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益安大君, 1360년 ~ 1404년 9월 26일은 고려 말기 사람이자 조선 전기의 왕족이다. 조선 태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방의(芳毅), 자는 관이(太寬), 시호는 안양(安襄)이다.[1] 마한 안양공(馬韓安襄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신의황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다. 부인은 증(贈) 찬성사(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 철원 최씨(鐵原 崔氏)이다. 후에 마한 공정공(馬韓 恭靖公)에 추봉되었다.
익안대군 이방의 영정
태조 이성계의 세째 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의 영정이다.
도난된지 18년 만에 회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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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난 후 18년 만에 돌아온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영정
2000년 1월 7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전주이씨 종중의 영정각에 모셔둔 영정을 이중 잠금장치를 풀고 감쪽같이 가져가버렸다. 이 영정은 문화재 전문털이범인 서모씨가 훔쳐가 일본에서 문화재 세탁을 거쳐 국내로 들어온 뒤 18년 만에 회수되었다.
익안대군 이방의는 태조 이성계의 셋째아들이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이방우(1354~1393)이다.
그러나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한 이방우는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철원 땅으로 은거했다. 이방우는 소주로 세월을 보내가다 그만 술병으로 죽었다.
만약 맏아들 이방우가 살아서 막 개국한 조선의 2대왕으로 등극했다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 지 궁금해진다. 이성계의 둘째아들은 이방과(2대 임금 정종)이다.
셋째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는 이방원(다섯째·태종)과 이방간(넷째) 등과 함께 개국공신 1등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이방의는 정권에는 야심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태종실록>은 “이방의의 성격은 온후했으며, 술자리에서 취기가 잔뜩 올라도 결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동생 방원이 임금이 된 후에는 지병으로 두문불출했다.
<태종실록>은 “1403년(태종 3년) 태종이 병석에 누운 익안대군 이방의의 집에 가서 문병하자 이방의가 부축되어 나와 꿇어앉아 울었다”고 전했다,
또 태종이 “(병석의) 형님이 오래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돌아가려한다”고 하자 방의는 “오늘은 신(방의)이 병을 무릅쓰고 앉았으니 원컨대 술에 취해 눕는 것을 보고 돌아가셔야 한다”고 했다.
<태종실록>은 “태종이 형의 말을 듣고 그대로 머무르니 방의가 부축된 채로 춤을 추었고, 임금(태종) 또한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고 썼다,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회수된 익안대군 영정은 언제 그린 것일까?.
“1734년(영조 10년) 영조가 화공 장만득(1684~1764))을 불러 영정을 그리라고 했다”는 어필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도 화가 장득만이 전해 내려오던 영정의 원본을 참고해서 그대로 그린 이모본(移摸本)일 것이다.
아마 화가는 익안대군의 영정을 ‘뽀샵’이나 ‘보정’ 처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왕조시대의 초상화는 ‘극사실’ 기법으로 그리지 않으면 진정한 초상화라 하지 않았다.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의 정신, 즉 “터럭 한오라기가 달라도 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원칙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득만은 전해 내려오는 익안대군의 영정 그대로 그야말로 터럭 한 올조차도 옮겨 그렸을 것이 뻔하다. 이 익안대군 영정을 통해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동복형제인 정종(둘째 방과)과 태종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필자가 지난 10일 익안대군 영정의 반환식이 끝난 뒤 전주이씨 익안대군파 후손 및 정재숙 문화재청장 등과의 점심자리에서 깜짝 놀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후손들의 용모와 익안대군 영정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