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겸재(謙齋) 정선(鄭敾)에 대한 고찰(考察)

야촌(1) 2020. 10. 13. 01:16

■ 겸재(謙齋) 정선(鄭敾)에 대한 고찰(考察)

 

정선(鄭敾)은 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원백(元伯)이다,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시익(時翊)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고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정선(鄭敾)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영조 5)에 한성부주부, 1734년(영조 10)에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또한 자인(慈仁)·하양(河陽)의 현감을 거쳐 1740년(영조 16)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현령(陽川縣令)을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에 사도시첨정(司 寺僉正), 1755년(영조 31)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 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나 생활기록 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中人)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화원(圖畵署畵院)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선(鄭敾)은 지금까지 막연한 중국의 자연을 소재로 하던 시나 문학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산수화의 화제(畵題)는 빛을 잃고, 대신 우리 자연으로 대치하게 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마침 중국에서 밀려들어오는 남종화법(南宗畵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 기법에 접하게 되었다.

 

또 당시 유행하게 된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 사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교양을 높이거나 창작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병연(李秉淵) 같은 시인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 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 장안의 사철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仁王山)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문인지우(文人知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 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정선(鄭敾)의 작품세계는 회화 기법 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畵法)이나 채색화(彩色畵)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삼성미술관(三星美術館) 소장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완전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었다. 즉,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한다[적묵법(積墨法)].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두드러진 붓 쓰임의 한 예는 서울 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이다.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 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삼성미술관 소장의 1734년(연조 10) 작 「금강전도(金剛全圖)」(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 구도로 묶어서 그렸다.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 제작 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 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 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 금강내산의 화강암 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 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멧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 다음 이 원형 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정선(鄭敾)은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長安寺) 비홍교(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정선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畵 : 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畵)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 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畵帖) 같은 것은 선비들 간에 시 짓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 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 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었다고 한다. 

 

정선은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김씨 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衛率 :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소속된 종6품 벼슬」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된다.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

 

정선은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畵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최북(崔北). 김응환(金應煥). 김홍도(金弘道). 정수영(鄭遂榮). 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고 한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畵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한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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