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문집.고서.문헌 154

송천집(松泉集) - 박문국(朴文國)

■ 송천집(松泉集) 저자 : 박문국(朴文國) 조선 후기의 학자 박문국(朴文國)의 시문집이다. 선생의 고령박씨(高靈朴氏), 진사 박경가(朴慶家)의 아버지 이고. 고령군 쌍림면 하거리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시문집인 송천집(松泉集)은 4권 부록 합 3책. 필사본으로,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시문(詩文)의 내용 중 이따금 누락된 글자에 ‘缺(결)’자 표시가 있고, 부록 등이 있는 점으로 보아 간행을 목적으로 편집된 고본(稿本)으로 추정된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제1책 권1에 시 234수, 권2에 서(書) 4편, 제문 3편, 기(記) 1편, 제2책 권1은 남귀창수록(南歸唱酬錄)으로 최흥벽(崔興璧)의 소서(小序)와 윤동야(尹東野)의 시평(詩評), 이어 연구(聯句) 27수가 있다. 부록에 차운시..

견한잡록 1(遣閑雜錄) - 沈守慶隨筆集

■ 견한잡록 1(遣閑雜錄 ) 심수경(沈守慶) 지음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급암시집서(及菴詩集序) - 이제현(李齊賢)

급암시집(及菴詩集) - 민사평(閔思平) 著 ●급암시집 서(及菴詩集序) - 이제현(李齊賢) 吾先君昔掌試。取知名士二十有三人。其至大官若朴密直仁幹。▣▣▣▣▣▣▣▣▣▣▣▣▣▣▣君所愛重性坦▣▣▣▣邊幅。每酒酣。輒爲詩。無塵俗語。無子。有金氏二甥齊閔齊顔。及庵歿。齊閔拾遺詩若干首。編以示予。讀其詩。想見其平生。不覺霑▣▣▣▣▣▣益少。況先君所▣▣▣乎。嗚呼。誰怪乎吾涕之無從也。東庵後人李齊賢題。 -------------------------------------------------------------------------------------------------------------------------------------- 급암시집(及菴詩集) > 及菴詩集年譜 > ●급암 만사(及菴挽詞)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哲人淪喪路人驚..

崔直提學歸田詩卷跋 - 平陽後人朴彭年

■최덕지(崔德之) 최 직제학은 최덕지(崔德之,1384년(우왕 10)~1455년(세조 1)를 말하는 것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 朴先生遺稿(박팽년) ■ 최 직제학이 전원으로 돌아갈 때 지어 준 시권 발문(詩卷跋文) 사람은 누구나 공명과 부귀를 얻으려고 하는것이 인지상정 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

함광헌고(含光軒稿) - 이미(李瀰)의 문집

■ 함광헌고(含光軒稿) 조선 후기의 문인 이미(李瀰)의 문집. 8권 5책. 필사본. 저자 생전의 필사로 보인다. 서와 발이 없어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함광헌고》 권1·2는 외종제 이중호(李仲浩)의 시 700여 수, 권3∼8은 시 1,250여 수, 소차(疏箚) 16편, 서(書) 5편, 상량문 1편, 설(說) 1편, 전(傳) 2편, 교서 6편, 서(序) 8편, 제문 6편, 묘지 2편, 비명 2편, 애사 2편, 발(跋) 1편, 치제문 2편, 시 300여 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함광헌고》의 시 가운데에 〈대명구궁인인 大明舊宮人引〉·〈등석사 燈夕詞〉·〈미인사 美人詞〉·〈잠부사 蠶婦詞〉·〈규원 閨怨〉·〈영미인창 詠美人牕〉 등의 여러 작품은 적절한 비유와 함축이 돋보이며 서정성이 짙다. 〈실세탄 失勢歎〉..

탁계집(濯溪集)-金相進(朝鮮)

■ 탁계집(濯溪集)/金相進(朝鮮) 著 간행년대: 1828년(순조28) 金相進(1736·1811)의 詩文集으로 1828년(純祖 28) 손자 直信이 저자의 從弟 相韶와 門人 李元肅이 모아놓은 유고를 발간한 것이다. 그의 자는 士達, 호는 濯溪, 본관은 金海. 報恩 濯谷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濯溪라 號하였다. 愼窩 洪命元에게 受學하였으며 默窩 李徵麟의 제자인 洪光一· 李晦根과 더불어 童年 英才로 불리었다. 일찌기 生員試 初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山溪間에 茅屋을 지어놓고 農桑과 독서에 매진하여 ≪朱子大全≫ ≪朱子語類≫를 깊이 연구하였다. 1791년에는 땅을 사서 義田宅으로 하고 門約宗盟 家塾節目을 만들어 宗人들에게 가르치며, 朱子의 家政, 家訓, 家居要言 등도 反覆 論諭하였다. 평..

이목구심서 3(耳目口心書三)

청장관전서 제50권 ■ 이목구심서 3(耳目口心書三) 사람이 재리(財利)에 급급해하는 것은 자신의 성명(性命)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용렬한 사람은 도리어 성명을 가볍게 여기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 우리 집이 삼포(三浦)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허리에 돈 10민(緡)을 차고서 얼음이 풀리려는 곳을 건너다가 미처 반도 건너지 못해서 드디어 빠지고 말아 그의 상반신이 얼음 위에 걸렸다. 마침 강가에 있던 사람이 급히 외치기를, “당신 허리에 찬 돈을 풀어 버리면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그 말을 듣기는커녕 두 손으로 돈을 움켜쥐고 잃어버릴 것만을 걱정하다가 그대로 빠지고 말았다.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절로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은 성..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사적기(事蹟記)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嬰處文稿)/이덕무(李德懋) 著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사적기(事蹟記) 보지도인(寶誌道人)은 소량(蕭梁 소연(蕭衍)이 세운 양(梁) 나라)의 불제자(佛弟子)이니 부처에 아첨하던 그 당시에 고승으로 이름났었다. 그가 죽게 되자 답산가(踏山歌) 1편을 내놓고 도가 높은 제자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내가 입적(入寂)한 뒤에 응당 신라의 명승이 올 것이니 이 답산가를 전하여 주라.”하였다. 과연 수년 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대사가 지공(誌公)의 풍문을 듣고 신라에서 북으로 와 지공을 뵈려 하였다. 그러나 지공은 이미 입적한 뒤라 그 제자가 눈물을 흘려 슬퍼하면서 간수하여 두었던 답산가를 공손히 주고 지공의 계언(戒言)도 전하였다. 두 대사는 공손히 답산가와..

화산(華山)의 종족

임하필기 제31권>순일편(旬一編)/귤산 이유원 화산(華山)의 종족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측실 나주오씨(羅州吳氏)는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서손(庶孫)이고,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외손인데, 선생에게 출가하여 많은 공이 있었다. 묘명(墓銘)을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그의 후손이 포천(抱川)의 화산에 매우 많이 사는데, 오은군(鰲恩君) 이경일(李敬一)이 서(庶)자를 쓰지 말게 하여 뒤에 혹 천(賤)자를 썼는데, 효정공(孝貞公) 이석규(李錫奎)가 그것도 금하여 더러 하(下)자를 썼다. 내가 종중(宗中)과 논의하여 ‘하’ 자도 아울러 없애도록 하였다.

기성계첩 발(騎省禊帖跋) - 간이 최립

간이집 제3권>발(跋) - 최립(崔笠) ■ 기성(騎省)의 계첩(禊帖) 뒤에 쓴 글 지금 기억하건대, 병란(兵亂)이 일어난 지 몇 해쯤 지났을 적에 최여이(崔汝以) 영공(令公)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계첩(契帖)을 만들어 가지고 나에게 와서 한마디 말을 써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대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대가(大駕)가 이미 환도(還都)해 있었고, 중앙 정부의 기관들도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조(夏曹 병조(兵曹))의 경우는 병무(兵務)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기관들보다도 앞서서 정비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사(四司)의 낭중(郞中)과 원외(員外) 등 8인의 관원이 빠짐없이 갖추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