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영창대군 묘지명병서(永昌大君墓誌銘 幷序) 

야촌(1) 2022. 6. 1. 15:00

■ 영창대군 묘지명병서(永昌大君墓誌銘 幷序) 

 

부친을 대신하여 짓다.

 

영창대군이 화를 당한지 11년이 지난 모월(某月) 모갑(某甲)에 예에 따라 이장을 할 때에 임금께서 대군의 행적을 가지고 나에게 명하여 묘지명을 짓게 하였다. 신(臣)은 삼가 의거하여 한두 가지를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공의 휘는 의(㼁)로, 선조(宣祖) 소경대왕(昭敬大王)의 아들이며 모친은 소성정의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 김씨(金氏)이다. 만력(萬曆) 병오년(1606, 선조39) 모월 모갑에 정릉동(貞陵洞) 행궁 정침에서 태어났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으며, 유모의 품안에 있으면서 매일 양전(兩殿)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혹 중궁(中宮)에게만 문안을 드린 경우는 하루 종일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선조가 병이 들어 지팡이를 짚고 다닐 적에는 공이 곁에서 잡고 부축해드리며 차마 곁을 떠나지 못했는데, 선조가 타고난 천성이 유독 순후하다고 항상 칭찬하였다고 한다.

 

선조가 승하할 때에 공은 겨우 세 살로 번번이 슬피 울부짖었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다. 정신과 식견이 비범하고, 노는 것도 여느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궁중에서 해일(亥日)이 돌아오면 채색 주머니를 만들었는데, 공은 그것을 몸에 차려고 하다가 갑자기 내키지 않아하며 말하기를,

“채우지 말라. 듣자하니 선왕께서 지녔던 것으로 법식을 삼는다고 하는데, 선왕께서 이미 지니지 못하시는 마당에 내가 어찌 차마 그것을 찰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공이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자, 곁에서 모시는 자가 그 까닭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선왕께서 하늘에 계시니, 내가 이 때문에 하늘에 절을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왕자 중에 목릉(穆陵)에 제사를 지내러 가면서 인사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나는 언제쯤이면 선왕의 능에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는 슬피 울며 그치지 않았다.

 

궁인이 장난삼아서 공에게 말하기를,

“만일 똥을 맛보면 자전(慈殿 인목대비)이 만수무강 할 것입니다.”

하니, 공은 흔쾌히 맛을 보고,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전이 친히 공에게 《효경(孝經)》을 가르쳐 주었는데, 공은 읽고 나서 바로 외우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훤히 알았다. 일곱 여덟 살 때에는 지식과 도량이 어른 같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변이 일어났을 때 궁중에서 그 일을 숨겼는데, 공은 상황을 살펴 알고서 남몰래 가슴아파해 마지않았지만, 또한 걱정하며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이해 5월에 공은 항상 말하기를,

“하늘이 정한 명이 있다.”

하였다.

 

7월 초하루에 이르자, 공이 시중드는 자에게 묻기를,

“앞으로 스무 하룻날이 되려면 며칠 밤낮을 지나야 하는가?”

하였다.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과연 그 날에 공을 강화(江華)로 옮겨 금고 시켰으니, 그가 조짐을 말해준 것이 기이하다. 그곳으로 옮긴 뒤 아무 달 모갑에 세상을 떠났다.

 

 

아! 계축년의 변고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적신 이첨(爾瞻)이 앙심을 품고 틈을 엿보아 보복을 하려고 한 지가 오래였다. 무신년(1608)에 선조 임금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정인홍(鄭仁弘)과 더불어 모의하여 상소를 올려서 친족을 이간질하였는데, 선조가 그의 간사함을 간파하여 유배를 보냈다.

 

얼마 후에 선조가 승하하자 이첨이 뜻을 얻어 더욱 맺혔던 감정을 풀었으므로, 선조의 자손들이 거의 다 죽음을 당했다. 또 사형수로 하여금 고변을 하게 해서 공의 외가를 풍비박산 내고, 공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이때 공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결국 하늘을 태울 듯한 기염을 번지게 하여 모후를 10년 동안 유폐시켰다.

 

그런데 국운이 다시 새로워지고, 인륜이 다시 펴지게 되어 제일 먼저 공의 원한을 밝히고, 나에게 묘지명을 짓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바로 옛 사람이 동자(童子)의 예로 처우하지 않은 뜻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려서 고아가 된 이 / 有孩而孤。
선조가 남긴 혈육이라네 / 宣考之遺。


어려서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 弱未就傅。
품안에서 떠나지 못했네 / 于懷不離。


잔인한 적신은 / 而賊之忍。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 貨是爲奇。


마음에 달게 여기고는 / 實甘而心。
기강과 윤리 무너트렸네 / 斁紀滅彝。


천지가 크게 새로워져 / 乾坤大革。
일월이 아래로 드리우자 / 日月下垂。


원한과 억울함 환하게 밝혀 / 愍幽昭枉。
성대한 의식으로 내렸네 / 勑賁厥儀。


봉분을 만들고 비석에 새겼으니 / 封穹鐫貞。
왕대비를 위로할 수 있으리 / 庶慰聖慈。


지나는 자들 공경을 표하리니 / 過者其式。
영원히 실추되지 않으리 / 百祀亡隳。

 

[註解]

 

[주01] 영창대군 묘지명 : 이 글은 영창대군 이의(李㼁, 1606~1614)에 대한 묘지명이다.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으로, 선조의 14왕자 중 13번째 왕자이며, 유일한 정궁(正宮)의 자식이다. 역모 연루 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에 위리안치 되었으며, 1614년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손에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주02] 궁중에서 …… 만들었는데 : 궁중에서 가례(嘉禮)나 정월의 첫 해일(亥日), 첫 자일(子日)에 종친과 신하들에게 볶은 황두(黃豆)를 홍지(紅紙)에 싼 복주머니를 나눠주었다. 이 주머니는 첫 쥐날과 첫 돼지날에 만드는데, 쥐와 돼지가 십이지의 처음과 끝이므로 그 해 열두 달 동안의 복록(福祿)을 그 주머니에 담는다는 의미가 있다.

 

[주03] 계축년에 …… 때 :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말한다.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의 옥사라고도 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04] 정인홍(鄭仁弘)과 …… 보냈다 :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선조의 명을 당시 영의정인 유영경(柳永慶)이 받들지 않았는데, 정인홍이 상소를 올려 동궁을 동요시켜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이유로 유영경을 공격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된 일을 말한다. 정인홍이 이이첨과 이경전의 음흉한 사주(使嗾)를 들었다 하여 그들도 모두 멀리 유배되었다. 《宣祖修正實錄 41年 1月 1日》

 

[주05] 사형수로 …… 해서 : 죽림칠우(竹林七友)의 한 사람이던 박응서가 1613년에 조령(鳥嶺)에서 은(銀) 장수를 죽이고 검거되어, 화를 면해 주겠다는 이이첨(李爾瞻)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기 위한 자금 조달 때문에 도둑질을 했다고 허위 진술한 일을 말한다. 《燃藜室記述 卷20 廢主光海朝故事本末》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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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永昌大君墓誌銘 幷序○代家君作

 

永昌大君遘禍之十有一年某月某甲。將改窆以禮。上以大君行錄。命臣欽誌其幽堂。臣謹据而撮其一二。敍之曰。公諱㼁。宣祖昭敬大王之子。母曰昭聖貞懿王大妃金氏。以萬曆丙午某月某甲。誕于貞陵洞行宮正寢。生有異質。在姆懷。日朝兩殿。而或只朝中宮。色不懌者竟日。逮宣廟違豫。扶杖而行。公攀援奉引。不忍離側。宣廟恒稱其得於天者獨厚云。宣廟禮陟。公時三歲。輒號咷哀慕。觀者愍之。神識異常。嬉遊不凡。宮中以亥日縫綵囊。公欲佩之。俄不樂曰。亡縫也。聞以先王所嘗御者爲式。先王已不能御。吾奚獨焉。一日公北向拜。侍者問之故。曰先王在天。吾是以拜天爾。王子有以享穆陵陛辭者。公聞之嘅然曰。吾亦何當拜先陵也。悲泣不已。宮人戲謂公曰。若嘗糞。慈壽無疆。公忻然嘗之不色難。慈殿親授孝經。讀已成誦。通其義。七八歲。智量類長者。癸丑變作。宮中諱其事。公察知之。隱痛不聊。亦自悶嘿而已。是年五月。恒自語曰。九天有命。屆七月朔。公問侍者曰。此去二十一日當消幾晝夜乎。人莫測其意。果於是日。遷公于江華錮之。其告兆矣。異哉。遷之幾月某甲。不淑。嗚呼。癸丑之禍。尙忍言哉。賊臣爾瞻稔怨隙窾。欲得以反之者久。戊申宣廟大漸。與鄭仁弘謀。投疏間親。宣廟廉其奸竄之。未幾宮車晏駕。爾瞻得志。益逞憾。殺宣廟子孫殆盡。又令死囚上變。覆公外家而及于公。公纔八歲矣。遂長其焫天之焰。幽廢母后者十年所。而邦命重新。人紀復敍。首晳公冤。命臣銘之者。卽古人不以童子爲禮之意也。銘曰。

有孩而孤。宣考之遺。弱未就傅。于懷不離。而賊之忍。貨是爲奇。實甘而心。斁紀滅彝。乾坤大革。日月下垂。愍幽昭枉。勑賁厥儀。封穹鐫貞。庶慰聖慈。過者其式。百祀亡隳。<끝>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