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송천서원 추배 삼현소(松泉書院 追配三賢䟽)。

代淸州儒生等。請額松泉書院。追配三賢䟽。 이하곤『澹軒 李夏坤, 1677년(숙종 3) ~ 1724년(경종 4)』 伏以崇儒重道。王者之先務。褒行尙節。有國之令典。是故聖王之御世也。苟有名德之士。可以羽翼斯道。矜式一世者。則必表章崇報。如恐不及者。盖所以風當時勵後學也。惟我國家。以文爲治。其宗儒術㫌孝義者。逈出百王。故雖窮鄕下邑之士。一節一行。卓有可觀。則無不沾被褒嘉之典。是以列邑之間。先賢俎豆之所。比比相望。而其得賜恩額。列于祀典者。又不知其幾何。祖宗朝右文尙賢之意。於是尤可見矣。豈不猗歟盛哉。臣等所居之地。素稱湖左名州。而節孝之士。篤學之儒。無代無之。若麗之按廉使臣金士廉,本朝之參贊贈諡平度公臣崔有慶,觀察使贈諡孝靖公臣李貞幹,司諫臣朴光祐,處士臣李之冲,贈左承旨臣趙綱,處士贈左贊成臣李大建。尤其表著者也。今臣等略擧其平日言行。以備殿下之澄省焉。士廉其文學行誼。爲一時衣冠之眉宇..

학사 김응조 선생 문집(鶴沙金應祖先生文集)

■학사 김응조 선생 문집(鶴沙金應祖先生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 김응조『金應祖, 1587년(선조 20) ~1667년(현종 8)』 선생의 학사선생문집(鶴沙先生文集) 목판본(木板本) 全6冊中 4冊(권1, 권7~8, 권9~外集, 연보 부록 등)의 문집이다. 권두에 歲丙申秋八月上浣韓山後人李象靖序와, 외집 말미에 崇禎後三甲午(1774)...李世澤의 跋이 있다. 크기> 20 × 31.5cm이다. 김응조(金應祖)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아헌(啞軒)이다.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피해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1623년 인조..

서촌집(西村集)

■ 이경창(李慶昌) [생년] 1554년(명종 9) [졸년] 1627년(인조 5) [본관] 문의(文義) [저작] 『서촌집(西村集)』.『원리기설(原理氣說)』·『천인설(天人說)』·『주천도설』 개성 출신. 본관은 문의(文義). 자는 언급(彦及), 호는 서촌(西村). 유학자 이양세(李揚世)의 아들이다. 12세 때부터 외할아버지 밑에서 철리(哲理)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에 심취하여 경전(經典)·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고, 만년에는 특히 『주역』을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천도설(周天圖說)』에서 논급한 주천설은 그의 우주관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제작, 시험하였다고 전하여지는 선기옥형(璿璣玉衡)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제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저서에 『서촌집(西..

고려국 조위 묘지(高麗國 趙瑋 墓誌) - 이곡(李穀)

고려국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상호군(僉議贊成事上護軍) 평양군(平壤君) 조공(趙公)의 묘지(墓誌) [생졸년] 조위『趙瑋, 1287년(충렬왕 13) ~ 1348년(충목왕 4)』 / 향년 62歲 옛날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이 해내를 통일하고 나서 요황(要荒)을 회유할 적에, 우리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이 귀부(歸附)한 것과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근로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은전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의 딸을 충렬왕(忠烈王)에게 이강(釐降)하였으니, 그 이실(貳室)의 은혜와 삼접(三接)의 총애는 천하에 비할 곳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현능한 자들이 한꺼번에 나와 분주히 보익하면서 삼한(三韓)의 기업을 크게 빛냈는데, 그중에서도 정숙(貞肅) 조공이 특히..

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년(순조 27) ~ 1899년(고종 36)』 증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성균 생원 야암 선생 김공의 묘갈명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生員野庵先生金公墓碣銘-서문 병기) 야암 선생 김공은 휘가 임(㶵)이고 자(字)가 수이(受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의성군(義城君) 석(錫)이 수봉(受封)한 조상이다. 그 뒤로 대대로 봉작(封爵)이 이어졌으니, 용비(龍庇)는 태자 첨사(太子詹事), 의(宜)는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태권(台權)은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을 지냈으니, 모두 고려의 사적에 드러나 있다. 거두(居斗)는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한계(漢啓)는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탁영 김일손 선생 신도비명 - 尹鳳朝。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신도비명(墓碣銘) 홍문관제학 윤봉조(尹鳳朝)가 짓고 부제학 퇴어당 김진상이 쓰고(副提學退漁堂金公鎭商書)。 관찰사 지수재 유척기가 전액을 쓰다.(觀察使知守齋兪公拓基篆)。 연산군 시대 무오 사화(戊午史禍)에 대하여 지금까지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목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탁영(濯纓, 김일손의 호) 김 선생(金先生)을 수위로 삼는다. 선생은 하늘이 진정 낳은 분인데, 이미 낳아 놓고서 또 죽이다니, 하늘은 도대체 무슨 까닭에서인가? 아! 선생의 문장과 절의(節義)는 우주에 꽉 찰 정도여서 동방(東方)의 편협한 곳에서는 용납하지 못할 바였기에, 선생은 미칠 수 없어 그렇게 되었음인가? 대저 선생은 사관(史官)이 되어서 일찍이 그 스승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 김공(金公)..

윤행임 묘지명(吏曹判書贈領議政尹公行恁墓誌銘)

[생졸년] 윤행임『尹行恁, 1762년(영조 38)~1801년(순조 1) / 40세』 이조판서 증 영의정 윤공 행임 묘지명(吏曹判書贈領議政尹公行恁墓誌銘)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정조)께서 승하하신 이듬해 신유년(1801)에 이조판서 석재(碩齋) 윤공(尹公)이 조정에 머무르는 것이 편치 못하여 호남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얼마 후 더욱 맹렬한 화를 만나 유배지 신지도(薪智島)에서 돌아가셨다. 61년이 흐른 신유년(1861)에 공의 아들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치사한 봉조하공(奉朝賀公)이 흰옷과 흰띠로 처음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슬픔을 머금고서, 공의 언행과 조정에 벼슬하던 본말을 기록하여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나는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나는 ..

연행증유(燕行贈遺)

自草廬君之以其學鳴吾黨之中。始有通方之士。而有司者束其格而繩之。彼雅有所習於己者。剽浮艶而襲陳腐。自以爲至矣。一朝操取舍之柄。而所見者與所習者楚越其矩矱。則彼安肯甘心而點頭哉。甚者瞋目而怒且罵曰胡以是干我也。彼誠自信其所習。而怒與罵爲用進取者。能無犯於怒與罵。不自窘其步武則天窘其步武者也。草廬君則不然。所立卓卓。絶不爲世俗之態。彼何有於斯。易其所好而徇其所不好哉。草廬君之能。不售一國之所習也。一國之所習售。如草廬君何。余不知造物者之意。必窮草廬君乎抑否耶。不得於一世。以俟後世。不得於一國。又將何竢。嗚呼。是不有天下之大乎。不得於此。未必不得於彼。行矣哉草廬君。惡乎知匠石伯樂之不在於上黨之國耶。聊以草廬君卜之也。草廬君之名。不聞於中朝。是天下亦無有水鏡之才也夫。草廬君余識之二十年矣。始者嶺南遊。以其地饒英俊之産。若文與行孰爲愈。皆曰莫先草廬君。余私心竊異之。士生乎今之世。不蔽其美。有一二..

좌의정 춘성부원군 남이웅(南以雄) 묘지명 병서

[생졸년] 남이웅『南以雄, 1575년(선조 8) ~ 1648년(인조 26) 좌의정 춘성부원군 남이웅(南以雄) 묘지명 병서(左議政春城府院君南公墓誌銘 幷序) - 성호 이익 좌의정 춘성부원군 남공 묘지명 병서(左議政春城府院君南公墓誌銘 幷序) 근세에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만큼 인물에 대한 품평을 잘하는 이는 없다. 선생이 찬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남 상공(南相公)의 신도비(神道碑) 비문은 가장(家狀)에 얽매이지 않고 평소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스스로 기술하여 분명하게 드러낸 실제의 자취가 마치 눈앞의 일인 듯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공은 미목(眉目)이 서글서글하고 정신이 겉으로 드러났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사람들이 풍진 밖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명성에 떠밀려 ..

진산부원군 강맹경의 비음기/묘비명/유허비명

강맹경『姜孟卿,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 -------------------------------------------------------------- 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集賢殿,書雲館事,世子師,晉山府院君,贈諡文景姜公碑陰記。 愚嘗讀記。至孔子不知防墓所在。殯於五父之衢。問於曼父之母。然後得合葬於防。未嘗不疑其誕妄也。歲戊寅春。謁仲父墓於晉之班野洞。見堂兄文景所記先塋之次于碑陰。一日。謁公請其故。公曰。備忽忘也。夫孝子之於親。不敢斯須違離。天性也。及其歿也。飯於牖下。殯於客位。祖於庭。葬於墓。其禮卽遠。有進而無退。勢也。夫以卽遠之禮。加之天性之親。固已悲矣。由是而至於親盡。親盡則服盡。服盡則情盡。情盡則塗人也。塗人而求無忽忘焉。難矣。是亦可悲也已。吾嘗試與世之人語矣。其田廬贓穫。則必曰此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