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사적기(事蹟記)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嬰處文稿)/이덕무(李德懋) 著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사적기(事蹟記) 보지도인(寶誌道人)은 소량(蕭梁 소연(蕭衍)이 세운 양(梁) 나라)의 불제자(佛弟子)이니 부처에 아첨하던 그 당시에 고승으로 이름났었다. 그가 죽게 되자 답산가(踏山歌) 1편을 내놓고 도가 높은 제자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내가 입적(入寂)한 뒤에 응당 신라의 명승이 올 것이니 이 답산가를 전하여 주라.”하였다. 과연 수년 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대사가 지공(誌公)의 풍문을 듣고 신라에서 북으로 와 지공을 뵈려 하였다. 그러나 지공은 이미 입적한 뒤라 그 제자가 눈물을 흘려 슬퍼하면서 간수하여 두었던 답산가를 공손히 주고 지공의 계언(戒言)도 전하였다. 두 대사는 공손히 답산가와..

낙정 조석윤 신도비명(樂靜趙錫胤神道碑銘)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62권/우암 송시열 저 낙정(樂靜) 조공(趙公, 趙錫胤)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낙정 조공이 을미년(1655, 효종6) 8월 2일에 별세하였는데, 지금까지 묘(墓)에 비각(碑刻)이 없으므로, 고관(高官)이나 처사(處士)뿐 아니라 하인(下人) 노복(奴僕)들까지도 모두 탄식하기를, “그 사람의 어짊이 어찌 비각을 기다려서 드러나랴.” 하였다. 그러나 오직 공렬(功烈)을 기록해서 그 사람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번에 그의 문제자(門弟子)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비명(碑銘)을 부탁하기에 삼가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니, 조씨(趙氏)는 배천(白川)으로부터 나왔다. 비조(鼻祖) 문주(文胄)는 고려(高麗) 때 상장군(上將軍)이..

정기룡장군 신도비명 병서(鄭起龍將軍神道碑銘 幷序)

송자대전 제164권 >碑 ■ 통제사(統制使) 정공(鄭公) 신도비명 병서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통제사 정공 기룡(鄭公起龍)은 곤양인(昆陽人)이다. 초명(初名)은 무수(茂壽)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공(公)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명(唱名)할 무렵에 선조대왕이, 용(龍)이 종루가(鐘樓街 지금의 종로)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나서 인재를 물색했는데, 공을 얻고 괴이하게 여겨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다.” 고도 한다. 공은 어려서부터 식우지기(食牛之氣 소를 삼킬 만한 기상을 말함)가 있었고 상호(桑弧)를 쏠 적부터 관인(官人)의 양상을 흉내 내어 뭇 아이들을 위복(威伏)시켰으므로 아이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13세에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여묘(廬墓) 살이를 하면서 곡읍(..

최명창신도비명(崔命昌神道碑銘)

■송석 최명창선생 신도비명(松石 崔命昌先生 神道碑銘)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공(崔公) 신도비명 : 서문을 아울러 기록하다. 자헌대부 전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김안국(金安國)이 글을 짓다. 선교랑 전 행홍문관저작 겸 경연설경 춘추관기사관 김로(金魯)가 글씨를 쓰다. 봉렬대부 수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 승문원참교 임필형(任弼亨)이 전서를 쓰다. 송석선생(松石先生) 최공(崔公)이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몇 년을 보냈는데, 서울 동쪽 변두리의 쌍계동(雙溪洞)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날마다 소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시를 읊고 지내며 이로 인하여 송석거사라고 자호하였다. 한적한 모양은 마치 청빈하고 질박하여 숨어사는 사람과 같으니, 세상에서 더..

안동판관 김성경 유허비(安東判官金成慶遺墟碑)

■ 안동판관김공유허비(安東判官金公遺墟碑) ◇김성경(金成慶)] [연대] 1789년(정조 13) [유형/재질] 비문 / 돌 [크기] 높이 155cm, 너비 45cm, 두께 20cm [비의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탁본문 소재지] 안동대학교 박물관(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유도원(柳道源) / 이인형(李寅炯) / 미상 ------------------------------------------------------------------------------------------------------------------------------------------- [개관] 이 비는 1789년(정조 13) 경기도 광주에 건립된 안동판관김공유허비(安..

벽오에게 주다[贈 碧梧] - 상촌 신흠

■ 벽오에게 주다[贈 碧梧] 지은이 : 상촌 신흠(象村 申欽) 호서에서 함께 놀던 지난날을 회상하니 / 憶曾湖外共留連 쌍벽 이룬 두 소년 사람들이 칭송했네 / 聯璧人稱兩少年 풍진 속의 갈림길에 다 함께 늙어가는데 / 岐路風塵俱老大 타향에서 다행히도 얼굴 마주 대하네 / 異鄕顔面幸團圓 좋은 자리 헤어질 제 이별 술잔 넘치고 / 瓊筵欲散離觴凸 촛불은 타오르는데 바다 달이 가냘프네 / 蠟燭高燒海月弦 강산이 능히 흥취를 돋운다 말을 마소 / 莫道江山能殢興 고향으로 돌아갈 길 날로 아득하기만 / 故園歸計日茫然 -------------------------------------------------------------------------------------------------------------------..

백사선생에 대한 만사/상촌 신흠

상촌 선생 집 제11권>시(詩)○오언배율(五言排律) ■ 백사 상공에 대한 만사[挽白沙相公] 2수 세상에 남 늦었다 말하지 말자 / 生世休言晩 내 오히려 이 공을 만나보았네 / 吾猶及此公 담박한 흉금 본디 시원하였고 / 冲襟元洒落 툭 트인 풍도 절로 깊고도 높아 / 曠度自深崇 만물 함께 사라져 몸 관계 없고 / 物化身何與 사람 죽어도 도는 무궁하다네 / 人亡道不窮 어쩌다 세상 온 건 꿈이었고요 / 倘來曾是幻 때마침 되돌아가 형적이 없네 / 適去任成空 강물은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 江漢流無盡 기상에 적힌 공적 이미 풍성해 / 旂常績已豐 침문의 통곡 속에 마음 서글퍼 / 傷心寢門慟 머리 들어 서풍을 향해 그리네 / 矯首遡西風 지난해 평구에서 작별할 적에 / 去歲平丘別 땅바닥에 섶 깔고 함께 앉았지 / 班荊..

화산(華山)의 종족

임하필기 제31권>순일편(旬一編)/귤산 이유원 화산(華山)의 종족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측실 나주오씨(羅州吳氏)는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서손(庶孫)이고,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외손인데, 선생에게 출가하여 많은 공이 있었다. 묘명(墓銘)을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그의 후손이 포천(抱川)의 화산에 매우 많이 사는데, 오은군(鰲恩君) 이경일(李敬一)이 서(庶)자를 쓰지 말게 하여 뒤에 혹 천(賤)자를 썼는데, 효정공(孝貞公) 이석규(李錫奎)가 그것도 금하여 더러 하(下)자를 썼다. 내가 종중(宗中)과 논의하여 ‘하’ 자도 아울러 없애도록 하였다.

기성계첩 발(騎省禊帖跋) - 간이 최립

간이집 제3권>발(跋) - 최립(崔笠) ■ 기성(騎省)의 계첩(禊帖) 뒤에 쓴 글 지금 기억하건대, 병란(兵亂)이 일어난 지 몇 해쯤 지났을 적에 최여이(崔汝以) 영공(令公)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계첩(契帖)을 만들어 가지고 나에게 와서 한마디 말을 써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대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대가(大駕)가 이미 환도(還都)해 있었고, 중앙 정부의 기관들도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조(夏曹 병조(兵曹))의 경우는 병무(兵務)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기관들보다도 앞서서 정비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사(四司)의 낭중(郞中)과 원외(員外) 등 8인의 관원이 빠짐없이 갖추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문..

方伯李君養久[李時發] 駐州城

愚伏先生文集卷之一 >詩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方伯李君養久[李時發] 駐州城 相思咫尺望襜帷。坐到松窓月午時。欲說豈無心裏事。多情空與夢中期。春回洞壑花初動。愁入江湖病未醫。何日四邊休練卒。一樽桑落共君持。 時方伯閱武于北川 附方伯次韻 峨冠鳴佩侍經帷。謫下人間又幾時。騷客一春芳草怨。美人千里彩雲期。求賢會見虛前席。活國應須付上醫。自笑疏慵何事業。四年孤節手中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