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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야촌(1) 2022. 6. 2. 13:08

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李象靖 撰

[생졸년] 1392년(태조 1) ~ 1480년(성종 11)/壽88歲

 

공자가 은(殷)나라에 인자(仁者) 세 사람이 있다고 칭하셨는데, 그중에 죽은 자도 있고 죽지 않은 자도 있었지만 또한 각각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기자(箕子)는 안에서 그 난리를 만나 자신의 명철함을 감추면서 올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으니, 처신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서 특별히 기자의 명이(明夷)를 말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은(耕隱) 이 선생이 아마도 그 경우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은 휘가 맹전(孟專)이고 자는 백순(伯純)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예원(藝苑)에 들어가 세종조(世宗朝)에 사간원 정언, 지제교를 역임하였다. 중년에 시사(時事)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외직에 보임되기를 청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고 소문이 났었다.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 2)에 선생은 63세로 벼슬을 그만두고 선산(善山)의 망장촌(網障村>지금의 구미 고아읍 대망리)에 물러나 있으면서 스스로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로 손님과 벗을 사절하고는 말하기를 “수양에 방애가 된다.” 하였다.

 

또 매달 초하루 아침마다 해를 향해 절하면서 “내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집안사람이나 자제들도 그 속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점필재(佔畢齋) 김공(金公)이 옛 동료의 자제로서 찾아뵙자 선생이 심사를 피력하며 말하기를 “오두막에서 위태로이 죽음을 기다리다 이제 군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툭 트이네.” 하니, 이에 점필재가 선생의 은미한 뜻을 알아차렸다.

 

임종에 이르러서야 자제들도 비로소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선생이 말 없는 가운데 고심(苦心)을 품고서 뚜렷한 자취 없는 중에 정절을 지키어 당신 한 몸으로 강상(綱常)의 책임을 떠맡았으니, 명이의 도에 마땅하지 않겠는가. 또한 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효성을 타고나서 살아 계실 때 부모 섬기는 일과 장사, 제례에 모두 예제(禮制)를 준행하였다. 남을 대함에 공손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으며, 집안의 규범을 매우 엄히 하여 자제들이 말을 타거나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금하였다. 

 

선생더러 빈한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청빈(淸貧)을 자손에게 물려주는데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1392년(태조 1)에 태어나 1480년(성종 11)에 졸하여서 89세의 수를 누렸으며, 선산(善山) 동쪽 연향(延香)의 미석산(彌石山) 서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후세로 장군 이총언(李悤言)의 후손이다.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 이견간(李堅幹)이 선생의 5대조이고, 고조 이대(李玳)는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이며, 증조 이군상(李君常)은 사재감 부정이고, 조부 이희경(李希慶)은 병마도원수이다.

 

선고 이심지(李審之)는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선비 여산송씨(礪山宋氏)는 현령 송인손(宋仁孫)의 따님이고, 계비인 성주여씨(星州呂氏)는 판서 여극회(呂克誨)의 따님이다.

 

선생의 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직제학 김성미(金成美)의 따님으로, 선생의 묘 앞쪽에 장사 지냈다. 아들 순(恂)은 교수이고, 천(惴)은 통찬(通贊)이고, 이(怡)가 있고, 돈(惇)은 주부이다.

 

손자 보원(堢源)은 현감이고, 비원(埤源)은 직장이며, 증원(增源)이 있고, 배원(培源)은 장사랑(將仕郞)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재하지 못한다.

 

선생의 동생 공희공(恭僖公) 이계전(李季專)이 선생의 언행을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유집(遺集) 2권과 아울러 병란에 유실되었으니, 애석할 뿐이다.

 

그러나 점필재의 〈이존록(彝尊錄)〉이 있고, 최인재(崔訒齋)와 이창석(李蒼石) 등 여러 공이 선생을 위하여 찬양하고 서술하였으며, 선산의 삼인사(三仁祠)와 함안(咸安)의 육신묘(六臣廟)에 모두 백세토록 제향하고 있으니, 의리가 인심에 살아 있는 것이 무궁하기 때문이리라.

 

선생의 후손은, 몇 대만에 선산의 종가가 거의 끊어졌으나 영천(永川)으로 옮겨 간 이들이 조금 번성하였다. 먼 후손인 이석화(李錫華) 등이 용계(龍溪)에 별사(別祠)를 건립하였는데, 그 아들 이유룡(李猶龍)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선조의 묘에 묘석은 있으나 글이 없습니다.

 

인재공(訒齋公)이 빗돌 하나를 다듬어 묘아래 묻어 놓았으니 이는 진실로 후인을 기다린 것입니다. 어찌 한마디 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니,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계유, 병자년 간에 / 當景泰癸丙之間。
죽은 자 육신이요 / 死者六臣。
산 자도 육신이라 / 生者亦六臣。
죽은 자는 진실로 본성대로 다한 셈이나 / 死固索性。
살아서 그 뜻 이루기 더욱 어려웠네 / 而生而遂其志爲難。


측간을 바르던 예양(豫讓)도 / 廁溷徒隷。
그 행적 오히려 드러났는데 / 猶是露其跡。
장님 귀머거리 노릇 30년에 / 而託盲聾三十年。
흔적 없어 아는 사람 없었으니 / 泯然人莫能識。
어려운 중 더욱 어려운 일 아니랴 / 又豈非難中之難也邪。

 

[주01] 공자가 …… 칭하셨는데 : 《논어》 〈미자(微子)〉에 “미자는 떠나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 죽었는데, 공자가 ‘은나라에는 인자가 세 분이었다.’라고 말씀하였다.〔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고 하였다.

 

[주02] 주역(周易)에서 …… 것이다 : 《주역》 〈명이괘(明夷卦)〉에, 기자(箕子)가 어지러운 주왕(紂王) 때 국내에 처하여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명철함을 감추어 지조를 지켰으니, 명이의 도에 부합한다는 설명이 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7 〈선산삼인록서(善山三仁錄序)〉에 “경은(耕隱)이 마치 장님이나 귀머거리처럼 살면서 그 뜻을 이루었으니, 이는 또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수난을 겪은 명이(明夷)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경은의 행실을 기자에 견준 선례가 있다.

 

[주03] 시사(時事)가 위태로워지는 것 : 문종(文宗)이 죽고 단종(端宗)이 즉위한 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상황을 말한다.

 

[주04] 선산(善山)의 망장촌(網障村) : 지금의 경북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이다. 이맹전(李孟專)의 묘소도 구미의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재궁동에 있다.

 

[주05] 점필재(佔畢齋) 김공(金公) :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부친은 김숙자(金叔滋)이다.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서 김굉필, 조광조에게 전수해 준 조선 도학(道學)의 연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주06] 옛 …… 찾아뵙자 : 《점필재집》 〈이준록(彝尊錄)〉에, 이맹전이 부친 김숙자(金叔滋)와 항상 왕래하던 동료로 나이가 90여 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말년까지 김종직과 소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07] 선생더러 …… 말하였다 : 방덕공(龐德公)의 일화를 인용하여 청렴함을 나타낸 것이다. 방덕은 후한 때 양양(襄陽)의 교외에서 농사를 짓던 은사(隱士)였다.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며 후세 자손에게 무엇을 남겨 주겠느냐고 하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남겨 주지만 나만은 편안함을 남겨 주니,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다르기는 하나 남겨 주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다. 《高士傳 卷下》

 

[주08] 이계전(李季專) : 1414~1484.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경지(敬止),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1447년(세종29)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좌부승지,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주09] 최인재(崔訒齋)와 …… 서술하였으며 : 인재는 최현(崔晛)의 호인데, 최현은 이맹전의 외손이다. 《인재집(訒齋集)》 권11 〈경은선생사적발(耕隱先生事蹟跋)〉과 습유 〈삼인사적(三仁事蹟)〉에 이맹전의 사적이 자세히 실려 있다.

 

창석(蒼石)은 이준(李埈)의 호이다. 《창석집(蒼石集)》 권12 〈제일선인물지후(題一善人物誌後)〉에 관련 기사가 있는데, 일선은 선산의 별칭이다. 또 이복원(李福源)의 《쌍계유고(雙溪遺稿)》에 이맹전의 시장(諡狀)이 실려 있다.

 

[주10] 선산의 삼인사(三仁祠) :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을 지칭한다. 1628년(인조6)에 창건되어 1694년(숙종20)에 사액받았다. 농암(籠巖) 김주(金澍),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경은 이맹전을 제향하였는데, 이들을 은나라 삼인에 비유하여 삼인사 또는 삼인묘라고 불렀다.

 

[주11] 함안(咸安)의 육신묘(六臣廟) :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조려(趙旅),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이맹전을 생육신으로 제향하였으므로, 이를 육신묘라고 불렀다.

 

[주12] 계유, 병자년 간에 : 계유년은 1453년(단종1)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세조의 본격적인 집권이 시작된 해이고, 병자년은 1456년(세조2)으로,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주13] 측간을 바르던 예양(豫讓) : 예양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 지백(智伯)의 가신이다. 지백의 집안이 조 간자(趙簡子)에게 망하자, 예양은 복수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일부러 죄수가 되어 조 간자 집안의 측간 벽을 바르며 조 간자를 암살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형적을 숨기고 암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었는데, 조 간자조차 그를 충신이라고 인정하였다. 예양의 이런 행위는 사서(史書)에서 공이나 명예 등 보상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충신의 표상으로 칭송되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여기서는 이런 예양도 당시에 명성이 드러났는데 이맹전은 아무도 그의 의도를 알아준 사람이 없었으니,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한 것이다.

 

 

[原文]

 

孔子稱殷有三仁焉。其或死或不死。亦各自靖其身。然箕子內蒙其難而晦其明。以不失其正。所處爲尤難。故大易特言箕子之明夷。我東耕隱李先生。其殆庶矣乎。先生諱孟專。字伯純。早擢第入藝苑。世宗朝。歷司諫院正言知製敎。中年見時事艱危。求補外得居昌縣監。以淸白聞。至景泰甲戌。先生年六十三矣。退老於善山之網障村。自託於盲聾。謝絶賓友曰。修養所忌也。朔朝每向日而拜曰。祈禱己疾也。雖家人子弟。莫識其意也。佔畢齋金公。以執友子弟來謁。先生披露心腹曰。阽死蓬廬。旣見君子。自不覺胷次豁然也。於是畢齋得其微意。至臨沒。子弟始知之。蓋先生抱苦心於不言。葆貞操於泯迹。以一身而任綱常之責。非有得於明夷之道乎。亦可謂仁也已矣。先生誠孝天出。生事葬祭。一遵禮制。待人恭。與物無競。閫範甚嚴。禁子弟不得乘馬從徒。人有言其貧無以遺子孫者。先生曰。以淸貧遺子孫何妨。先生生於洪武壬申。卒以成化庚子。享八十有九年。葬于善山之東延香彌石山西向之原。先生碧珍之世將軍悤言之後。進賢館大提學堅幹爲五世祖。高祖玳。修文殿大提學。曾祖君常。司宰副正。祖希慶。兵馬都元帥。考審之。贈兵曹判書。妣礪山宋氏。縣令仁孫之女。妣星州呂氏。判書克誨之女。配善山金氏。直提學成美之女。葬在先生之墓前。子恂敎授。惴通贊。怡,惇主簿。孫堢源縣監。埤源直長。增源,培源將仕郞。曾玄以下。多不盡載。先生弟恭僖公季專有記先生言行。幷與遺集二卷。失於兵火。爲可惜已。然畢齋有彝尊錄。崔訒齋李蒼石諸公爲之讚揚敍述。而善之三仁祠。咸之六臣廟。皆祠享百世。理義之在人心。蓋無竆焉。先生之後幾世而宗絶。其移于永川者稍繁。遠孫錫華等建別祠于龍溪。其子猶龍謁象靖曰。先祖之墓有碣而無文。訒齋治一石瘞墓下。是固有待於後人。盍惠以一言。象靖不敢辭。銘曰。

當景泰癸丙之間。死者六臣。生者亦六臣。死固索性。而生而遂其志爲難。廁溷徒隷。猶是露其跡。而託盲聾三十年。泯然人莫能識。又豈非難中之難也邪。<끝>

 

대산집 > 大山先生文集卷之四十八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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耕隱李公謚狀 - 李福源

 

公諱孟專。字伯純。號耕隱。始祖諱忩言。高麗功臣碧珍將軍。後世以碧珍爲籍。今之星州也。五世祖諱堅幹。進賢館大提學。嘗咏杜鵑。有啼在山花第幾層之句。遂以山花號於世。故又謂之山花李氏。高祖諱玳。修文殿大提學。曾祖諱君常。工曹典書。祖諱希慶。兵馬都元帥。考諱審之。禮賓寺事贈兵曹判書。妣礪山宋氏。縣令仁孫女。後妣星州呂氏。典工判書克誨女。公以洪武壬申生。早擢嵬第。薦入翰苑。世宗朝爲司諫院正言,知製敎,昭格署令。久之不樂於內。求補居昌縣。以淸白聞。景泰甲戌。退居善山之網障村。自托盲聾。遂不復出門。偃仰一室。不與人接。家人問其故。曰。爲修養也。朔日輒早起。向暾而拜。家人又問之。曰。爲祈禳也。嘗自吟曰。眼欲昏昏耳欲聾。見聞無敏與癡同。曬糓於庭。鷄雀羣來啄且盡。視之漠然如不見。金夫人屢令婢僕試之。竟莫測其眞僞也。一日佔畢齋金公宗直來謁。公懽然延坐。語終日亹亹。金公喜曰。先生之疾庶幾其瘳乎。公曰。非疾之瘳也。旣見君子。自不覺心胷灑如也。金公始察公微意。改容加敬。金夫人竊聽亦大悟。公誠孝出天。生事葬祭。一遵禮經。平居莊重。寡言笑。家法甚嚴。禁子弟乘馬從徒曰。若翁病廢。若曹敢自便耶。家素貧窶。單瓢屢空。處之晏如也。有井名曰竹井。有池名曰菊潭。以自見志。成化庚子終。享年八十九。葬善山府東彌石山西向之原。有碣而無文。從遺意也。配善山金氏。直提學成美女。墓在公墓前。生四男一女。男恂大丘敎授,惴敎導,惇,怡進士。女適輔德朴斯悌。公之弟恭僖公季專。記公遺事。及公所著詩文。皆逸於兵燹。年代寢邈。文獻無徵。仕止本末。言行大致。莫得以詳。然公生於舃奕之門。夙負儁望。晉塗方開。一朝棄而去之。固窮五十年。礭然不改。此其志豈徒然哉。佔畢齋師友錄曰。耕隱先生表裏無瑕。與物無競。中年不樂仕進。退老網障。西崖柳相公成龍嘗語人曰。全其節而晦其跡。使人無得以知其意。此其高人數等處也。蒼石李公埈題一善誌曰。先生貞亮堅苦之節。不但勉強於一時之暫而已。事機未然。燭之已早。離世絶俗。有終焉之志。豈非天以完節畀之。爲一世之防。立人臣之紀者耶。嗚呼。觀於數君子之論。則公之心。公雖不自言。而世固有能言之者矣。粤我肅廟旣建六臣祠。因章甫䟽列嘉公志節。特命院享賜額。再遣禮官致祭。善山之三仁書院。金公澍,河公緯地及公享焉。謂之三仁者。金公去之。河公死之。公之托疾。亦近於佯狂爲奴。世與地相去數千。而自靖之義若合符節也。咸安之西山書院。公與趙公旅,元公昊,金公時習,成公聃壽,南公孝溫享焉。世所稱生六臣者也。謂之西山者。院之後。有伯夷山。感其名而思其風也。聖上御極。治先風敎。闡微顯幽。惟恐有遺。公之後孫猶龍上言丐恩典。有司靳之。上特詢大臣許之。乃贈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五衛都捴府都捴管。仍命賜謚。於是乎公之志節益章矣。國家之褒崇遂極矣。始公之歸老田間。泯然無迹。人之稱公者。但以恬退淸修目之。而視所以察所安。求之心跡之際。得之言貌之外者。惟彼一鄕數君子而已。及夫聖神繼作。淸議漸張。發揮微旨。無復諱忌。而猶未敢顯言于朝也。乃今籲章朝徹。恩誥夕下。俎豆之地。賁以節惠。榮動幽明。士民咸歎。斯固公之苦節淸風。彌久彌光。以徼寵章。而聖朝所以敦尙敎化。扶植名義。以勵千百代爲人臣者。其旨遠矣。謹掇拾諸聞。以俟太常之攷焉。<끝>

 

쌍계유고 > 雙溪遺稿卷之八 / 謚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