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희학(權喜學)
생졸년 : 1672년(현종 13)~1742년(영조 18)
조선후기 분무공신「奮武功臣 :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 3등에 책록된 공신 및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중(文仲), 호는 감고당(感顧堂). 안동부 향리「鄕吏=아전(衙前)」권명형(權命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7년(숙종 23)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최석정(崔錫鼎)의 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교련관(敎鍊官)이 되고, 그 뒤 여러 고을의 첨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금위영교련관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안성·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난을 평정,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책록 되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다.
그 뒤 곤양군수(昆陽郡守)·운산군수(雲山郡守)·장연부사(長淵府使)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 업적이 오래도록 칭송되었다.
--------------------------------------------------------------------------------------------------------------------
■조선 후기 '인생역전'의 주인공 권희학(權喜學)은 누구?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된 '개룡남'의 전형이다. 경상도 안동부 아전의 자식으로 태어나 우연히 안동부사로 부임한 명곡 최석정(崔錫鼎,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의 대명사 지천 최명길의 손자)의 눈에 띈다.
안동 고을의 심부름꾼이었지만 한번 본 건 잊지 않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임기응변에 뛰어났던 천재적 소년 권희학을. 최석정이 시골에 묻혀두기가 아까워 서울로 데려오기로 한다.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로 집안의 기대를 잔뜩 받았으나 가난한 형편에 공부를 지속할 수 없어 시골 아전으로 늙어 죽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어야 했던 권희학은 자신의 팔자를 바꿔줄 대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또 운산군수와 장연부사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치적까지 세워 영조 임금의 총애를 얻었다. 권희학이 사망하자, 영조 임금은 그의 화상을 가져오게 하여 7일 동안 벽에 걸어두고 바라볼 정도로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사후에는 소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그를 위해 기꺼이 신도비명을 지어주었고, 1805년에는 안동의 향리와 양반은 물론 모모한 고관들의 협찬 속에 그의 공신상을 안치한 '봉강영당(鳳岡影堂營)'이 건립되었으니, 웬만한 양반들도 누리기 힘든 영광이었다.
이렇게 권희학은 양반들로부터는 냉대를, 일반 백성들로부터는 원망을 받던 향리에서 일약 일류 양반으로 부상함으로서 조선후기의 신분변동을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한 몸이 되어서도 늘 조신하였으니, 자신의 분수를 돌아본다는 의미의 '감고당(感顧堂)'이란 아호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 인물 > 옛 사람들의 초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증 초상화 (0) | 2020.10.17 |
---|---|
윤휴 초상화 (0) | 2020.10.17 |
민족 시인 이상화 초상 (0) | 2020.10.14 |
백사 이항복 진영(白沙李恒福眞影) (0) | 2020.10.14 |
양평공 이철견 진영(襄平公李鐵堅眞影) (0) | 2020.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