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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일록서문(北遷日錄序文) - 남구만

야촌(1) 2013. 11. 9. 22:26

■ 백사(白沙)의 북천록(北遷錄) 서문

 

병인년(1686, 숙종 12)

약천 남구만 찬(藥泉 南九萬 撰)

 

옛날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중흥(中興)하실 때에 큰 공을 세운 대신(大臣)이 있었으니, 백사 선생 이공 항복(李公恒福)으로 자가 자상(子常)이다.

 

광해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 하니, 공은 헌의(獻議)하여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관북으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이때 살아서 유배지에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는 즈음에 서로 따른 자는 바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 가행(鄭忠信可行)이었다. 그는 발섭(跋涉)하는 노고와 나그네로서 타관에 있는 고통과 질병의 위태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을 자세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남겨 주어 보게 하였으니, 아, 지금 그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이는 다만 비분강개한 뜻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요, 언어의 묘함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떳떳한 이치와 백성들의 윤리의 중함을 증대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감발(感發)해서 흥기하게 함이 어쩌면 이리도 많단 말인가.

 

모자간의 윤리와 군신 간의 의리는 참으로 중대한 것이며, 인품의 간사하고 바름과 세도(世道)의 오르고 내림, 무상(無常)한 사람들의 태도와 없어지지 않는 공의(公議), 죽어서도 영화로움과 살아서도 치욕스러움, 인륜을 보고 식별하는 지혜와 지우간(知遇間)에 허여하여 보답하는 것들이 한 가지도 이 책에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세의 군자가 이 책을 본다면 또한 때를 헤아려 처신하는 방법을 알 것이다. 사람이 서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이 때문일 뿐이다.

 

비록 훌륭한 선생과 대인이 세상의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지었다 하더라도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군복을 입은 무신이 경병(競病)의 말을 남긴 것과 같은 종류로 여겨 함께 평할 수 있겠는가.

 

내 들으니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용만(龍灣)으로 파천하였을 때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내부(內附)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를 물으니, 오직 공만이 몸소 말고삐를 잡고 따라갈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이 북쪽 지방으로 귀양 가자, 오 직 금남만이 따르고 떠나가지 아니하여 살아 계실 때와 별세한 뒤를 잘 경영하였으니, 아, 공이 스스로 군부(君父)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 보답을 금남에게서 받은 것이다.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선조에게 훌륭한 행실이 있기 때문에, 후손이 그와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

 

또한 나는 여기에서 다시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보상(輔相)의 직책에 있는 자는 반드시 인재를 알아보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 진(晉)나라의 창고 관리하는 자를 오직 조 문자(趙文子)가 알아보고 천거하여 대부로 삼았고, 한(漢)나라로 도망온 병졸을 오직 소 상국(蕭相國)이 알아보고서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았으니, 이처럼 명철한 식감(識鑑)은 본래 천성에서 얻은 것이니, 어찌 전수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으며 배우고 익혀서 능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금남은 광주(光州)의 한 천한 선비로서 총각 시절에 적군 속을 뚫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공은 마침내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는 사이에 그를 알아보고서 가르치고 성취시켜 끝내 국가의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한 몸이 곤궁할 때에 큰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기세가 하늘을 뒤덮는 역적을 토벌하고 국가를 거듭 회복하는 공렬(功烈)을 이루어서 세상의 간성(干城)이 되어 종묘사직이 이에 의뢰하였다.

 

지금 이러한 안목이 없으면서 국가의 큰 임무를 담당한 자들은 비록 혹 구구히 충성할 것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여 군주를 섬김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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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군복을 …… 것 : 경병(競病)은 경(競)과 병(病) 두 험운(險韻)을 달아 지은 시를 말한다.

양(梁)나라 때 조경종(曹景宗)이 개선(凱旋)하자, 무제(武帝)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연음(宴飮)하면서 심약(沈約)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이때 운자를 모두 사용하고 오직 경병 두 글자만 남았다.

 

조경종이 붓을 잡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떠날 때에는 아녀자들 슬퍼하더니, 돌아올 때에는 피리와 북소리 요란하네. 한 번 길 가는 사람에게 묻노니, 옛날의 곽거병과 어떠한가.〔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니, 무제가 감탄하였다. 《南史 卷55 曹景宗傳》

 

[주02]진(晉)나라의 …… 삼았고 : 문자(文子)는 춘추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인 조최(趙衰)의 시호이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진나라 사람들이 조 문자(趙文子)를 일러 사람을 잘 아는 자라고 하였다.

 

진나라에서 천거한 사람 중에 관고(管庫)의 선비가 70여 명이었으나 살아서는 그들과 이익을 주고받지 않고 죽어서는 자기 자식을 부탁하지 않았다.” 하였는바, 관고의 선비란 창고를 맡아 관리하는 낮은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주03]한(漢)나라로 …… 삼았으니 : 한나라로 도망온 병졸은 한신(韓信)을 가리킨다.

한신은 회음(淮陰) 사람으로 일찍이 초(楚)나라의 패왕(覇王)인 항우(項羽)를 섬기다가 한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에게 귀의하였으나 크게 등용되지 못하자 유방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승상인 소하(蕭何)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도망가지 말도록 설득한 다음 유방에게 대장(大將)으로 크게 등용할 것을 건의하여,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史記 卷93淮陰侯列傳》

 

[자료문헌] : 약천집 제27권 >서(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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