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신도비명(神道碑銘)

야촌(1) 2022. 6. 1. 13:52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신도비명(神道碑銘)

 

선생은 휘는 현광(顯光)이고, 자는 덕회(德晦)고, 별호는 여헌이며, 성은 장씨(張氏)이다. 고려의 상장군(上將軍) 김용(金用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시조. 본성은 장(張))이 처음으로 옥산(玉山)에 본적(本籍)을 두었다.


12세(世)에 와서 부윤(府尹)인 장안세(張安世)가 있었으며, 부윤은 좌윤(左尹) 장중양(張仲陽)을 낳았고, 좌윤은 장령(掌令) 장수(張脩)를 낳았다. 장수는 곧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선생에게는 6세조(世祖)가 되는 분이다.

 

증조는 증(贈) 좌승지(左承旨) 장준(張俊)이며, 조부는 증(贈) 이조 참판 장계증(張繼曾)이고, 부친은 증(贈) 이조 판서 장열(張烈)이다. 모친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 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따님이다.


선생은 명 나라 숙황제(肅皇帝 세종(世宗) 가정(嘉靖) 33년(1554, 명종9) 정월 계해일에 출생하였는데, 선생이 8세 때에 그 부친이 돌아갔다. 17, 8세에 학문이 이미 통달하고 경술(經術)에 몰두하여 《우주요괄십도(宇宙要括十圖)》를 지었고, 23세에 재주와 학식으로 천거되었다.


허잠(許潛 호는 한천(寒泉), 자는 경량(景亮), 시호는 충정(忠貞))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을 만나서 남중(南中)에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를 묻자, 정 선생이 말하기를,

“공자 문하에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자(顔子) 한 사람뿐입니다. 어찌 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장현광이란 사람이 배움을 구하고 도에 뜻을 두니, 후일에 우리의 스승이 될 사람입니다.”

하였다.

 

28세에 모친이 별세하였는데 상제수록(喪制手錄)한 것이 있다. 유 문충공(柳文忠公 문충은 유성룡(柳成龍)의 시호, 호는 서애(西厓), 자는 이현(而見))이 여러 번 상에게 추천한 일이 있었는데, 서로 상면하게 되자 아들 유진(柳袗)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만력(萬曆) 22년(1594, 선조 27) 봄에 예빈 참봉(禮賓參奉)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또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1595, 선조 28) 특별히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

 

문인 정사진(鄭四震)이 출처(出處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집에 있는 것)에 관한 의의를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배워서 학식이 넉넉하면 벼슬하고 예우로 대우하면 벼슬하고, 가세(家勢)가 구차하고 부모가 연로하면 벼슬하는 것이다. 벼슬하지 않는 것에도 두 가지 수치가 있다.

 

제 몸만을 깨끗이하고자 하여 대륜(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 한 가지 수치요, 짐짓 그 명성을 위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것이 두 번째의 수치이다.”

하였다.

 

현령이 되자 부로(父老)들과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모임을 약조하고, 각자 백성의 고통과 부실한 것들을 말하게 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효제(孝弟)를 도탑게 하고 염치(廉恥)를 권장하고 덕행을 높이고 패속(敗俗)을 일소하였으니, 모두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옮기는 큰 모범이었다.

 

2년 만에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돌아오니, 임의로 관직을 버렸다 하여 법으로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경연관(經筵官)이 상에게 아뢰어 곧 석방되었다. 그해 여름에 영양(永陽 영천의 옛 이름)의 입암(立嵒)의 천석(泉石)을 유람하였다.


만력 29년(1601, 선조34)에 상이 경서(經書)의 교정을 명하였는데, 선생이 부름을 받았다. 현과 도에 명하여 말을 공급하도록 하였고, 연이어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어 《주역(周易)》의 교정에 참여하였고, 형조 좌랑에 옮겨졌으나 사양하고 돌아왔다. 만력 31년(1603, 선조 36)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몇 달이 못 되어 읍에 변이 생기자 스스로 죄상을 탄핵하고 돌아왔다.

 

만력 36년(1608, 광해군 즉위년) 광해(光海)가 새로 왕위에 오르자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제수되고, 만력 38년(1610, 광해군2)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력 43년(1615, 광해군7) 관의(冠儀)를 편수하였다. 만력 48년(1620, 광해군12)에 정 선생(한강(寒岡)을 말함)이 별세하자 선생이 여러 제자(弟子)와 상례(喪禮)를 강론하였다.

 

가을에 현황제(顯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승하하자 선생이 항곡(巷哭 거리에서 곡함)하고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이 임진년(1592, 선조 25)과 계사년(1593, 선조 26)의 난리를 만나면서도 부자가 각각 도리를 다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가 황제의 힘에 의한 것이다.”

하였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3년(1623, 인조 원년) 인조대왕이 큰 난을 극복하고 제일 먼저 초야에 숨은 선비를 찾았는데, 선생이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늙었다는 것으로 사직하자 특별히 성균관 사업(司業)을 제수하였다.


국조(國朝)에 처음에는 이런 직제가 없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특별히 징사(徵士)를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다시 지평으로 제수되었으나 중도(中道)에서 병이 나서 사직하였다.

 

다음해(1624, 인조2) 봄에 승급되어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상이 남으로 파천했다가, 이괄이 죽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이 행재소(行在所)까지 이르지 못하고 어가(御駕)를 뒤좇아 도하(都下)에 이르니, 또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상이 불러들여 정치하는 법을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것은 전하께서 오직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 칭찬하고 예물을 후히 하사하였다.

 

곧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선생은 소(疏)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서 ‘공검(恭儉), 절용(節用), 돈덕(敦德), 생형(省刑)할 것’을 아뢰고 조정에 나아가 사례하니, 상이 또 불러들여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부합하기 어려움을 말하였다.

 

선생이 이에 아뢰기를,

“예부터 변화시키지 못할 인심은 없으며, 돌이키지 못할 세도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서로 더불어 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다시 이르기를,

“중외(中外)의 인심이 원망이 많은데 어떻게 대처해야겠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온 나라 백성이 지난날의 잔인하고 횡포한 정치(광해군의 정치를 말함)로 곤경에 빠져서 그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소생되지 못하고 있는 차에, 도성에서는 새로 큰 난을 겪었으므로 소란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서로 의심만 품고 있습니다.

 

상께서 이들을 가엾게 여겨 지극히 슬퍼하시는 전교를 내리시고 이들의 어려움을 성심으로 도우려는 뜻을 보이신다면 인심은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을 모시고 있는 사람 중에서,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다.”

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큰 법도 안에서 은연중에 감화되게 한다면 모반을 꾀하는 자는 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도성(都城)은 사방(四方)의 중심이 되는 곳이니, 성 백성이 안정되면 사방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높이 여겨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특히 공조 참의에 제수하고 이르기를,

“이것이 작은 관직이라 하여 사양치 말라. 마땅히 크게 등용하리라.”

하였다.

 

후일에 특명으로 주강(晝講)에 입시하였고 강이 파하자, 세자가 뵙기를 청하고 빈례(賓禮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예우함)로 대우하였다.

 

물러 나와서 상소로 돌아갈 것을 아뢰고 즉시 떠나니, 상이 잇달아 명을 내려 뒤쫓게 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떠난 뒤였으므로 기성(圻省 경기도 감영(監營))에 명하여 말을 공급하여 호송토록 하였다. 이 뒤로 이조 참의, 동부승지 등을 연이어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계운궁(啓運宮 원종비(元宗妃)의 궁호(宮號))의 상을 만났는데 마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에 들어가 사례하고 상소로 사직하였으나, 도리어 대사헌에 옮겨 제수되었다.

 

잇달아 상소하여 간곡히 사직하고자 하니, 세 번 고(告)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졸곡(卒哭 초상 뒤 3개월 만의 강일(剛日)에 지내는 제사)을 마치고 떠날 무렵 상소하여 건극(建極)의 근본을 아뢰고, 또 이어서 아뢰기를,

“뜻이 낮으면 도(道)도 낮은 것이요, 도가 낮으면 사업(事業)이 낮으며, 사업이 낮으면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웃 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천지(天地)ㆍ귀신(鬼神)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상이 불러 보니, 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관해서 수백 언을 올렸다.

말을 마치고 나오니, 상이 전송하면서 이르기를,

“세자를 가르치라.”

하자, 선생이 세자에게 고하기를,

“세자께서는 옛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던 나이가 되셨습니다.

 

학문하는 데는 뜻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해(1627, 인조5)에 오랑캐가 침략하자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의 명을 받았다. 뒤에 오랑캐가 물러가자 상소하여 정치의 폐단에 대해 진술하고, 이어서 ‘사리 편사(私利偏邪)’에 관한 경계문을 지어 바쳤다.

 

8년(1628, 인조 6)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환란을 잊지 않으며 기울어지는 것을 잊지 않으신 뒤에야 군도(君道)를 다할 수 있으며, 조정의 신하는 자신을 잊고 집을 잊고 사사로움을 잊은 뒤에야 신도(臣道)를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덕행이 많은 원로(元老)로 늘 그대와 함께 조정에 있고 싶은데 되지 않으니, 어찌 과인이 우둔하고 정성이 부족한 탓이 아니리요?

 

경을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삼아 세자를 교육하려는 것이요, 정무를 맡기려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10년(1630, 인조8)에 또 대사헌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이 장묘(章廟 원종(元宗))를 추존(追尊)하자는 논의를 하자, 선생은 추존함이 예(禮)가 아님을 상소하기를,

“손자로서 조부를 계승하는 것은 끊긴 것을 이어 주는 상도(常道)입니다.”

하였다.

 

12년(1632, 인조10)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5월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상(喪)을 당하자 상소하기를,

“양음(亮陰 천자(天子)가 부모상을 당해 복(服)을 입는 것) 중에는 지극한 덕을 충만히 기르고 큰 근본을 세워서 기천영명(祈天永命)하는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해(1633, 인조11) 7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자 선생이 상진(上震)하진(下震) 16()를 올려 스스로 반성하고 수양할 계훈(戒訓)을 진술하였다.

 

14년(1634, 인조12)에 특별히 자헌대부로 승급되고, 곧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양하였다. 당시에 장묘(章廟)를 부묘(祔廟)하는 일로 쟁론(爭論)한 사람들이 모두 죄를 입자, 선생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낳아 주신 부모에게 효성을 드리는 성의(誠意)는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예에 지나침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묘하는 것은 예로부터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는 것이니, 이러한 처사는 효도하려다가 효를 상하게 하고 인(仁)하려다가 인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다음해(1635, 인조13)에 우참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년(1636, 인조14)에 지중추부사에 임명하고 상의 부르심이 있었는데 예의가 지극하였다. 선생이 중로에 병으로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약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조정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폐단(弊端) 수백 언을 아뢰기를,

“우주간에 도리(道理)는 하나뿐입니다. 선악이 각각 한 유(類)가 되고 사정(邪正)이 각각 한 유가 되며, 시비(是非)가 각각 한 유가 되는 것이니, 선악ㆍ사정ㆍ시비가 병립(並立)ㆍ병작(並作)ㆍ병행(並行)하면서 이 도리와 이치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건극(建極)을 다하지 못하여 모든 신하들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해 12월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변이 일어났다. 선생은 행조(行朝)가 막히고 명이 시행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주군(州郡)의 부로에게 알려 각각 거병(擧兵)하여 임금을 뵙게 하였으며, 또한 재력을 내어서 군량을 도왔다. 17년(1637, 인조15) 2월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선생은 선인(先人)의 묘소를 하직하고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살았다.

 

입암은 동해(東海)에 위치하고 있는데 입암의 이름을 입탁암(立卓嵒)이라 개명하였으니, 자신의 소신을 붙여 이름한 것이다.


7월에 문인에게 심의(深衣)를 짓도록 명하고 9월 임신일에 선생이 만욱재(晩勖齋)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4세였다. 그 전날 저녁에 뇌우(雷雨)가 크게 몰아쳐서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범람하였다.

 

상이 부고(訃告)를 듣고 조회와 민간의 저자를 이틀간 파하도록 하였으며, 본도(本道)에서 상사를 돕게 하였다. 을미일에 발인(發引)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 상여를 따르는 선비가 5백여 인이 넘었으며, 상이 특히 사제(賜祭)하였다.

 

그해 12월 계유일에 금오산(金烏山) 아래 오산동(吳山洞 지금의 오태)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전(前) 부인인 정씨(鄭氏)는 증(贈) 참찬(參贊) 정괄(鄭适)의 따님으로 일찍 별세하였으며, 따님이 한 분 있는데, 사위는 참봉(參奉) 박진경(朴晉慶)이다.

 

후취한 부인 송씨(宋氏)는 충순위(忠順衛) 송정(宋淨)의 따님인데 선생이 작고하기 8년 전에 별세하였다. 아들이 없어 종제(從弟)인 장현도(張顯道)의 아들 장응일(張應一)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사위 박진경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박기(朴愭)ㆍ박황(朴愰)ㆍ박협(朴悏)ㆍ박증(朴憕)ㆍ박서(朴㥠) 등이며, 박황은 현감이다. 딸이 셋인데 사위는 임경윤(任景尹)ㆍ이현(李垷)ㆍ조하영(曺夏英)이며 이현은 교관(敎官)이다.


장응일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영(張

)ㆍ장건(張鍵)ㆍ장옥(張鈺)이며, 장영은 별좌(別坐)요, 장건은 지평(持平)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임고(臨皐)ㆍ천곡(川谷)ㆍ금오(金烏)에서 모두 제사하였다. 부지암(不知嵒)ㆍ입암(立嵒)ㆍ원당(元堂)에 모두 사당이 있다.


효종 6년(1655)에 경연관 오준(吳竣 호는 죽남(竹南), 자는 여완(汝完))이 상에게 아뢰어 좌찬성에 추작(追爵)되었다.

 

3년 뒤에 경연관 오정위(吳挺緯 자는 군서(軍瑞), 호는 동사(東沙)가 다시 상에게 아뢰어 영의정을 추증하고, 태상(太常)에 명하여 문강(文康)이라 시호(諡號)하였으니, ‘도덕(道德)이 높고 박문(博聞)하여 문(文)이요, 연원(淵源)에 두루 통달하여 강(康)이라.’ 한다.


선생은 깊은 학문과 혼후(渾厚)한 학덕이 쌓여 깊고 넓고 컸으나, 간직하고 숨기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학문이 넓고 덕이 닦여서 가까이는 마음씀과 인륜의 법도, 멀리는 만사 만물의 당연한 이치로부터 미루어 나가 상천(上天)의 무성무취(無聲無臭)의 극(極)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화(和)한 것으로 덕을 이루고 인(仁)으로 물(物)을 이롭게 하였으니,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외로운 사람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하고 말하기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구휼(救恤)하는 것이 천지의 대덕(大德)이요,

 

내 마음의 전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간의 일은 인사(人事)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 없다.”

하고, 경계하기를,

“허(虛)는 만실(萬實)의 부고(府庫)요, 정(靜)은 만화(萬化)의 기틀이며, 정(貞)은 만사(萬事)의 기둥이며, 겸(謙)은 만익(萬益)의 병(柄 손잡이)이요, 검소함은 만복(萬福)의 후함[厚]이다.”

하였다.


인조 때에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자, 상국(相國) 이 문충공(李文忠公 문충은 이정귀(李廷龜)의 시호, 호는 월사(月沙))이 선생에게 시정(時政)의 급선무를 물으니, 선생은 별다른 대답 없이 다만,

“한마디로 오늘날 나라의 큰 근심거리는 남을 의심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국이 물러 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질도다. 시국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다.”

하였다.

 

당시 공신 등이 갑자기 대권(大權)을 얻게 되자 마음속으로 두렵고 미워하여 꺼리는 사람은 모두 없애니, 사대부들이 몸을 도사리고 눈치만을 살피게 되어 인심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선생이 임금을 면대하여 말씀 올린 것도 이런 뜻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생은 저술한 것이 매우 많지만 한집안 사람이나 자제(子弟)라도 이를 알지 못한다. 《역학도설(易學圖說)》, 《도서발휘(圖書發輝)》, 《역괘총설(易卦摠說)》, 《경위설(經緯說)》, 《만학요회(晩學要會)》, 《우주설(宇宙說)》 같은 저서는 선생이 별세한 후에 곧 출간되었다. 또 《우주요괄록(宇宙要括錄)》, 《의사질(疑俟質)》, 《모계문집(耄戒文集)》 등의 저서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넓고 통달한 학문과 / 博達之學
남을 이롭게 하는 어진 마음 / 利物之仁
깊고 두터운 덕이네 / 深厚之德
그윽히 통하고 / 邃而通
화하며 돈독하고 / 和而敦
근엄하며 조심성 있도다 / 儼而翼
아 / 嗚呼
권도가 되며 / 可以權
실행이 되며 / 可以動
모범이 될 수 있도다 / 可以式

 

[주01] 상제수록(喪制手錄) : 연보(年譜)에는 38세 때에 상제수록(喪制手錄)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02] 읍(邑)에 변 : 문묘(文廟) 대성전(大聖殿)의 위판(位版)이 분실되자 직접 확인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

             고, 대죄(待罪)하였다.

 

[주03] 관의(冠儀)를 편수 : 그해 정월(正月)에 아들 장응일(張應一)의 관례(冠禮)를 마치고 선생 자신이 관의(冠

             儀)를 수록하였다.

 

[주04] 인조대왕이 …… 극복하고 :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말한다.

 

[주05] 건극(建極) : 《서경》 홍범에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있는데 그 다섯 번째에 “황극(皇極)으로 세운다.[建

             用皇極]”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이 인륜(人倫)의 모범을 보여 백성들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주06] 옛사람이 …… 나이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

             었다.”고 하신 데서 15세를 말한다.

 

[주07] 오랑캐가 침략 :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말한다. 그해 1월에 청 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침략해 들어왔다.

 

[주08] 기천영명(祈天永命) : 왕이 공경히 덕(德)을 베풀어 하늘에 명을 영원히 보존하도록 빌어야 한다는 뜻이다.

           《書經 召誥》

 

[주09] 상진(上震) …… 16괘(卦) : 《역(易)》의 64괘 가운데 위에 진(震)이 있는 것은 대장(大壯)ㆍ귀매(歸妹)

           ㆍ풍(豊)ㆍ예(豫)ㆍ소과(小過)ㆍ해(解)ㆍ항(恒)ㆍ진(震) 등의 8괘로서 상진(上震) 괘이며, 진이 아래에 있

             는 무망(无妄)ㆍ수(隨)ㆍ서합(噬嗑)ㆍ진(震)ㆍ익(益)ㆍ둔(屯)ㆍ이(頤)ㆍ복(復) 등의 8괘가 하진(下震) 괘

            인데, 이들을 합하여 상진ㆍ하진 16괘라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진괘는 상하 모두에 겹쳐서 계산되었으므로 《주역》에 있는 상하 진괘는 모두 15괘이다.

         이 진괘는 우레의 형상으로 이상의 15괘 모두가 군자의 수신(修身)하고 반성(反省)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주10] 입탁암(入卓嵒) : 《사기(史記)》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 “진(秦) 나라의 세상이 되면 나는 동해(東

            海)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 하였고, 또 “노중련은 제 나라 사람인데 기위(奇偉)

            하고 탁이(卓異)한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탁(卓)이란 글자를 덧붙인 것은 아마

            이 글에서 이끌어 온 듯하다. 후에 중련은 동해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주11] 무성무취(無聲無臭) :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하였는데 이는 천도(天道)를 표현한 말이

             다.  《詩經 大雅 文王》

 

기언 별집 제16권 / 구묘문(丘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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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旅軒張先生神道碑銘

 

先生諱顯光。字德晦。別號旅軒。姓張氏。高麗上將軍金用。始籍玉山。十二世。有府尹安世。府尹生左尹仲陽。左尹生掌令脩。以直道聞。於先生爲六世祖。曾祖贈左承旨俊。祖贈吏曹參判繼曾。父贈吏曹判書烈。母贈貞夫人京山李氏。齊陵參奉彭錫之女也。皇明肅皇帝嘉靖三十三年正月癸亥。先生生。生八年。先府君歿。十七八。學沈通。沈潛經術。作宇宙要括十圖。二十三。以才學被薦矣。許公潛。出牧星州。見寒岡鄭先生。問南中好學之士。鄭先生曰。孔子之門。好學者。顏子一人。此豈易言哉。有張顯光者。求學志道。它日爲我師者。此人也。二十八。母夫人沒。有喪制手錄。柳文忠公嘗累薦於上。及相見遣子袗就學焉。萬曆二十二年春。除禮賓參奉。秋。又除齊陵參奉。皆不出。明年。特敍爲報恩縣監。門人鄭四震。請問出處之義。先生曰。學而優則仕。有禮意則仕。家貧親老則仕。不仕有二恥。欲潔其身。亂大倫一恥也。欲假其名。索其價二恥也。旣之縣。與父老約月朔月半之會。令各言民瘼闕失。補益糾正。敦孝弟。勵廉恥。尊德行。黜敗俗。皆移風善俗之大法也。二年。不樂謝歸。以擅棄官守。以法就理。有經筵官白上。乃得釋。夏。遊永陽,立嵒泉石。二十九年。上命校正經書。先生被召。命縣道給馬。又連被召。皆不就。冬。除工曹佐郞。參周易校正。移刑曹佐郞。謝歸。三十一年。除龍潭縣令。不就。又除義城縣令。數月。邑有變。自劾歸。三十六年。光海新立。除陜川郡守。三十八年。除司憲持平。皆不就。四十三年。修冠儀。四十八年。鄭先生卒。先生與諸弟子講喪禮。秋。顯皇帝崩。先生巷哭曰。東民自壬癸之亂。父父子子得至今日。皆帝力。天啓三年。仁祖克大亂。首訪遺逸。先生以持平召之。辭以老。特拜成均司業。國朝初。無此職。上卽位。特爲徵士設者也。又改持平。中道以疾辭。明年春。陞拜掌令。時李适作亂。上南狩。及适敗死。車駕還都。先生不及行在所。追至都下。又有除命。上卽引見。問爲政。先生對曰。此在殿下一心。振作日新。上稱善。特厚賜之。旋拜執義。先生上疏辭之。仍言恭儉節用。敦德省刑。旣出謝。上又引見。言人心世道之難合。先生曰。自古無不可變之人心。亦無不可回之世道。此在聖君賢相相與有爲而已也。上曰。中外人心多怨。爲之奈何。先生對曰。四方已困於前時殘暴之政。愁痛未蘇。都下新經大亂。騷屑未定。互生疑貳。上下惻怛之敎。以眎勤恤之意。則人心定矣。侍列者。有以反側者爲言。先生曰。令愚民。潛消默化於大度之中。則反側者自安。都城。四方之本。都民定則四方定矣。上爲之尊賜之加厚。特拜工曹參議。上曰。勿辭小官。當大用之。後日。特命入侍晝講。講罷。世子請見。以賓禮待之。旣退。上疏告歸。卽出門。上連有命追之。而先生已發。命圻省給馬護送。此後連拜吏曹參議,同副承旨。皆不就。六年。拜刑曹參判。時有啓運之喪。而適有召命。旣入謝。上疏辭職。移大司憲。連上疏力辭。三告。乃許。旣卒哭臨行。上疏言建極之本。又曰。志卑則道卑。道卑則事業卑。事業卑則人不服。人不服則隣國不畏。天地鬼神。亦不佑矣。明日。上引見。又進天德王道累百言。辭出。上送之曰。見世子有所敎誨也。先生告世子曰。世子年至古人志學之年。爲學以立志爲先云。明年。有虜寇。有嶺南號召之命。寇退。上疏陳政弊。仍進私利偏邪之戒。八年。拜吏曹參判。不就。上疏曰。殿下不忘危。不忘亂。不忘亡。然後可以盡君道。廷臣能忘其身。能忘其家。能忘其私。然後可以盡臣道。上曰。以卿宿德大老。每欲同朝而不可得。豈寡昧誠薄之致也。欲以卿爲上下矜式。敎訓世子。不欲責之以職事。十年。又拜大司憲。不就。時李貴,崔鳴吉等言章廟追尊之議。先生上疏言追尊之非禮曰。以孫繼祖。繼絶之常道云。十二年。又拜大司憲。不就。其五月。有仁穆大妃之喪。上疏言亮陰之中。充養至德。建立大本。以爲祈天永命之本。明年七月。仁政殿震。先生上上震下震十六卦。陳修省之戒。十四年。特加資憲。尋拜工曹判書。又辭疾。時以章廟祔廟之禮。爭論者皆得罪。先生上疏曰。殿下於所生。所以致孝者旣盡矣。而人且疑其過於禮也。況入廟。在古無可據之禮。此欲孝而傷孝。欲仁而害仁也。上不聽。又明年。拜右參贊。不就。十六年。拜知中樞。有召命。禮意甚至。先生至中路。上疏辭疾。上賜之藥物。先生又上疏謝。仍言朝廷不和之弊。累百言。有曰。宇宙間一道理而已。善惡各一類。邪正各一類。是非各一類。善惡邪正是非。未聞竝立竝作竝行。而此道此理不悖者也。殿下之所建極者未盡。而群下不得會其歸也。其十二月。有南漢之變。先生以爲行朝阻隔。命令不行。通諭州郡父老。各擧兵勤王。又出力以助餉。十七年二月。聞南漢解圍。先生辭先人之墓。入立嵒山居。立嵒。在東海上。改名立嵒曰立卓嵒。蓋寓意也。七月。命門人製深衣。九月壬申。先生歿于晩勖齋。年八十四。前夕。大雷雨。山崩川水溢。訃聞。上爲之罷朝巷市二日。使本道庇喪事。乙未。發引返故山。從柩之士五百餘人。上特賜祭。十二月癸酉。葬于金烏山下吳山之洞東向之原。前夫人鄭氏。贈參贊适之女。早卒。有女一人。壻參奉朴晉慶。後夫人宋氏。忠順衛淨之女。先先生八年卒。無男。取從弟顯道之子應一爲後。爲大司成。晉慶生五男。愭,愰,悏,憕,㥠。愰縣監。又三女壻。任景尹,李垷,曹夏英。垷。敎官。應一生三男。?,鍵,鈓。?。別坐。鍵。持平。先生歿。臨皐,川谷,金烏。皆推祀之。不知嵒,立嵒,元堂。皆有祠。孝宗六年。經筵官吳竣白上。追爵左贊成。後三年。經筵官吳挺緯又白上。加贈領議政。命太常賜諡曰文康。道德博聞曰文。淵源流通曰康。先生沈潛渾厚之積。崇深博大。以韜晦自隱爲貴。旣學廣而德備。近而心術人倫之則。遠而萬事萬物之宜。推至於上天無聲無臭之拯。無所不究。和而成德。仁以利物。利物莫先於惸獨。故曰矜鰥寡。恤孤獨。天地之大德。吾心之全體也。又曰。天地間事。無非人事之所當爲者。其戒曰。虛爲萬實之府。靜爲萬化之基。貞爲萬事之幹。謙爲萬益之柄。儉爲萬福之厚。仁祖時先生召至京師。相國李文忠公見先生。問時政先務。先生無他答。但曰。有一言。今者國之大患。在疑。相國退而語人曰。賢乎。可謂善於相時者也。時功臣等暴得大權。心畏惡。所忌者皆殺之。士大夫重足仄目。人心大壞。先生引對進言。多此意也。先生所著述甚多。而雖家人子弟。亦莫之知也。如易學圖說,圖書發輝,易卦摠說,經緯說,晩學要會,宇宙說。先生歿後。乃出。又有宇宙要括錄,疑俟質耄戒,文集諸書。其銘曰。博達之學。利物之仁。深厚之德。邃而通。和而敦。儼而翼。嗚呼。可以權。可以動。可以式。 <끝>

 

기언 별집 제16권 / 구묘문(丘墓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