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감고당 권희학 초상화

■ 권희학(權喜學) 생졸년 : 1672년(현종 13)~1742년(영조 18) 조선후기 분무공신「奮武功臣 :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 3등에 책록된 공신 및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중(文仲), 호는 감고당(感顧堂). 안동부 향리「鄕吏=아전(衙前)」권명형(權命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7년(숙종 23)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최석정(崔錫鼎)의 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교련관(敎鍊官)이 되고, 그 뒤 여러 고을의 첨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금위영교련관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안성·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난을 평정,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책록 되고 ..

백사 이항복 진영(白沙李恒福眞影)

작성일 : 2004. 03. 03 서울대 박물관 소장 이항복 위성공신상 후모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항복 후손들이 기증한 초상화는 모두 2점이다. 호성공신과 위성공신이 됐을 때 받은 초상화를 18세기에 베껴 그린 후모본(後模本)이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이항복 초상화에는 원본 특징이 남았으나, 얼굴과 복식에 명암을 넣은 점은 18세기 특색"이라며 "위성공신상 후모본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이항복 초상화 초본'과 얼굴 표현이 유사해 서울대 작품이 이항복 57세 때인 1613년 초상화 초본(밑그림)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물 기증에 기여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두 초상화는 후모본이지만, 국난을 극복한 기개와 영웅적 면모가 잘 드러난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양평공 이철견 진영(襄平公李鐵堅眞影)

이철견(李鐵堅) /21世 [생졸년]1435년(세종 17)∼1496년(연산군 2). [무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등준시(登俊試) -----------------------------------------------------------------------------------------------------------------------------------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연부(鍊夫). 아버지는 참판(參判-從二品) 연손(延孫)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正二品))번(璠)의 딸이고,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이다. 문음으로 헌릉직(獻陵直)을 거쳐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從五品)으로 있을 때인 14..

익재선생 진영(益齋先生眞影)

작성일 2004. 03.01 ↑보은 장산영당 소장의 익재 영정(충북 유형문화재 제72호) ↑일본 천리대학 소장 익재 선생 초상화 ↑본 화상은 1999년 2월 도난 당했다가 되찾은 후 2010. 11. 26일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돼 있다. 본 화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후손 이사균(李思鈞·1471∼1536)이 화공에 의뢰해 국보 제110호의 의모본으로 제작되었다. ↑길위의 시인 이제현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크기 : 73.6×109.4cm 고려 후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그린 그림이다. 화면 오른편은 거대한 바위와 필선으로 처리한 왼편의 낮은 산 사이를 꺾어 저 흐르는 강을 표현하였다. 오른편의 무너져 내릴 듯한 바위에 꺾어 저 매달린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강기슭에 몇 ..

최익현 초상(崔益鉉 肖像)

최익현 선생 壽74歲像 ■ 최익현 초상(崔益鉉 肖像) 보물(寶物) 제1510호 구한말의 대표적 우국지사(憂國之士)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의 초상화로, “勉庵崔先生七十四歲像 毛冠本” 및 “乙巳孟春上澣定山郡守蔡龍臣圖寫”라고 쓰인 우측 상하단의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심의를 입고 털모자를 쓴 모습인데 심의(深衣)는 그가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임을 잘 전해주고 털모자의 모관(毛冠)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최익현의 애국적 풍모를 잘 보여준다. 채용신의 초기 작품에서 풍기는 조심스럽고 근실한 화법과 소박한 화격이 최익현의 우국지사적인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고 있다. ↑면암 최익현 초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248호 소장처 : 백제문화체험박..

겸재(謙齋) 정선(鄭敾)에 대한 고찰(考察)

■ 겸재(謙齋) 정선(鄭敾)에 대한 고찰(考察) 정선(鄭敾)은 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원백(元伯)이다,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시익(時翊)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고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정선(鄭敾)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

정선(鄭敾)

■ 정선(鄭敾) [생졸년] 1676년(숙종 2)~1759년(영조 3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겸재(謙齋). 호조참판에 추증된 시익(時翊)의 맏아들로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오늘날 경기고등학교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해 몹시 가난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남과 사귐에 결코 화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등 점잖은 군자적 풍모를 지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이웃에 살던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청하여 그의 권고와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한성부주부·하양현감·청하현감·훈련도감낭청·양천현령 등을 역임..

황희(黃喜)

■ 황희(黃喜) 1363년(공민왕 12)~1452년(문종 2) 때의 조선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수(壽) 90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

익안대군 이방의(益安大君 李芳毅)

익안대군(益安大君, 1360년 ~ 1404년 9월 26일은 고려 말기 사람이자 조선 전기의 왕족이다. 조선 태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방의(芳毅), 자는 관이(太寬), 시호는 안양(安襄)이다.[1] 마한 안양공(馬韓安襄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신의황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다. 부인은 증(贈) 찬성사(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 철원 최씨(鐵原 崔氏)이다. 후에 마한 공정공(馬韓 恭靖公)에 추봉되었다. 익안대군 이방의 영정 태조 이성계의 세째 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의 영정이다. 도난된지 18년 만에 회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