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도사 이구준 묘지명 병서(都事李耈俊墓誌銘 幷序)

야촌(1) 2022. 6. 1. 15:30

■ 도사 이구준 묘지명 병서(都事李耈俊墓誌銘 幷序)

 

숭정(崇禎) 임오년(1642, 인조 20) 정월 23일, 나의 작은 외숙 도사공(都事公)이 이천(利川) 풍담(楓潭)의 치재(恥齋)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부고를 받고 달려가니, 염(殮)을 하고 입관하지 않은 터라 시신에 기대어 곡을 하였다.

 

물러 나와 가옥을 살펴보니 누추한 좁은 집은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이고,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무릇 상구(喪具)에 관련된 것은 염습에 필요한 의물(儀物)을 비롯해 관곽(棺槨)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교하고 치밀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음죽군(陰竹君, 이성기(李聖基)이 월제(月製)에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뒤에야 외숙의 가정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략동(可略洞) 간좌(艮坐) 언덕에 묘지를 잡아 장사를 지내고 나서 임씨(任氏) 부인을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여묘(廬墓)에서 법제를 지키며 삼 년을 지내고는 허둥지둥 서울로 와서 묘지(墓誌)를 나에게 부탁하였다.

 

가장(家狀)을 살펴보았는데 지나친 말이 없었으니, 또 다시 음죽군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절도가 있음을 알겠다. 이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구준(耈俊)이며, 자(字)는 계천(稽天)이다.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모두 고려 태사(太師) 도(棹)를 시조로 한다.

 

본조에 들어와 지중추원사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은 백세가 된 어머니를 잘 봉양하여 임금에게 특별히 관작을 하사받았다. 이분이 한성부윤 사관(士寬)을 낳았다. 부윤은 전성군(全城君) 예장(禮長)을 낳았다. 전성군은 판결사 시보(時寶)를 낳았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공달(公達)은 양주목사(楊州牧使)이며, 조부 휘 문성(文誠)은 경상좌도 절도사이다.

 

부친 휘 제신(濟臣)은 함경북도 절도사로, 영의정에 추증된 청강(淸江) 선생이다. 모친 목천 상씨(木川尙氏)는 선무랑 붕남(鵬南)의 따님으로, 영의정 진(震)의 손녀이다. 공은 셋째로 태어나 족부(族父) 진사 숭경(崇慶)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생원 정(頲), 참판 창신(昌臣), 직장 양(亮)이 공에게 4대가 되는데, 효정공(孝靖公)의 후손이다.

 

진사공은 참판 수성(隋城) 최승숙(崔承叔)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먼 일가 중에 공을 택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공이 어린 나이에도 효성스럽고 정성스럽게 섬기니, 진사공은 오래될수록 그 소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는 매우 편안히 여겼다.

 

진사공은 일찍부터 큰 뜻을 품었으며, 시(詩)에 능하고 초서를 잘 써서 사우(士友)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런데도 은거하는데 뜻을 두어 양악산(陽岳山) 아래 경치 좋은 곳을 가려 기름진 땅에다 대사(臺榭)를 짓고 원지(園池)를 만들어 아름다운 수목을 심었다.

 

10년 사이에 큰 부자란 칭호를 얻고, 은거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공이 삼가하며 그 업(業)을 지키자 사람들이 가업을 잘 계승한다고 말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가문의 화에 연좌되어 9년 동안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가세가 기울고 전원이 황폐해져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이미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이런 일로 슬퍼하지 않고 산나물과 거친 밥을 먹으며 유유자적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공은 사산감역관에 임명되었다.

 

갑자년(1624)에 어가를 호종한 공로로 상의원 주부로 승진하여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수행하였다. 병인년(1626)에 의빈부 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듬해에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국경을 침범해 오자 서둘러 길을 달려 사이 길을 따라 전주(全州)로 가서 세자를 뵈었는데, 결국 기일을 어겼다고 하여 면직을 당했다.

 

옛집으로 물러나 있다가 얼마 안 되어 맏아들과 여러 자손을 잃었는데,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십여 년 동안 앓다가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첫째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증 참판 계로(繼老)의 따님이고, 두 번째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증 참판 종의(宗毅)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다.

 

임씨 소생으로 아들은 경력 유기(裕基)와 현감 성기(聖基)이며, 딸은 장령 임득열(林得悅), 참봉 이전(李瑑), 사인 조식(趙軾), 권임(權恁), 이련(李堜)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심씨 소생으로 아들은 덕기(德基)와 정기(鼎基)이고, 딸은 사인 오도응(吳道凝)에게 출가하였으며, 한 명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유기는 후사가 없어 성기의 둘째 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성기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행하(行夏), 행은(行殷), 행주(行周)이고, 딸은 송기원(宋基遠), 우숭원(禹崇元), 이상(李尙)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막내는 아직 어리다.

 

덕기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임득열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교(嶠)와 치(峙)이며, 딸은 구감(具鑑)과 최모(崔某)에게 출가하였다. 이전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상경(尙敬)은 선전관이고, 차남은 상면(尙冕)이며, 딸은 민태정(閔泰鼎)과 이원석(李元奭)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막내는 어리다.

 

조식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방언(邦彦)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권임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균(均), 탄(坦), 감(堪), 숙(埱), 육(堉)이며 딸은 김세기(金世基)에게 출가하였다. 이련은 3남을 두었는데, 지웅(志雄), 지호(志豪)이다. 오도응은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성품이 질박하고 온후하였다. 일찍부터 예의의 가르침을 익혀 전후로 부모상을 당해 정해진 제도보다 넘치게 하였다.

 

부모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할 때 공은 유배지에 있었는데, 직접 보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 하였다. 문득 절에 들어가 몇 달 동안 재계하고 소식(素食)을 하다가 일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본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향리에 처해서는 공손하고 삼가하며 몸소 실천하기에 힘쓰니, 좌우의 마을 사람들이 높이며 우러러 보았다.

 

공이 유배에 처해질 때 자제들이 화를 피할 요량으로 이이첨(李爾瞻)의 아들 대엽(大燁)과 왕래하니, 공이 그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매를 때려 고치게 하였으므로, 군자들이 그 기개와 절조를 훌륭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부터 귀가 어두워 스스로 학문에 힘쓰지 못했으나 지조와 행실이 있었으며 만년에 그 집을 ‘치재(恥齋)’라고 이름 하였으니, 품고 있는 뜻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향리에 살 적엔 향리 사람들이 교화되고 / 處於鄕鄕人化。
변방으로 귀양 가니 변방 사람들이 감복하고 / 而纍於塞塞人服。
벼슬길에 나아가자 벼슬아치들이 복종했다 / 而宦於官官人伏。


또 지조와 행실 있어 그 자손을 보호하니 / 而又有志行庇其子孫。
명을 지어 경건히 알리노라 / 而銘以祇告

 

[註解]

 

[주01] 도사 이공 묘지명 : 이 글은 이구준(李耇俊, ?~1642)에 대한 묘지명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계천(稽天)이다.

 

[주02] 월제(月製) : 월제(月制)와 동일한 의미로, 준비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리는 상구(喪具)를 말한다. 《예기》 〈왕제(王制)〉에, “60세가 되면 장만하는 데 1년 정도 걸리는 상구(喪具)를 준비하고, 70세가 되면 한 계절 정도 걸리는 상구를 준비하고, 80세가 되면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는 상구를 마련하고, 90에는 준비해 놓은 물건을 날마다 손보아야 한다.[六十歲制, 七十時制, 八十月制, 九十日脩.]” 하였다.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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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都事李公墓誌銘 幷序

 

崇禎壬午正月二十三日。我叔舅都事公卒於利川楓潭之恥齋。翊聖承訃馳往。斂而未就木也。憑屍而哭。退而觀其家。環堵蕭然。厪芘風雨。枵然無長物。而凡係喪具。自傅身之物以至棺槨。莫不精緻。則陰竹君月製之勤也。夫然後知舅氏於家敎有餘也。旣卜葬于可略洞坐艮之原。祔任夫人于左。事完。守制廬次。三更穀燧。匍匐來京。以幽堂之誌。委重於翊聖。考其家狀。無溢辭。又知陰竹君於其親。孝有節也。乃序之曰。公諱耇俊字稽天。全義之李。皆祖高麗太師棹。入本朝知中樞院事孝靖公貞幹。以善養百世母。特綏寵章。寔生漢城府尹士寬。府尹生全城君禮長。全義判決事時寶。卽公高祖也。曾祖諱公達。楊州牧使。祖諱文誠。慶尙左道節度使。考諱濟臣。咸鏡北道節度使。贈領議政。淸江先生。妣木川尙氏。宣務郞鵬南之女。領議政震之孫。公於倫序第三。出後於族父進士崇慶。生員頲,參判昌臣,直長亮其四代。而出於孝靖公也。進士公娶參判隋城崔承叔之女。無子。擇公於疏派而血其祀焉。公以齠年。事之以孝謹。久而忘其非己出。則甚安之。進士公早有抱負。能詩善草聖。籍籍士友間。而有嘉遯之志。選勝於陽岳山下。占伏腴。築臺榭。開園池。樹佳木。十年之間。有素封之稱。考槃之樂。公斤斤守其業。人謂克家。不幸坐門禍。謫洪原九年。始歸故土。家道旁。爲田園荒蕪。溪山草樹。已不可辨矣。公不以是爲戚。山蔬佐脫粟。怡然自適。癸亥改玉。授公四山監役官。甲子用從駕勞陞尙衣院主簿。洗手奉公。丙寅轉儀賓府都事。其明年建虜犯境。蒼黃奔逬。從間道謁世子于全州。而竟以違期免官。退居舊莊。無何喪冢嗣及諸子姓。悲傷感疾殆十年。遂不起。初娶豐川任氏。贈參判繼老之女。後娶靑松沈氏。贈參判宗毅之女。有四男七女。任出曰男經歷裕基,縣監聖基。女適掌令林得悅,參奉李瑑,士人趙軾,權㶵,李埬。沈出曰男德基,鼎基。女適士人吳道凝。未字。裕基無嗣。以聖基次子爲後。聖基有三男四女。男行夏,行殷,行周。女適宋基遠,禹崇元,李尙。次幼。德基有二男二女。幼。林得悅有二男二女。男嶠,峙。女適具鑑,崔某。李瑑有二男三女。男尙敬宣傳官,尙冕。女適閔泰鼎,李元奭。次幼。趙軾有二男二女。男邦彥。餘幼。權㶵有五男一女。男均,坦,堪,埱,堉。女適金世基。李埬有三男。志雄,志豪。吳道凝有男女。俱幼。公性樸質厚。早服禮訓。前後苴斬。有踰於制。父母墓兆。改卜而窆。公在謫所。痛其不見也。輒投僧舍。齊素數月。聞事完乃復初。處鄕黨。恂恂謹飭。務以躬行。閭左右咸宗仰之。當公被謫。子弟欲爲紓禍計。與爾瞻之子大燁還往。公聞之大怒。至捶楚俾改之。君子多其氣節云。公自幼病聵。不自力於學。而有志行。晩乃以恥名其齋。可見其志之所存也。銘曰。

處於鄕鄕人化。而纍於塞塞人服。而宦於官官人伏。而又有志行。庇其子孫。而銘以祇告。<끝>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