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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성 기(南漢城記)-장유

야촌(1) 2013. 11. 10. 18:01

■ 남한성 기(南漢城 記)

 

지은이 : 장유(張維)

 

남한산성은 경성(京城) 동남쪽 40리(里) 지점 한수(漢水)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廣州)의 옛날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리(里)가 약간 더 되는 거리에 있다.

 

이곳은 본디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였다. 지지(地志)를 상고해 보건대, 백제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뒤 12세(世) 38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남평양이 바로 지금의 경도(京都)이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백제ㆍ신라(新羅) 그리고 고려조(高麗朝)가 끝나는 1천여 년 동안 이 산성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다.

 

그 뒤 아조(我朝)에서 천명(天命)을 받으면서부터는 태평 정치가 크게 이루어져 병혁(兵革)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견고한 산성 역시 볼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고 난 이후로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는 인사들이 이 산성에 깊은 관심을 쏟아 왔는데, 정작 당국자(當國者)들은 이에 대해 제대로 건백(建白)하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의지할 바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이듬해에 역괄[逆适=이괄(李适)을 말함]의 변란이 일어나면서 국가에 많은 근심이 있게 되자, 기보(畿輔) 근처에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의논들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에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건의하여 이 산성의 수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처음에 청원군(靑原君) 심기원(沈器遠)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놀고 먹는 인원들을 공사에 투입하려고 하면서 도첩(度帖)을 이용해 승도(僧徒)들을 포섭하다가 곧이어 상사(喪事)를 당해 그만두고 말았다.

 

이에 총융사(摠戎使)인 완풍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고는 바로 명승(名僧)인 각성(覺性)과 응성(應聖) 등을 널리 불러들여 각자 그 승도들을 총섭(摠攝)하게 한 뒤 지역별로 나눠 공사를 분담케 하였는데, 이때 목사(牧使) 문희성(文希聖)과 별장(別將) 이일원(李一元)과 비장(裨將) 이광춘(李光春) 등이 실제로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산성의 사방 주위로 기지(基址)가 완연한 곳은 대개 온조왕이 옛날에 쌓았던 곳이다. 바로 이를 기초로 그 위에 증축하면서 평탄하고 험난한 지형을 참작하여 고저(高低)의 높이를 맞추어 나갔는데, 갑자년(1624, 인조 2) 9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병인년(1626, 인조 4) 7월에 완공을 고하였다.

 

산성은 둘레의 총 길이가 약간 장척(丈尺)이요, 여장(女墻)이 1700첩(堞)이며, 4문(門)을 설치한 외에 갑절이나 되는 암문(暗門)이 시설되었고, 그 속에 가람(伽藍) 일곱 곳이 새로 건립되었는가 하면 관해(館廨)와 창유(倉庾) 등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대저 남한산은 가운데가 평평한 반면 밖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등 그 에워싼 형세가 치밀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웅혼한 자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산성은 바로 산 정상의 능선들로 이어져 높은 지세에 웅거하면서 평평한 지대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성 안에 늘 샘솟는 곳이 매우 많아 겨울이건 여름이건 마르는 날이 없는데,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들은 대간(大澗)으로 합쳐져 동쪽 수문(水門)을 통해 빠져 나간다. 문의 바깥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들이 곳곳에 서려 있고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몇 십리를 두고 이어져 있다.

 

산세(山勢)는 사방이 온통 깎아지른 듯 하여 어떻게 부여잡고 올라갈 길이 없는데, 오직 동남쪽 모퉁이 산기슭만은 약간 경사져 있을 뿐이라서 포루(砲樓) 세 곳을 설치해 놓았다.

 

이와 함께 건방(乾方 북서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으므로 누대(樓臺)를 하나 세운다음 용도(甬道)를 쌓아 성과 연결시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주치(州治)를 이곳으로 옮겨 인력과 물자를 비축함으로써 은연중에 하나의 웅진(雄鎭)이 형성되게 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왕공(王公)이 요새지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킨다.’ 하였고,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면 거(莒) 나라가 외진 것을 믿고 성곽을 수선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군자가 큰 죄라고 하였다. 그런데 낭와(囊瓦)가 영(郢) 땅에 축성을 하자 심윤수(沈尹戍)가 그지없이 절실하게 비난을 하였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본말(本末)이 아울러 이루어지면 성곽으로 백성들을 물론 보호할 수 있겠지만 백성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경우에는 성곽이 있어도 아무 보탬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중흥(中興)의 운세를 맞이하여 인륜을 다시 바로잡으신 뒤 화난(禍難)을 경계하여 충직한 신하들에게 임무를 맡기시면서 사전 대비책에 깊은 관심을 보여 이 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천 년 동안 가시덤불에 묻혀 있던 폐허의 땅이 일약 면목을 일신하면서 마침내 경도(京都)를 방어하는 요새지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진정 기수(氣數)가 암암리에 응하고 천인(天人)이 합발(合發)한 일대 기회로서, ‘요새지를 설치해 나라를 지킨다.[設險守國]’는 《주역》의 뜻과도 합치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 이후로 안으로는 낭묘(廊廟)에서 보필하는 신하들로부터 밖으로는 봉강(封疆)을 지키는 장수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합하고 지려(智慮)를 다하여 공동으로 좋은 계책을 시행함으로써 인화(人和)와 지리(地利)의 유익함이 서로 조화되게끔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 성이야말로 묵적(墨翟)의 기구를 빌리지 않고서도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위력을 영원히 과시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한갓 험준한 산세(山勢)나 견고한 성루(城樓)만은 믿고서 ‘누가 감히 나에게 덤벼들까.’ 한다면 정말 졸렬한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 성을 수축하여 원대한 계책을 삼으려 했던 그 본의로 볼 때 어찌 그렇게 되기야 하겠는가. 감히 이런 내용으로 군자들에게 고하는 바인데, 그동안 공사를 주관하며 공로를 세운 제인(諸人)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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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왕공(王公)이 …… 지킨다 : 《주역(周易)》 감괘(坎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02]거(莒) 나라가 …… 하였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9년에 “외진 것을 믿고 대비하지 않음은 죄 중에서도 큰 죄요, 뜻밖의 사태를 미리 대비함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다. 거 나라가 외진 것을 믿고 성곽을 수선하지 않은 나머지 12일 사이에 초 나라가 세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러니 방비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군자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주03]낭와(囊瓦)가 …… 하였으니 :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4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낭와는 초 나라 장왕(莊王)의 아들이고, 심윤수는 장왕의 증손이다.

 

[주04]묵적(墨翟)의 기구 : 기막힌 수성(守城)의 기계를 말한다. 초(楚) 나라가 송(宋) 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묵적이 초 나라에 가서 군사(軍師)인 공수반(公輸般)과 공수(功守)의 기술을 겨뤘는데 끝내는 공격 위주의 공수반이 수비 위주의 묵적을 이길 수 없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墨子 公輸》

 

계곡집 제8권>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