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문집.고서.문헌 154

인정전상량문(仁政殿上樑文)

■ 昌德宮仁政殿上樑文 이만수 찬(李晩秀 撰) - 甲子年(1804, 순조 4) 伏以六龍捧日。丹扆敞北辰之居。八柱承天。紫殿正南面之位。轉灾爲瑞。雖舊維新。原夫左墄右平之䂓。粤自漢長樂受賀。九室八牕之義。若稽周明堂出治。靈臺之庶民自來。化及鳥獸魚鱉。斯干之百堵皆作。頌叶室家君王。卑宮采椽。雖聖人克勤而克儉。高臺廣廈。顧王者不重則不威。巍乎昌德丕基。儼然仁政法殿。昔英陵文物之大備。實始經營。逮宣廟兵燹之旣平。重新輪煥。瞻璿殿而拱淸廟。配陟降於昭之靈。面引慶而負神嵩。湊山河欝葱之氣。禮重路寢。遠倣太極皇極之儀。史稱正衙。近取勤政明政之制。五禮九功之所惇叙。百官萬民之所瞻仰。辨色入朝。劒佩秩王會之序。按月布令。象魏肅天闕之懸。鏤玉摸金。殿上皆呼千歲。蒐獜羅鳳。日下常奏五雲。昭皇朝九錫之恩。陛級示等威之截。協聖祖重光之譜。庭簴播政敎之和。惟其二字之名。亶在萬化之本。春噓物茁。天地之大德曰..

조천일기(朝天日記) - 李忔 著

■조천일기(朝天日記). 2책. 오계 이흘 저(梧溪 李忔 著) [내용개요] 17세기 초의 文臣 이흘(李忔, 1568(선조 1)-1630(인조 8)이 1629년(인조 7)에 謝恩兼進賀使가 되어 명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연행일기(燕行日記)이다. 1629년 6월에 明 經略 袁崇煥이 조선의 平安道 鐵山半島에 있던 모문룡(毛文龍, 1579~1629)을 주살한 사건이 있었다. 모문룡(毛文龍)군이 後金에 대항한다는 이유 때문에 군수, 군량을 지원하였던 朝鮮은 모문룡군과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변무사(辨誣使)를 명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謝恩兼進賀正使였던 李忔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본서는 이때의 기록이다. 李忔의 字는 尙中, 號는 雪汀·梧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李天一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에 문과급..

여한십가(麗韓十家)란 무엇인가?

■ 麗韓十家란 무엇인가? -변려(騈麗)한 세상의 문장(文章)을 꾸짖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高麗와 朝鮮의 천 년 역사를 빛낸 명문장가 10인에 속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麗韓十家는 이건창의 文友인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의 저술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건창. 황현과 함께 韓末三才로 이름을 떨치며,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한 창강은 기존의 文選류를 선별하는 기준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1906년을 전후하여 고려와 조선의 아홉 문장가의 글 95편을 가려 뽑아 수록한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를 편찬했는데, 庚戌國恥를 앞두고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를 고향 친구이자 제자인 王性淳에게 맡겨 출판을 의뢰했다. 이를 전달받은 왕성순은 여한구가에 김택영 1인을 보태고 첨삭해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

남한성 기(南漢城記)-장유

■ 남한성 기(南漢城 記) 지은이 : 장유(張維) 남한산성은 경성(京城) 동남쪽 40리(里) 지점 한수(漢水)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廣州)의 옛날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리(里)가 약간 더 되는 거리에 있다. 이곳은 본디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였다. 지지(地志)를 상고해 보건대, 백제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뒤 12세(世) 38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남평양이 바로 지금의 경도(京都)이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백제ㆍ신라(新羅) 그리고 고려조(高麗朝)가 끝나는 1천여 년 동안 이 산성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다. 그 뒤 아조(..

장기 두는 법

■ 장기 두는 법[상희지(象戱志)] 글쓴이 :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 장기(將棋)는 대국(對局) 하는 놀이로서 전쟁 상황을 본뜬 것이다. 장기판의 모양을 보면, 동서(東西)로 아홉 개의 길이 나 있고, 남북(南北)으로 열 개의 길이 나 있으며, 남쪽과 북쪽 가에 9궁(宮)이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대각선으로 통하면서 중앙으로 집중되고 있으니 바로 장(將)이 있는 곳이다. 장기 짝은 각각 16개씩이다. 장(將)이 1개이니 장군이요, 사(士)가 2개이니 모사(謀士)요, 차(車)가 2개이니 전차요, 포(包)가 2개이니 대포요, 마(馬)가 2개이니 기병(騎兵)이요, 상(象)이 2개이니 전투용 코끼리요, 졸(卒)이 5개이니 보병(步兵)이다. 장은 9궁의 중앙에 있고 사는 그 뒤편의 좌우에 있고,..

북천일록서문(北遷日錄序文) - 남구만

■ 백사(白沙)의 북천록(北遷錄) 서문 병인년(1686, 숙종 12) 약천 남구만 찬(藥泉 南九萬 撰) 옛날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중흥(中興)하실 때에 큰 공을 세운 대신(大臣)이 있었으니, 백사 선생 이공 항복(李公恒福)으로 자가 자상(子常)이다. 광해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 하니, 공은 헌의(獻議)하여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관북으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이때 살아서 유배지에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는 즈음에 서로 따른 자는 바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 가행(鄭忠信可行)이었다. 그는 발섭(跋涉)하는 노고와 나그네로서 타관에 있는 고통과 질병의 위태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을 자세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남겨 주어 보게 하였으니, 아, 지금 그 기..

병자록(丙子錄)/나만갑 저

병자록(丙子錄) 정묘사월십구일(丁卯四月十九日) 朝鮮國王臣。姓諱。右伏以神旌遄曰方玆滌瑕 ● 042 之澤。壤奠雖微。敢效執深之誠。謹備。黃細苧布。三十匹。白細苧布二十匹。兩色綿細一百匹白布一百匹。白木綿一千匹。龍文簾席二張。黃花席一十張。滿花席二十張。雉采花席一十五張。豹皮一十張。獺皮三十張。白綿紙一千卷。粘六張。厚油紙三部。粘四張。厚油紙三部。黃毛筆一百枝。油煤墨五十張。乾柿子三十貼。黃栗十五十。乾鰒魚一十貼。乾□魚一十尾。右件物等。製送非精。名般不腆。雖自表其衷悃。豈足稱於享儀。臣無任兢惶激切之至。謹隨封表。進聞。朝鮮國王臣姓諱。謹備中宮殿下。進獻禮物。紅細苧布。二十匹。白布三十匹。滿花席一十張。絹彩花席一十張。右件物等。謹奉進以聞。伏以至大無外。旣荷穹昊之仁。繼以有臨。特行重雷之澤。心肝含感。頂踵知榮。伏念臣鯷岑。僻居蛙井陋識。襲先祖之壁轍久矣。執迷致王師之□征。安所逃命。..

죽유유적(竹牖遺蹟) - 오운(吳澐) 저

↑조선중기의 문신. 의병장 吳澐先生이 초서로 쓴 夏寒亭十節을 木刻하여 발행한 『죽유유적』 木板書帖 1책. 뒤에 墨書 記文이 있다.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함안(咸安)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字는 모양(牟陽)․ 태원(太源), 號는 죽유(竹牖)․ 죽계(竹溪), 의령현감 석복(碩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의현감 언의(彦毅), 아버지는 수정(守貞),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그는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성균관의 학유(學諭)를 거쳐 직강(直講),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대사성(成均館 大司成)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광주목사(光州..

몽암집(蒙庵集)/李埰 著

■ 몽암집(蒙庵集) 이채(李埰, 1616-1684)선생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석오(錫吾). 동경잡기(東京雜記)를 편찬·간행하였다. 소(疏) 가운데 경주청복구호소)慶州請復舊號疏는 1601년 경주부(慶州府)를 읍(邑)으로 강등하고, 감영(監營)을 대구로 옮긴 데 대해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으로 경주가 신라의 발상지로서 고도(古都)의 유풍여속(遺風餘俗)이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감영을 경주에 두어 경주부로 복원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다. 출품물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1669년(현종 10)에 경주부사 민주면(閔周冕)이 경주의 진사 이채(李埰)‚ 김건준(金建準) 등과 함께 《동경지(東京誌)》를 재편집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라는 제목을 붙여 간행한 것을 1711년(숙종 37)에 경주부윤 남지훈(南至熏)이 재간행한 목판본 [東京雜記] 3권 3책 완질. 가로 21.6cm 세로 34cm 판형이 크고 묵직한 종이에 인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