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최명창신도비명(崔命昌神道碑銘)

야촌(1) 2010. 12. 8. 19:02

■송석 최명창선생 신도비명(松石 崔命昌先生 神道碑銘)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공(崔公) 신도비명 : 서문을 아울러 기록하다.

 

자헌대부 전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김안국(金安國)이 글을 짓다.

선교랑 전 행홍문관저작 겸 경연설경 춘추관기사관 김로(金魯)가 글씨를 쓰다.

봉렬대부 수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 승문원참교 임필형(任弼亨)이 전서를 쓰다.

 

송석선생(松石先生) 최공(崔公)이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몇 년을 보냈는데, 서울 동쪽 변두리의 쌍계동(雙溪洞)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날마다 소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시를 읊고 지내며 이로 인하여 송석거사라고 자호하였다.

 

한적한 모양은 마치 청빈하고 질박하여 숨어사는 사람과 같으니, 세상에서 더욱 그 풍모를 흠모하였다. 가정 15년 병신년(1536, 중종 31) 11월 12일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71세요, 관리들이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음이 보고되자 예관에게 명하여 조제(弔祭)를 극진히 하였고, 부의를 내리셨다. 다음해 4월 13일에 경기도 양주 북쪽 천천리(泉川里)의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정부인 우씨와 함께 모셨다. 장례가 막 끝나고 그 아들 군기시 별좌 천(倩)이 족보와 행장을 가지고 백여리 길을 멀다 않고 와서 묘문을 청하였다.

 

울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신 아버지는 평생 선(善)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질이 강직하여 마음으로 허락하여 칭찬하는 사람이 적고, 오직 공과의 교분이 특히 두터워서 공경하고 중히 여기기를 마지않았습니다.

 

매번 공의 글에 탄복하여 <송석정기(松石亭記)>를 얻어서는 손에서 놓은 적이 없으며, 석연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펼쳐서 두 번 세 번 읽었습니다. 혹시 밤에 볼 때에는 반드시 촛불을 가져오게 하여 문을 닫고 사람을 금하며 의관을 찾아 단정히 앉아서 읽으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공에 대하여 교분이 이미 이와 같았고 그 문장을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만일 공의 글을 얻어 묘소를 꾸민다면 망부도 이를 아시고 지하에서 응당 감동할 것이며, 저의 소원도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나도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 나는 공에 대하여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공을 아는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을 것이 당연하다. 또 공이 일찍이 나에게 <삼상당기(三桑堂記)>를 요청하였는데, 내가 답해주지도 못한 채 공이 갑자기 별세하였으니 깊이 이승과 저승 사이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스러움이라고 여긴다.

 

이제 공의 묘소에 명을 하여 내 슬픔을 조금이라도 풀고, 글을 지체한 죄를 속죄하기를 바라노라. 공의 이름은 명창(命昌)이고 자는 여신(汝愼)이다. 최씨는 본래 황주(黃州)에서 나왔으니, 고려 내봉경(內奉卿) 응(凝)의 후손이다.

 

장(漳)이라는 분이 고종 때에 벼슬하였는데 왕의 조카 영녕공(永寧公) 준(綧)이 몽고에 인질로 들어가는 것을 따라갔다가 뒤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4세손 천보(天寶)에 이르러 고려말엽에 본국으로 돌아와 항상 우리 태조의 정벌을 수행하니 태조께서 재능을 중하게 여기시고, 사촌동생 천계(天桂)의 딸을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즉위하시고 개성을 관향으로 하사하시니 마침내 개성인이 되었으며 관직은 가선대부 한성부윤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이분이 유(濡)를 낳으시니 세조 때에 공훈을 세워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관직이 숭정대부 판중추원사에 이르렀고, 개성군으로 봉작되셨으니 곧 공의 조부이다.

 

후에 아들 윤손(潤孫)의 죄에 연좌되어 봉작이 폐해지고 유배되었다가 별세하였으나 공이 귀하게 되어 다시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선략장군 충좌위 부사과 철손(鐵孫)을 낳으셨으니 바로 공의 부친인데, 역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모친 윤씨(尹氏)는 해평(海平)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시중 석(碩)의 후손이니 증조부는 좌참찬 진(珍), 조부는 경흥부사윤(慶興府司尹) 신(伸), 부친은 찰방 예경(禮卿)이다.

 

공은 성화 병술(1466, 세조 12) 12월 4일에 출생하였다. 용모가 준수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의용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쳐다보면 훌륭한 사람임을 알았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기유년(1489, 성종 2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몸을 상하니 오래도록 과거공부를 폐하였다가 홍치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이르러 마침내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부정자가 되고, 저작, 박사로 승진하였다.

 

그 후에 역임한 관직은 성균관의 전적· 사예, 사간원의 정언· 헌납· 사간, 홍문관의 수찬· 교리· 부응교· 응교· 전한· 직제학, 이조정랑, 개성부도사, 봉상시판관, 사헌부지평, 의빈부경력, 승문원교감, 군자감부정, 안변부사이며,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우부승지, 좌부승지로 승진하였고, 예조참판, 황해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전주부윤, 원주목사이다.

 

부응교가 된 것이 두 번이고 응교를 세 번 지냈으며, 홍문관에서는 경연의 춘추관과 지제교를 겸직하였다. 개성부도사와 안변부사, 전주부윤이 된 것은 모두 어머니가 늙어 봉양하려고 외직을 구한 것이다.

 

안변에 있을 때에는 임기가 안 되었는데, 시종자리에 사람이 없자 전한을 제수하여 소환하였고, 또 일찍이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구하여 성천부사로 추천이 되었는데 임금이 서류를 내려보내며 “최 아무개는 시종의 직임에 합당한데 어찌하여 외직에 임명하려고 하는가?” 하고는 즉시 응교에 임명하였으니, 그 대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도 또한 감격하여 자기 몸을 잊고 시종과 대간의 직에 출입함에 강직한 의론을 기피하는 바가 없었으며, 여러 차례 건의를 올리니 국가에서 많이 채택하여 시행하였다. 예컨대 적전(籍田)은 종묘의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것이니 실로 관계된 바가 중대한데 세월이 오래됨에 민간에서 허가 없이 경작하는 경우가 많아져 군주의 효와 공경하는 체통을 손상시킴이 있으니 전답을 다시 측량하기를 청하였다.

 

또 매년 가을 수확기에는 의례 관원을 보내 여러 도의 농사의 풍흉을 조사하여 그 세금을 높고 낮게 하는데 법이 오래되자 또한 한낱 글귀가 되어버리고 뽑아 보낸 관리도 심상하게 여겨 직접 조사하지 않고, 다만 군과 읍에서 보고하는 것만 가지고 위에 보고하였다.

 

그 속임수가 점점 심해지니 그 때에 별도로 어사를 파견하여 가려내서 조사를 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게 하면, 경계하여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청하니 임금이 모두 이에 따랐다.

 

기묘년(1519, 중종 14) 겨울에 사화가 일어나 관리들과 명사들이 혹은 귀양가고 혹은 파직되어 다 쫓겨나니, 공도 역시 밖으로 척출되어 황해감사가 되었다. 경진년(1520, 중종 15) 여름에 병으로 황해감사를 사임하고 오래도록 서반의 한가한 자리에 있다가 최후로 외직을 구해 원주로 나갔다.

 

백성들이 바야흐로 그 정사가 간결하고 세금이 가벼운 것을 기뻐하였는데, 감사와 법을 가지고 다투다 굽히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한가로이 노닐며 노년을 보냈다.

 

매번 고을을 떠날 때는 짐꾸러미가 한산하였고, 집에 도착하여 노자가 남으면 반드시 따라온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은 반드시 떠난 뒤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공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혹 빈소에 와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가정에서는 검소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고, 길주(吉州)에 원래부터 짓던 농토가 있어서 해마다 나오는 곡식이 자못 넉넉하였다. 나라에서 일찍이 변방을 구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들을 모집하여 곡식을 북도창(北道倉)에 바치고 서울의 면포로 보상하도록 하였다.

 

공은 항상 길이 멀어 제때에 수송하지 못하는 것을 수고롭게 여기고 인하여 창고에 바치고 값을 받으니 쌓인 포목이 벽에 가득하였다. 공은 놀라며 스스로 평소 빈한한 집안이 하루아침에 귀중한 재화를 갑자기 얻는 것을 상서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고 즉시 여러 자손, 친척과 동네의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로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어 집안 친척들과 즐거이 마시며 다 쓴 뒤에야 그만 두었다.

 

거처함에도 집이 없어 항상 남의 집을 빌려 의탁하였으나 또한 이렇다고 집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년에 지은 쌍계의 집도 역시 간신히 몸 하나 들어가 비바람을 가릴 뿐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로 가세가 더욱 빈한하여 해마다 양주창고의 곡식을 사왔으니 사람들이 적창재상(糴倉宰相 : 창고에서 쌀을 사는 재상)이라고 불렀다.

 

성품은 엄하고 장중하여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았고 예법으로 자손을 가르쳤다. 매번 논어를 읽게 하여 몸을 지키는 근본으로 삼게 하였고, 금령을 위반한 의관은 입지 못하게 하였다. 병에 걸렸을 때 자녀에게 이르기를, “한번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니 오랫동안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삶이 이미 족하니 다시 바라는 것도 없다.

 

더구나 부모 곁에 장사지내면 마치 옛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거라. 또 내가 죽으면 염할 때 비단을 사용하지 말고 관곽도 좋은 재목을 쓰지 마라. 장례 시에 회격(灰隔 : 광중과 관 사이에 회를 다져넣는 것)을 하지 말고 제를 지낼 때 유밀과(油蜜果 : 기름과 꿀로 버무린 과자)를 쓰지 마라. 장례를 마치면 곧 반혼해서 조석의 상식을 하지 말고 무릇 예절을 범하거나 넘치는 것은 모두 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아들 천(倩)이 아버지의 뜻이 상할까 걱정하여 하나같이 유언에 따라 감히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성과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비록 집으로 반혼은 하였지만, 여묘를 하며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를 지내서 그 정성을 폈으니 부자간에 각각 그 뜻을 행하였으되 모두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효로써 부모님을 섬겼으니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즐거워하시던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의 생일에도 역시 잔을 바쳐 즐겁게 해 드렸는데 돌아가신 뒤에는 매번 생일만 되면 문을 닫고 슬퍼하며 세속을 좇아 술자리를 갖지 않았다.

 

공의 평생 몸가짐과 사물을 대하는 것은, 선하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행하여 뒤돌아보지도 않고 세상의 숭상하는 것을 구차히 좇지 않으며, 고고히 자신을 믿고 겉과 속을 빙빙 돌려 달리하지 않으니 순후한 옛 풍도가 있었다.

 

조정에 있을 때 일찍이 이름 있는 사람을 가리켜 비판하며, 소인이라고 하였다가 마침내 한번 배척당하여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 사람이 후에 점차 제멋대로 하며 꺼리는 바가 없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선견지명에 적이 탄복하였다.

 

본성이 맑고 깨끗하며 서적을 즐겨보고, 시 읊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능히 많이 마시지만 일찍이 취하여 정신을 어지럽히거나 위의를 잃은 적이 없었다. 여러 번 문과전시(文科殿試)에 참여하여 고과했는데 좋은 선비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저술한 유고가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은 우씨(禹氏)이니 본관은 단양(丹陽), 시중 현보(玄寶)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예문관제학 승범(承範), 조부는 승문원참교 계번(繼蕃)이고 부친은 사과 경조(敬祖)이다. 공보다 17년 앞서 정덕 경진년(1520, 중종 15) 7월 20일에 별세하였으니 태어난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으로부터 누린 수명이 54세이다.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곧 천(倩)이고, 사위는 종실 영성수(寧城守) 경(敬), 아산현감 윤관(尹寬), 종실 결기수(結己守) 현(玄), 부사용 윤계훈(尹繼勳), 선비 이명(李溟)이며, 측실의 아들은 보생(甫生)이다.

 

천(倩)은 부정 임류(任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응룡(應龍)이다. 영성수는 3남을 낳으니 덕원부수 팽복(彭福), 영양부수 춘복(春福), 문천부수 귀복(龜福)이고 딸 하나는 출가하지 않았다.

 

관(寬)은 2남을 낳으니 기(驥), 호(虎)이고 딸 하나는 출가하지 않았다. 결기수는 3남을 낳으니 장남은 당문부수 준(準)이고, 다음은 승(繩), 다음은 칙(則)인데 어려서 관례 전이며 장녀는 선비 임내신(任鼐臣)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역시 어리다. 계훈은 1남을 낳으니 시우(時雨)이고 명은 1녀를 낳았는데 출가하지 않았다.

 

명문에 이르기를,공은 소나무와 돌을 벗 삼아 한가로이 거닐며 인생을 마쳤네.

영예 남기는 것 마음에 두지 않더니 봄꽃처럼 바람에 지네뛰어난 모양으로 우뚝이 서서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지 않고 확고하여 질박함을 지키며 명예를 탐하거나 뽐내기를 바라지 않았네.

 

오직 소나무와 돌만이 공이 좋아하는 것이요.

더구나 그 덕이 흡사하니 누가 그 조예에 이르겠는가?

 

공이 세상에 나오고 들어가는 것과 공이 벼슬에 나오고 물러나는 것이 기준이 될 것이니 천년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으리라.

 

공이 간직한 뜻은 이승이나 저승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내가 이를 취해 명으로 삼아 송석정기에 짝을 짓노라. 황명 가정16년 정유(1537, 중종 32) 10월 일에 세우다.

 

국역 :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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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 嘉善大夫禮曹參判 兼 同知經筵事五衛都摠府副摠管 崔公神道碑銘 幷序.

 

資憲大夫 前議政府右參贊 兼 知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金安國 撰.

 

宣敎郞前行弘文館著作 兼 經筵說經春秋館記事官 金魯 書.

 

奉列大夫守司諫院司諫 兼 春秋館編修官承文院參校 任弼亨 篆.

 

松石先生崔公罷散累年。卜築京城東隅之雙溪洞。日嘯詠松石間。因自號松石居士。蕭然若寒素棲隱之人。世益欽其風致。嘉靖十五年丙申十一月十二日。寢疾卒。享年七十有一。縉紳莫不悼惜。訃聞。命禮官致弔祭。賜賻有加。以明年四月十三日。葬于京畿楊州治北泉川里坐酉向卯之原。合貞夫人禹氏兆。襄事甫訖。其子軍器寺別坐倩袖譜狀。不遠百里外程。來請墓文。哭泣告曰。亡父平生好善。然氣抗少許可。唯與公交誼特篤。敬重之無已。每服公文字。自得松石亭記。手不能舍。懷有所不釋然。則必展讀再三。夜或思看。亦必呼燭。屛室人索冠帶。端坐以讀之。亡父之於公。分旣若此。重其文又若此。今若又得公文以賁幽隧。則亡父有知。應契感於泉下。孤之願畢矣。余爲之對泣。噫。余之於公。可謂肝膽相照。知公宜莫如余者。且公嘗索三桑堂記於余。余未及酬。而公遽下世。深以爲幽明相負之恨。今銘公墓。庶得少洩余悲。而贖逋記之罪矣。公諱命昌。字汝愼。崔氏本出黃州。自高麗內奉卿凝之後。有諱漳者。仕高宗朝。隨王姪永寧公綧入質蒙古。後登第。仕宦不返。至四世孫諱天寶。當麗末還本國。常隨我太祖征伐。太祖器重之。妻以堂弟天桂之女。及卽位。改賜鄕開城。遂爲開城人。官至漢城府尹。卽公曾祖。生諱濡。立勳世祖朝。賜推忠佐翼功臣號。致位崇政大夫判中樞院事。封開城君。卽公祖。後坐子潤孫罪。廢配而卒。復以公貴。贈刑曹參議。生宣略將軍,忠佐衛副司果諱鐵孫。卽公考。亦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妣尹氏。海平望族。侍中諱碩之後。察訪諱禮卿之女。公生成化丙戌十二月四日。姿貌丰碩。美鬚髥。儀觀整儼。望之知其爲吉人。好學能屬文。中己酉進士試。中遭內艱。病悴。久廢擧子業。至弘治甲子。乃登第。選入承文院爲副正字。陞著作,博士。後所歷官。成均館典籍,司藝,司諫院正言,獻納,司諫,弘文館修撰,校理,副應敎,應敎,典翰,直提學,吏曹正郞,開城府都事,奉常寺判官,司憲府持平,儀賓府經歷,承文院校勘,軍資監副正,安邊府使,承政院同副承旨。陞右副,左副,禮曹參判,黃海道觀察使,同知中樞府事,全州府尹,原州牧使。爲副應敎者再。應敎者三。其爲弘文。皆兼帶經筵,春秋館,知製敎。其爲開城,安邊,全州。皆以親老爲養。求出在安邊。未期歲。以侍從乏人。拜典翰召還。又嘗爲養。求爲成川府使。擬入。上還下曰。崔某。合處侍從。何以注外職。卽拜應敎。其被眷注如此。公亦感激忘身。出入侍從,臺諫。讜論無所忌避。屢有建白。國家多采用之。如籍田爲供宗廟粢盛。實關重大。歲久。多爲私民盜耕。有虧嗣君孝敬之體。請改量。每歲秋熟。例差官驗諸道民田損實。以上下其稅。法久。亦徒爲文具。差遣官視爲尋常。不躬踏驗。只取郡邑所報。上聞。欺詐滋甚。請時別遣御史抽驗。以悚動人耳目。庶知警懼得實。上皆從之。庚辰夏。以病辭黃海監司。久處西班散秩。最後求出爲原州。民方喜其政簡賦輕。與監司爭法不屈。棄官歸。自此無意宦途。優游以終老。每去邑。行橐蕭然。及到家。路費有餘。則必盡散與邑人之從來者。所治民必有去後思。及聞公卒。或有來奠于殯者。居家儉素。不營產業。吉州有舊業田莊。歲出穀頗裕。國家嘗用補邊策。募民給粟。北道倉以在京。綿布償之。公常以道遠不能時輸爲苦。因納倉受直。積布盈壁。公驚自以家素貧寒。一朝暴得重貨爲不祥。卽分與諸子孫族戚以及隣里之空乏者。以其餘。日置酒。曾姻婭親戚歡飮。盡散乃已。居無室廬。常假寄人屋。亦不以此爲營築計。晩年所構雙溪之宅。亦僅容身庇風雨而已。自罷官後。歲糴楊州倉粟。人稱糴倉宰相。性嚴重不戲談。以禮法訓子孫。每令讀論語。以爲持身之本。不許穿着違禁冠服。及疾病。謂子女曰。有生必死。不能長存。吾生已足。更無所望。況葬于親側。如返舊家。汝等勿悲。且吾死。斂勿用紗羅綾段。棺槨勿用美材。葬勿用灰隔。奠祭勿用油蜜果。旣葬卽返魂。罷朝夕奠上食。凡于僭禮。皆勿擧用。子倩懼傷父意。一遵遺命。不敢違。然自悲不能盡情禮。雖返魂于室。因廬墓。不廢朔望薦。以伸其情。父子可謂各行其志而兩得之矣。公事親孝。母夫人在堂日。所以娛悅之者。無所不至。公生日。亦必上壽取歡。及沒。每値生日。閉門悲慟。不隨俗飮宴。公平生行身酬物。意以謂善則果行不顧。不苟從時尙。落落自信。表裏無回迂。有淳古風。如公者。世豈易得哉。雅性沖澹。樂觀書籍。喜吟詩。嗜酒能多忻然。未嘗沾醉迷亂失儀容。再參考文科殿試。稱得士。所著遺稿藏于家。配禹氏。籍丹陽。侍中玄寶之後。曾祖藝文館提學諱承範。祖。承文院參校諱繼蕃。考。司果諱敬祖。先公十七年。以正德庚辰十一月二十日卒。生年成化丁亥。享壽五十有四。生一男五女。男卽倩。女壻曰宗室寧城守敬生。牙山縣監尹寬。宗室結己守玄。副司勇尹繼勳。儒士李溟。側室子曰甫生。倩娶副正任瀏女。生一男。應龍。寧城生三男。德源副守彭福。永陽副守春福。文川副守龜福。一女在室。寬生二男。驥虎。一女許嫁吾舍弟正國。子繼趙。結己生三男。長唐文副守準。餘幼。女長適儒士任鼐臣。餘亦幼。繼勳生一男。時雨。溟生一女。在室。銘曰。

 

公友松石。倘佯以終。遺榮不戀。春英殞風。挺然特立。不與時變。確然守朴。不希沽衒。惟松惟石。惟公之好。況德則似。孰究其造。公行公藏。公進公退。此以爲準。千載不昧。公志所存。明幽不異。我取爲銘。以配亭記。<끝>

 

皇明嘉靖十六年丁酉十月日建。

 

출전 : 모재집.

 

↑최명창 선생 묘역

 

묘역의 제일 상단에 조성되어있는 묘는 최명창의 아버지 최철손(崔鐵孫)의 묘이고, 아들 최명창 선생의 묘는 쌍분으로 조성되어있으며, 묘의 좌우로는 문인석 한 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다른 묘역에 비해서 특이한 점은 쌍분 앞에 길쭉한 돌판 들들이 쭉 깔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봉분 앞에 작은 상석이 있으며, 그 앞에 묘비를 세웠습니다.

봉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보면 좌측이 선생의 묘이고 우측이 정부인(貞夫人) 단양우씨(丹陽禹氏) 묘입니다.

 

 

이곳 최명창선생의 신도비는 옥개형(屋蓋形)이며, 2면 비이다. 규모는 옥개석이 너비 100㎝, 두께 58㎝,

높이 40㎝이며, 비석이 너비 118㎝, 두께 18㎝, 높이 184㎝이고, 비석 받침이 너97㎝, 두께 59㎝, 높이

42㎝이다.

 

신도비의 왼쪽에는 복두 공복을 착용한 문인석 한 쌍이 신도비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곳 석물은 묘역 조성 당시의 것이라고 하니, 약470년 가까이된 석물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