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채용신(蔡龍臣)

채용신「蔡龍臣, 1850년(철종 1)~1941년」은 평강채씨(平康 蔡氏)로 1886년 37세에 무과를 통해 관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초상화에 뛰어난 그의 명성이 조정대신들에게 알려져 1900년 2월, 태조 이성계의 어진 모사 시 천거를 받아 주관화사로 발탁, 궁중에서 어진화사로 활발한 활약상을 보입니다. 태조어진 봉안이후 같은 해인 8월, 화재로 선원전에 모신 역대 왕의 어진이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채용신은 태조를 비롯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조, 헌종의 어진을 모사하였으며 또한 고종의 어진과 12정승의 영정을 그렸습니다. 고종은 그에게 각종 배려와 포상을 하고 친히 ‘석강石江’이란 호를 내려주었다. 현전하는 채용신필 초상화 가운데 가장 높은 화격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주로 ..

고광선(高光善) - 개화기 유학자

현와 고광선 선생 영정/영정의 크기는 56.5 × 94cm이고 족자의 크기는 63.5 × 105.5cm로 상당히 큰 편이다. 이 영정은 석지 채용신(탈렌트 채 시라의 조부) 화백이 1926년 6월에 그린 것이다. ■ 고광선(高光善) 개화기 유학자 1855년(철종 6) 12월 23일 ~ 1934년 12월 25일 개항기 때의 유학자로 본관은 장택(長澤).자는 원여(元汝),호는 현와(弦窩). 복헌(復軒)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이다. 조부는 고재열(高濟說)이고, 아버지는 호은(湖隱) 고박주(高璞柱)이고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 기우진(奇禹鎭)의 딸로 광주 복촌(復村)에서 태어났다. 1862년(철종 13)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송독(誦讀>글을 소리 내어 읽음)에 능하였다. 1864년(고종 1) ..

고려 제2대왕 혜종 왕무

■ 고려 제2대왕 혜종 왕무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 혜종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왕무(王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 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화왕후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에 탄생하여 태조4년(921) 정윤(正胤 : 태자)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년 5월 병오 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 고려사 혜종 총서 나주 출신인 장화황후오씨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아버지의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고려 제2대왕 혜종[왕무] 사망원인

고려 제2대왕 혜종[왕무] 사망원인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小常侍側。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 《고려사》 혜종 2년의 기사 조선의 정종과 비슷한 예다.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는 늘 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두해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그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

이소한(李昭漢)

이소한(李昭漢) 조선후기「1598년(선조 31)~1645년(인조 23)」 진주목사, 예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서울 출신. 부호군 이순장(李順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며, 어머니는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한다. 1612년(광해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나가 벼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승문원주서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승진되면서부터 풍부한 학식이 정부 관료들간에 널리 인정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환도한 ..

여류시인 황진이(黃眞伊)

■ 황진이(黃眞伊) 15세기 초의 여류시인 황진이(1506(중종 1)~1543년(중종 38)은 조선 초기의 명기(名妓)로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이다. [생애]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 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朝鮮時代 功臣의 種類

朝鮮時代 功臣의 種類 공신이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던 칭호이며, 이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시대에 이미 녹공(錄功 :공신으로 봉해진 사람을 기록한 문서)을 했다는 기사가 있다. 고려 때에는 왕건이 개국에 공을 세운사람들에게 3등급으로 구분하여 각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상을 내렸으며, 공신당(功臣堂), 혹은 공신각(功臣閣)을 두어 1등 및 2등 공신의 화상을 벽에다 그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라 일컬었고, 훈전(勳田)을 내려 대대로 그 자손을 관직에 등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신들에게 초기에는 녹권(錄券)을 주어 공신증명으로 하였으나, 말기의 중흥대신에게는 녹권 이외에 따로 교서를 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조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녹훈(錄勳)된 개..

호성 공신(扈聖功臣)

호성 공신(扈聖功臣) 자료 : 조선왕조실록>선조 수정실록 제38권>선조37년(1604) 6월 25일>갑진 1번쩨 기사 ■ 호성공신(扈聖功臣)을 3등급으로 나누어 대대적으로 봉하다. 공신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다. 서울에서부터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삼고,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한 자를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삼아,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봉호(封號)를 내렸다.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는 이항복·정곤수(鄭崐壽), 2등에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이 분이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다.】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

역대 가리포 첨사((歷代加里浦僉使)

역대 가리포 첨사 명적(歷代加里浦僉使名籍) 역대 가리포첨사의 내역은 효종조 초 조빈(趙儐)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조부이신 삼도통제사(조유,趙猷, 제85대 첨사)로 부임하여 신묘년(1651)에 전임 되었고 또 숙종(1684년)에 조유(趙猷)의 사위 김중원(金重元 제104대 첨사) 통제사가 이곳을 거쳐 갔다. 지금의 주상 경종 2년壬寅(1722) 불초(不肖) 손 빈은 외람되게도 선조의 후광을 입어 본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영과 본진과는 거리가 멀지 않아 몸소 서둘러 옛 자취를 찾아보고자 나들이하기 어려웠는데도 일부러 자청하여 래진(來鎭)하였다. 손을 씻고 옷깃을 여미어 공손하게 선생안을 살펴보니 그 책이 오래되어 너무도 헐어서 새로 옮겨 써서 만들어 보자기에 싸서 상자에 넣어 정중하게 서고에 봉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