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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유유적(竹牖遺蹟) - 오운(吳澐) 저

야촌(1) 2013. 9. 12. 21:34

 

 

 

 

 

 

 

 

 

 

↑조선중기의 문신. 의병장 吳澐先生이 초서로 쓴 夏寒亭十節을 木刻하여 발행한 『죽유유적』  木板書帖 1책. 뒤에 墨書 記文이 있다.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함안(咸安)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字는 모양(牟陽)․ 태원(太源), 號는 죽유(竹牖)․ 죽계(竹溪), 의령현감 석복(碩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의현감 언의(彦毅), 아버지는 수정(守貞),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그는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성균관의 학유(學諭)를 거쳐 직강(直講),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대사성(成均館 大司成)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광주목사(光州牧使), 임진왜란시 의령(宜寧)에서 희별(義兵)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조선 시대, 의병을 모집하던 임시 관직)․ 수병장(收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상주목사(尙州牧使),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임진왜란의 화의가 깨지고, 1597년에 왜군이 다시 쳐들어 온 사건)에 공을 세워 도원사 권율(都元帥 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조선 시대, 문관의 정삼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고,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1608년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는 곽재우와 함께 분전한 17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수록하여 편찬한 1614년(광해군 6)에 간행한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오늘날 오운(吳澐)의 종택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 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