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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 선생 묘표(栗谷李先生墓表)

야촌(1) 2022. 6. 4. 06:06

[생졸년] (李珥, 1536년(중종 31) ~ 1584년(선조 17)

 

■ 우찬성 증 영의정 시(諡)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묘표

 

선생은 덕수 이씨(德水李氏)이고 휘(諱)는 이(珥), 자는 숙헌(叔獻)이며 학자들은 율곡(栗谷) 선생이라 일컫는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휘 돈수(敦守)가 그 비조(鼻祖)이다.

 

부친 휘 원수(元秀)는 사헌부 감찰 증 좌찬성이며,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진사(進士) 명화(命和)의 따님으로 영수(英秀)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다.

 

병신년(1536, 중종 31) 12월 26일에 강릉(江陵)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을 낳으려는 날 저녁, 꿈속에서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뛰어올라 방 안에 들어오더니 아이를 안아서 품속에 넣어 주었다. 이 때문에 선생의 어릴 때의 자는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선생은 겨우 말을 배우자 곧 글을 알았다. 5세에 모친 신 부인(申夫人)의 병환이 위독하자 선생은 사당에서 몰래 기도하였고, 7세에는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어 그의 간사함을 공척(攻斥)하였다.

 

13세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했고 약관의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을 배알하여 이기(理氣)에 관해 논변하니, 퇴계 선생이 탄복하고 선생의 설을 많이 따랐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진사시에 고등(高等)으로 합격하고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복시(覆試)와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정언,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에 배수(拜受)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리고 ‘학문의 진전이 없으니 정치에 종사할 수 없다.’라는 뜻을 스스로 진달하고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에 집을 짓고 학도(學徒)들과 경전(經傳)을 강설함으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누차 사인(舍人), 부응교, 전한, 직제학에 배수되었으나 더욱 힘써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서로 소장을 올려 선생을 유임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유임하지 않았다.

 

발탁되어 승지, 대사간, 황해 감사, 부제학, 이조 참의, 전라 감사, 병조 참의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거나 부임해도 오래지 않아 체직하였다. 부제학과 대사간을 맡은 때가 특히 많았다.

 

경진년(1580, 선조13)에는 특별히 대사헌, 예문관 제학에 승진하였으며, 대신의 추천으로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올랐다. 임오년(1582)에는 이조 판서, 우참찬을 거쳐 특별히 우찬성에 배수되었다.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 두 중국 사신이 올 때 선생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두 사신이 경복(敬服)하여 말하기를 “이분이 삼장(三場)에 장원하고 천도책(天道策)을 지은 분입니까?” 하였다. 원접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호변(胡變)이 발생하자 군정(軍政)을 모두 선생에게 위임하였는데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여 상이 흡족한 마음으로 신임하였다. 그러나 군소배(羣小輩)들이 시기한 나머지 해치고자 하여 마침내 선생을 죄망(罪網)에 얽어 넣었다.

 

선생이 상소하여 자핵(自劾)하니, 논자들이 더욱 강경하고 급박하게 선생을 탄핵하였다. 이에 사암(思庵) 박순(朴淳)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상소하여 선생을 구해(救解)하자 양사(兩司)가 이들까지 아울러 탄핵하였다.

 

이에 여론이 더욱 분노하여 태학생(太學生) 및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의 유생 800여 명이 서로 이어 항소(抗疏)하고 수궐(守闕)하여 선생의 억울한 정상을 신변(伸辨)하였다.

 

상이 “이제 유생들의 소장을 보니, 충의(忠義)의 간담이 늠름하여 범할 수 없으니, 참으로 학문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고 횡류(橫流) 속의 지주(砥柱)라 할 만하다.” 하였고, 또 하교하기를 “

 

이이(李珥)를 일러 당(黨)이라 하니, 진실로 군자라면 당이 있는 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 나도 주희(朱熹)의 설을 본받으니,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자 한다.” 하고 친히 교서(敎書)를 지었으며, 박근원(朴謹元) 등 세 사람을 찬축(竄逐)하였다.

 

선생은 해주(海州)로 돌아가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니, 비답에 “아, 하늘이 나의 나라를 평치(平治)하고자 하지 않는구나.” 하였다. 그해 겨울,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하고 하유하기를 “경은 임하(林下)의 일사(逸士)가 아니니, 진퇴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경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기갈(飢渴)보다 간절하다.” 하기에 선생이 부득이 도성에 들어와 사은(謝恩)하고 찬축한 세 사람을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병환이 들고 말았다.

 

병환이 위중할 때 입으로 불러 주고 받아쓰게 하여 북변(北邊)의 방략(方略) 여섯 조목을 올렸으니, 이것이 절필(絶筆)이었다. 가인(家人)의 꿈에 용이 침실에서 날아 하늘로 올라갔고, 그 이튿날 아침에 선생이 운명하였으니, 갑신년(1584, 선조 17) 1월 16일이었다.

 

선생이 조정에 돌아와 정무를 본 지 겨우 60여 일이었고, 춘추 49세였다. 선묘(宣廟)가 애통해하여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며, 부의(賻儀)를 상수(常數)보다 곱절이나 더 하사하였다.

 

우계(牛溪) 선생이 부음을 듣고 곡하며 말하기를 “율곡은 도학(道學)에서 큰 근원을 통견(洞見)하였다. 그가 말한 ‘인심(人心)의 발(發)은 두 근원이 없고, 이(理)와 기(氣)는 호발(互發)할 수 없다.’라는 등의 주장은 모두 실제로 이치를 본 것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요 진실로 산하(山河)의 간기(間氣)로서 삼대(三代) 이전의 인물이다.

 

하늘이 이토록 빨리 빼앗아 가 이 세상에 큰일을 할 수 없게 하였으니, 애통하다.” 하였다.

그해 3월,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선영 곤향(坤向)의 기슭에 예장(禮葬)하였다.

 

유생들이 석담(石潭)의 소현서원(紹賢書院)에 선생을 배향하였고, 또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세워 학문을 닦고 선생을 사모하는 곳으로 삼았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우리 성상이 즉위하신 당초에 이르러 연신(筵臣)들이 선생의 행장 및 저술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진상하니, 성상이 읽어 보고 가탄(嘉歎)하여 선생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여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문성공(文成公)이란 시호가 내렸으니, ‘도덕을 갖추고 박문함〔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정사를 세움〔安民立政〕’을 ‘성(成)’이라 한 것이다.

 

부인(夫人) 노씨(盧氏)는 종부시 정(宗簿寺正) 경린(慶麟)의 따님으로 어질고 지행(至行)이 있었다. 임진년의 변란 때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아비를 잃은 지 8년이다.

 

나의 목숨이 모지니, 구차히 산들 무엇하겠느냐.” 하고 신주(神主)를 모시고 파산(坡山)으로 돌아가 적을 꾸짖다가 선생의 묘소 곁에서 피살되었다. 장지(葬地)는 선생과 같은 기슭〔原〕이고 묘혈(墓穴)은 뒤쪽이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아들이 없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경림(景臨), 경정(景鼎)이고, 딸은 현령(縣令) 김집(金集)의 첩이 되었다.

 

경림의 아들은 제(穧), 거(秬), 칭(稱)이다. 제는 진사이다. 딸은 성의구(成義耈)에게 출가하였다. 경정의 아들은 임(稔), 치(穉)이다. 선생의 학문은 스스로 염락(濂洛)의 종파를 얻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먼저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입언(立言)과 저술이 늘 보통 사람의 의표(意表)를 벗어난 것이어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발명한 것이 많았다. 함양(涵養)한 공부가 깊고 축적한 학문이 두터우며 조예가 정밀하고 실천이 독실한 것이 충실하여 덕행(德行)이 되고 발휘하여 사업이 되었는데 모두 명체적용(明體適用)의 학문이었다.

 

선묘(宣廟)의 지우를 입고 당세의 일을 담당하여 백 년 동안의 퇴폐한 기상을 진작시켜 일대(一代)의 예악(禮樂)을 진흥하려 했다. 그러나 유속(流俗)의 사람들은 선생을 알지 못하고 당의(黨議)가 서로 공격하는 통에 뭇사람이 배척하고 비방하여 선생을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 성상의 결단이 확고하여 선생에 대한 신임이 높아지자마자 선생은 이미 병이 들었다. 연령은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지위는 재상에 오르지 못하여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으니, 하늘이 오도(吾道)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말해 무엇 하리오.

 

정귀(廷龜)는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선생의 행장을 찬술하였으나 감히 세상에 내놓지 못하였고, 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 상공(李相公)에게 청하여 묘갈명을 짓게 하였으나 아직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에 와서 행장이 조정에 올라갔기에 비로소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추증(追贈)과 증시(贈諡)의 은전이 내리게 되었다. 이에 사문(斯文)의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다사(多士)에게 의논하여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

 

파주 사람 전(前) 현감(縣監) 노희천(盧希天)이 산기슭에서 좋은 돌을 얻어서 묘소 앞에 세우는데 제공들이 나로 하여금 그 비음(碑陰)에 새길 글을 짓게 하였다.

[주01] 지주(砥柱) : 중국의 황하(黃河)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곧잘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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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右贊成贈領議政諡文成公栗谷李先生[珥] 墓表。

 

先生德水李氏。諱珥。字叔獻。學者稱爲栗谷先生。高麗中郞將諱敦守。是其鼻祖。考諱元秀。司憲府監察贈左贊成。配平山申氏。己卯名賢進士命和之女。英秀博通經史。以丙申十二月二十六日。生先生于江陵。將誕之夕。夢黑龍騰海入室。抱兒懷中。以故小字見龍。王子便知文字。五歲。申夫人疾劇。先生潛禱於祠。七歲。作陳復昌傳。斥其奸邪。十三。中進士初試。弱冠。謁退溪先生。辨論理氣。退溪歎服。多從其說。甲子。生員壯元。進士高等。及第初試。覆試殿試。皆壯元。拜正言,天曹佐郞,弘文校理。賜暇湖堂。自陳學未進。未可從政。築室于海州石潭。與學徒講說經傳以爲樂。累拜舍人副應敎典翰,直提學。乞退益力。三司交章請留。而不果留。擢拜承旨,大司諫黃海監司副提學吏曹參議全羅監司,兵曹參議。皆不赴。或不久而遞。其爲副學諫長尤多。庚辰。特陞大司憲藝文提學。用大臣薦。拜戶曹判書。兼大提學。壬午。吏曹判書右參贊。特拜右贊成。黃,王天使之來。爲遠接使。華使敬服曰。是三場壯元作天道策者耶。還途拜本兵。癸未胡變。悉以軍政委之。號令明肅。上翕然傾嚮。群小忌而媒孼之。遂傅致文罔。先生上章自劾。論者持之益急。朴思庵淳,成牛溪渾疏陳救解。兩司復竝劾之。於是群情愈憤。太學生及湖南海西儒八百餘人。相繼抗疏。守闕伸卞。上曰。今見儒疏。忠肝義膽。凜凜有不可犯者。誠可謂不負所學而橫流之砥柱也。又敎曰。謂李珥爲黨。苟君子也。不患其有黨。予亦法朱熹之說。願入珥,渾之黨也。親製敎書。竄朴謹元等三人。先生還海州。陳疏乞致仕。答曰。噫。天未欲平治我邦家耶。其冬。特除吏判。諭曰。卿非林下逸士。進退不可自任。望卿之來。不啻飢渴。先生不得已入謝。請還三竄。無何。忽感疾病劇。口號書進北邊方略六條。是絶筆也。家人夢龍自寢房飛上天。翌朝。先生屬纊。甲申正月十六日也。還朝秉政纔六十餘日。春秋四十九。宣廟哀慟。哭音徹於外。賻賜加常數。牛溪先生聞訃。哭曰。栗谷於道學。洞見大原。其所謂人心之發無二原。理氣不可互發等語。皆實見得。眞是吾師。誠山河間氣。三代上人物。天奪之速。不能有爲於斯世。痛矣夫。其年三月。禮窆于坡州紫雲山先兆坤向原。多士配享先生於石潭紹賢書院。又就墓下建紫雲書院。以爲藏修興慕之所。至癸亥。我聖上卽位之初。筵臣進先生行狀及所著聖學輯要。上覽之嘉歎。贈議政府領議政。命大常議易名之典。諡文成公。道德博聞曰文。安民立政曰成。夫人盧氏。宗簿正慶麟之女。賢有至行。壬辰之變。謂家人曰。吾喪所天。八年矣。吾之命已頑。苟生何爲。奉神主歸坡山罵賊。被害於先生墓側。葬同原後穴。事聞旌閭。無子。側室子景臨,景鼎。女爲縣令金集妾。景臨子穧,秬,稱。穧進士。女適成義耇。景鼎子稔,稺。先生之學。自得濂洛宗派。不歷階級。先臻閫奧。立言著說。恒出人意表。多有發前人所未發者。旣養深積厚。精詣力踐。充而爲德行。發而爲事業者。皆明體適用之學。遭遇宣廟。擔當世務。庶幾振百年之頹廢。興一代之禮樂。而流俗不知。黨議相軋。群擠衆咻。使不得安於朝廷。及其乾綱夬決。眷任纔隆。而先生已病矣。年未滿半百。位未躋台鼎。竟未能展布其志。天喪斯文。謂之何哉。廷龜於壬子年間。銓次行狀而未敢發。又請白沙李相公銘于墓而未及豎。逮今狀徹于朝。始乃白于筵中。有追爵贈諡之典。遂與斯文諸公。謀於多士。建碑於神道。州人前縣監盧希天。得石於山麓。樹之墓顏。諸公俾余記其陰。

 

월사집 제49권 / 묘표(墓表)

 

 ↑율곡 이이와 배위 곡산노씨 묘(栗谷 李珥와 配位 谷山盧氏 墓)/합폄(合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