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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십가(麗韓十家)란 무엇인가?

야촌(1) 2013. 12. 2. 01:35

■ 麗韓十家란 무엇인가?

 

-변려(騈麗)한 세상의 문장(文章)을 꾸짖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高麗와 朝鮮의 천 년 역사를 빛낸 명문장가 10인에 속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麗韓十家는 이건창의 文友인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의 저술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건창. 황현과 함께 韓末三才로 이름을 떨치며,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한 창강은 기존의 文選류를 선별하는 기준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1906년을 전후하여 고려와 조선의 아홉 문장가의 글 95편을 가려 뽑아 수록한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를 편찬했는데, 庚戌國恥를 앞두고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를 고향 친구이자 제자인 王性淳에게 맡겨 출판을 의뢰했다.

 

이를 전달받은 왕성순은 여한구가에 김택영 1인을 보태고 첨삭해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1921)라는 제목으로 완성시켰는데, 량치챠오[梁啓超]에게 서문을 부탁해서 실었고 중국 문사 3명의 발문도 넣었다. 이 책은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으며, 1977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되었다.

 

총 11권 1책으로 이뤄진 『麗韓十家文?』는 어떤 책일까. 여기서 滄江은 古文의 대표 작가로 다음 아홉명을 꼽고 있다.

金富軾. 李齊賢, 張維, 李植, 金昌協, 朴趾源, 洪奭周, 金邁淳, 李建昌 순이다.

 

눈에 띄는 것은 김부식을 동방 古文의 출발로 놓았다는 점, 이제현을 韓愈, 歐陽脩의 고문을 쓰기 시작한 사람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안대회는 「조선시대 문장관과 문장선집」(1997)에서

“記事를 주로 쓴 김부식과 이제현을 정식의 고문가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김택영의 독자적 안목”이지만

김부식을 고문가로서 대서특필한 사실은 『三國史記』의 문체를 염두에 둔 것인데 논의의 여지가 있다”며 논평한 바 있다.

 

다음으로 『麗韓十家文鈔』는 김부식과 이제현을 부각시킨 반면 조선후기 이래 고문의 정맥을 이은 것으로 인정받은 李穡을 제외시킨 점에서 눈길을 끈다. 滄江은 그 근거를 이색이 程朱의 학문을 창도하고 고전에 주석을 붙이는 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조선전기의 고문가들이 이색의 이러한 病弊를 계승했다는 것에 두고 있다.

 

전반적으로 김택영은 고려의 인물에 후한 점수를 줬고 조선전기와 중기의 작가에게는 박했으며 자신과 동시대의 작가들에게는 후했다. 아마 중화주의에 치우친 조선의 문장이 주체성을 회복한 시기가 조선후기 이래의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창강에 의해 우리 고문의 전통과 맥락이 독자적인 체계화를 이루었다.

 

또한 조선후기의 인물로 박지원을 고문가로 포함시킨 점도 눈에 들어온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당대에 편자인 滄江과 深齋 曺兢燮 사이에서 고문 논쟁이 붙기도 했다. 이는 심재가 내우외환을 중세적 가치를 담은 문장으로 안정시키려는 反正의 효용에 무게중심을 놓고 문장을 추구했기 때문인다.

 

두 사람 모두 金昌協의 온건보수적인 문장관을 이어받은 점에선 비슷하지만, 심재가 奇麗한 표현이 논리를 가리는 것을 크게 경계한 반면 창강은 문장의 미학적 완성도 측면을 함께 고려했다는 차이가 있다.

 

박지원이 고문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과 관련해서 정민은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이치를, 불변의 옛것이란 어디에도 없음을, 새로울 때만이 예로울 수 있으며 새것과 옛것은 결코 별개일 수 없음을 문학적 실천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는 고문이면서 고문가가 아니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문이란 中唐의 韓愈와 柳宗元이 제창한 것으로, 六朝 이래 그때까지 유행하던 騈麗文은 기교를 중시한 나머지 허식에 흘러 내용이 허술하므로 『孟子』『史記』와 같은 간결함?힘참?명쾌함이 깃든 문장으로 되돌아가는 일이야말로 산문의 이상이라고 본 데서 탄생한 글쓰기의 규율이자 장르이다.

 

滄江이 활동하던 당시는 利用厚生의 학문 분위기가 무르익고 양명학을 중심으로 虛學을 비판하는 담론이 나타났다. 이런 허학 비판이 문장 이론으로 이어졌으며, 韓末의 ‘고문주의’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古代로 돌아간다는 의분에 찬 역설로 여겨졌다. 李建昌은 이러한 고문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가장 대표적인 문장가였다고 滄江은 평가하였다.

 

李建昌 또한 滄江의 문장이나 시문학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는 창강의 시와 자하 신위의 시를 비교한 자리에서 화려하지만 깊이가 없는 자하와는 달리 창강의 시는 속세를 질정하고자 하는 탁월한 직설법을 구사한다고 비평한 바 있다.

 

출전 : 송희준, 조선의 마지막 문장, 글항아리, 2008, p. 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