判書,都摠府都摠管補。外者二。通津,羅州。任方面者二。黃海,全羅等道觀察使。夫人崔氏。籍全州。司諫院獻納克成之孫。工曹正郞沫之女也。夫人平生無疾言遽色。雖婢僕下賤。未嘗以罵詈加之。事舅姑。家已貴盛。必躬執烹餁以養。封貞敬夫人。嘉靖三十年十一月三日生。萬曆四十八年十一月十九日卒。享年七十。生七男二女。男豐德郡守信中,義禁府都事必中,延日縣監景中,司憲府監察正中,翊衛司司禦謹中,戶曹佐郞審中,進士偉中。二壻。吏曹佐郞柳?,刑曹參議李時煥。郡守三男一女。男大任,大鳴,大式。大任。尙翁主。爲吉城尉。壻朴尙彬。都事六男五女。男大德,大淳,大淑,大胄,大夏,大華。五壻。崔璡,李慶會正郞。尹惟謹佐郞。李昌炫,池汝寬。縣監二男二女。男大復,大壯。二壻。縣令柳重炯,李德升。司禦四男三女。男觀察使大運,縣監大胤,大遠,大述。大胤爲仲父監察正中後。三壻。司諫李厚,李時繼,宋㺹。佐郞二男三女。男大敏,大益。三壻。宋道凝,李?,盧思敏。進士一男三女。男公山縣監大載。三壻。李墰,崔東老,李命麟。皆生員。至曾玄之世。凡二百餘人。天之報施。必於厚德者。信如是也。公之賢能功業。列其大者。方國家大亂。能勞身竭力。跋涉四千里。動天子威靈。出兵伐賊。社稷不亡。功旣高矣。亦不自言。上擢置元功之列。及光海政亂。擯斥且十數年。亦未嘗慼慼於色辭。進不隱賢。退無怨尤。周傳所謂忠義以濟寬樂善終者。公有焉。銘曰。

篤於仁。純且忠。勤王室。致匪躬。際昌辰。崇且亨。勒功彝鼎。百代之名。又其天道之報。子孫之繩繩。<끝>

 

기언 별집 제18권 / 구묘문(丘墓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