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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계첩 발(騎省禊帖跋) - 간이 최립

야촌(1) 2010. 12. 4. 19:52

간이집 제3권>발(跋) - 최립(崔笠)

 

■ 기성(騎省)의 계첩(禊帖) 뒤에 쓴 글

 

지금 기억하건대, 병란(兵亂)이 일어난 지 몇 해쯤 지났을 적에 최여이(崔汝以) 영공(令公)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계첩(契帖)을 만들어 가지고 나에게 와서 한마디 말을 써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대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대가(大駕)가 이미 환도(還都)해 있었고, 중앙 정부의 기관들도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조(夏曹 병조(兵曹))의 경우는 병무(兵務)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기관들보다도 앞서서 정비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사(四司)의 낭중(郞中)과 원외(員外) 등 8인의 관원이 빠짐없이 갖추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문사(文士) 중에서 엄선된 사람들이었다.

 

이런 일은 태평 시대에도 보기 드문 현상이었는데, 모든 일이 어수선하게 흐트러져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렇듯 원만하게 인원이 모두 구비되었으므로, 더더욱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마음이 나름대로 든 나머지, 앞으로 세월이 흘러가더라도 이때의 일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렇게 계첩(契帖)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마침 여유가 없었으므로, 최 영공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外職)을 청한 결과, 동쪽 바닷가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있는데, 본도(本道)의 도사(都事)인 김공(金公)이 각 지역을 순회하다가 나의 고을에 도착하였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대나무 상자 안에서 계첩 하나를 꺼내어 보여 주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여이공(汝以公)이 옛날에 나에게 부탁했던 바로 그 계첩이었다.

 

그런데 여이공이 옛날에 나에게 그 계첩을 실제로 보여 준 적은 없었으므로, 내가 그 계첩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탄식하기를, “몇 줄의 문자를 짓는 것도 모두 때가 있는 것인가. 사람의 의사(意思)를 감발(感發)시키는 면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그냥 귀로만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그런데 이 계첩이 만들어진 이후로 겨우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 여 이공과 이양구李養久 : 양구는 이시발(李時發)의 자()임』 공은 모두 아경(亞卿 참판)을 거치고 나서 한 사람은 고도(故都)의 유수(留守)로 나가 있고 한 사람은 북쪽 관문의 순찰사(巡察使)로 재직 중이다.

 

또 박열지『朴說之는 박동열(朴東說)의 자임』 공은 조관(朝官)으로 승진했다가 큰 지방의 방백(方伯)으로 나가 있으며, 김정수金正受는 김순명(金順命)의 자임 공은 좌천되어 하나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있는데, 조정에서 임금님을 아직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이는 오직 이극휴李克休는 이광윤(李光胤)의 자임 공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도사공(都事公)인 여상부呂尙夫는 여우길(呂祐吉)의 자임 공으로 말하더라도, 한 결 같이 좌막(佐幕)에서 몸을 굽히고 있으니, 이렇게 본다면 거의 모두 수의(繡衣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정사를 살피는 것)의 임무를 띠고서 각자 지방을 출입하는 몸이라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치 새벽 별빛처럼 드문드문 떨어져서 서로들 쓸쓸하게 바라보는 처지[落落相望如晨星]일 뿐만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더군다나 조시보趙時保는 조수익(趙守翼)의 자임』 공은 벌써 고인(古人)이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은 계첩이라도 없었다면, 옛날 같은 관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지냈던 얼굴들을 어떻게 만나 볼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당시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지냈던가 하는 것도 추억 속에 떠올릴 수가 있었으니, 이렇게 계첩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제 해 저물녘의 황혼기에 처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인간 세상의 일을 만날 때마다 그동안 헛세상을 산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래서 이 계첩을 보고서도 십 년 전인 중년(中年)의 나이 때보다 백 배나 느껴지는 점이 없을 수 없기에,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이렇게 써서 돌려주었다.

 

[주01]기성(騎省) : 병조(兵曹)의 별칭이다.

 

[주01]최여이(崔汝以) : 여이는 최천건(崔天健)의 자(字)이다.

 

[주02]사사(四司) : 병조(兵曹)의 별칭이다. 《이문집록(吏文輯錄)》 권2 제85장에 나오는 사사(四司)의 주(註)

           에 “병부(兵部)에는 거가(車駕), 무선(武選), 무고(武庫), 직방(職方) 등 사사(四司)가 있다.”고 하였다.

 

[주03]새벽--처지 :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송장관부거시서(送張盥赴擧詩序)〉에 “옛날에 함께

           제했던 벗들과 어울려 노닐 적에는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마치 병풍처럼 대로(大路)를 휩쓸고 돌아다녔는

           데, 지금 와서는 마냥 쓸쓸하기가 새벽 별빛이 서로들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기만 하다. [今來落落 如晨星之

           相望]”는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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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騎省禊帖跋

 

記憶亂後數年間。崔汝以令公爲其同省契帖。索題一言于岦。蓋時 大駕旣還都。省曹稍復故。而夏曹主兵務。尤在所先。四司郞中員外凡八員皆備。夫以文士而甚選。雖平時罕備。而備於渙散之餘。竊知其尤以爲幸。而圖欲毋忘者也。岦適有所不暇焉。未之應。今岦爲便養衰。丐郡東海。而本道都事金公巡至。出篋中一帖。亦索一言。乃汝以公向所屬焉。然汝以公實不曾出以相示者也。岦撫帖而喟曰。數行文字之就。亦有時耶。發人意思。誠耳不如目矣。且此帖之作。僅十年耳。今汝以公,李養久公。俱由亞卿。或居守故京。或巡察北門。朴說之公以陞朝官。出剌大州。金正受公左假郡麾。李克休公獨流連邇列。而吾都事公呂尙夫公。一屈佐幕。一帶衣繡。偕出入於是方。摠之落落相望。不啻如晨星。況趙時保公已爲古人耶。非有繪事。何以依然相對省中之面耶。竊又知當時所爲。尤重夫此帖之作也。若岦景迫桑楡之人。凡遇人間事。如涉推嬗。無不足以生感倍百中年。忍涕書此而復焉。<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