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신라육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다[賜姓].서기 32년

■ 육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다[賜姓]. 임진년 신라 유리왕 9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백제 다루왕 5년(한 광무 건무 8, A.D. 32) ◈봄사로가 육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을 내렸다[賜姓]. ◇신라가 육부의 명칭을 모두 고쳤다. ◇양산부(楊山部)를 고쳐 급량(及梁)이라 하고 성(姓) 이(李)를 내렸으며, ◇고허부(高墟部)는 사량(沙梁)이라 하고 성은 최(崔), ◇대수부(大樹部)는 점량(漸梁) 일설에는 모량(牟梁) 이라 하고 성은 손(孫), ◇간진부(干珍部)는 본피(本彼)라 하고 성은 정(鄭), ◇가리부(加利部)는 한지(韓祗)라 하고 성은 배(裵), ◇명활부(明活部)는 습비(習比)라 하고 성은 설(薛)이라 하였다. 육부를 중분하여 둘로 만들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가락군 수로왕(駕洛國 首露王)이 죽다 - 서기 199년

■ 가락군(駕洛君) 수로(首露)가 졸(卒)하고, 아들 거등(居登)이 이었다. ◇기묘년 신라 내해왕 4년, 고구려 산상왕 3년, 백제 초고왕 34년, 가락 거등왕(居登王) 원년(후한 헌제 건안 4, 199) 춘3월가락군(駕洛君) 수로(首露)가 졸(卒)하고, 아들 거등(居登)이 이었다. 왕은 재위 1백 58년 만에 졸하였다. 왕의 재위 때에 백성들이 크게 교화(敎化)를 입어 사방에서 와서 이를 본받았으므로 순방지치(淳厖之治 순후한 교화가 베풀어진 세상)로 불리었다. 왕이 훙(薨)하니, 나라 사람들이 비통해 하였다. 납릉(納陵)에 장사하였는데 그 높이가 1장(丈)이고 둘레가 3백 보이며, 일명 수릉(首陵) 지금 김해부(金海府) 서쪽에 있다 이라 하였다. 매년 맹춘(孟春) 삼칠일(三七日)과 단오ㆍ중추의 5일ㆍ1..

신라 계림의 한지부에서 한 번에 4남 1녀를 출산하다(서기 193년)

■ 계림의 한지부(漢祗部)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았다. ◇계유년 신라 벌휴왕 10년, 고구려 고국천왕 15년, 백제 초고왕 28년(후한 헌재 초평 4, 193) ○춘정월 초하루(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3월 계림의 한지부(漢祗部)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았다. ○하6월 왜국(倭國)에 큰 흉년이 들었다. 신라로 얻어 먹으러 온 자가 1천여 명이었다. [자료문헌] ◇동사강목 제2상

비류국(沸流國)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 비류국(沸流國)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을유년 마한 신라 시조 22년 고구려 시조 2년(한 원제 건소 3, B.C. 36) 하6월 비류국(沸流國)이 고구려에 항복 하였다. 비류국은 비류수(沸流水)의 상류에 있다. 고구려 임금이 사냥하러 갔다가 그 나라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 임금 송양(松讓)이 나와 보며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서 여러 대를 임금 노릇하였는에,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용납할 수 없고,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 되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되라.”하니, 주몽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서로 말로 따졌고, 또한 서로 활쏘기를 하여 기예(技藝)를 겨루니, 송양이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때 국가가 새로 창업(創業)하여 의위(儀衛)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따라간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

고구려의 건국

작성일 : 2010. 08. 09 ■ 갑신년 마한, 신라 시조 21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원년 이해에는 신국(新國)이 둘이다(한 원제 건 소(建昭) 2, B.C. 37) 부여인(扶餘人) 해주몽(解朱蒙)이 졸본(卒本)으로 도망해 와 도읍하고 고구려라고 칭하니, 왕의 성이 고씨(高氏)이다. 처음에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모수(解慕潄)가 하백(河伯) 하백은 곧 군장(君長)이란 칭호이고, 반드시 옛 기록에 이른바와 같이 하수(河水)의 신(神)은 아니다. 의 딸 유화(柳花)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골격과 풍신이 영특했다. 나이 겨우 7세에 우뚝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고,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되 백번 쏘면 백번 다 맞히었다. 부여의 속어(俗語)에 활쏘기 잘하는 사람을 ‘주몽..

왜인(倭人)들의 사로(斯盧 : 신라이전의 국호)침범.

■ 왜인(倭人)들이 사로(신라이전의 국호)를 침범하여 오다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신미년 마한 신라 시조 8년(한 선제 감로 4, B.C. 50) 왜인(倭人)들이 사로를 침범하여 오다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왜국(倭國)은 사로의 동쪽 대해(大海) 가운데로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산으로 된 섬을 다 덮어 사는데, 무릇 백여 나라이다. 그 땅은 동서가 4천여 리이고 남북이 8백여 리인데, 사방으로 바다에 닿게 된다. 당초에는 곳곳이 스스로 보장(保障)하여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만들었는데, 주(周) 평왕(平王) 49년에 그 시조(始祖) 협야(挾野) 곧 그들의 소위 신무천황(神武天皇) 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모든 나라를 통합하였다. 나라 안을 나누어 다스리며 대대로 계통을 이어받으니, 중국의 봉건..

신라의 건국(新羅의建國)

■ 갑자년 마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 원년 ○ 이해에 신국(新國)이 하나이다. ○ 신라는 처음에 사로(斯盧)라 칭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뒤에 정한 이름을 쓴다. [한 선제 오봉(五鳳) 원년, B.C. 57] 하4월 진한(辰韓)의 육부(六部)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군(君)으로 세우고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하였으며, 국호를 사로라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동해(東海)가 산골짜기에 나뉘어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었는데,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突山高墟)ㆍ자산진지(觜山珍支) 간진(干珍)이라고도 한다ㆍ무산대수(茂山大樹)ㆍ금산가리(金山加利)ㆍ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이며 이것이 이른바 진한의 육부이다. 육부의 기로(耆老)가 알천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다. “우리의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일(..

마패(馬牌)의 역사

■ 마패(馬牌) 역사 및 마패 직인 문서 역마(驛馬)의 지급을 규정하는 패로써 발마패(發馬牌)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은 주로 역마를 이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명칭 마패(馬牌) 국적/시대 한국(韓國) 조선(朝鮮) 재질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크기 길>10 cm / 너비>8.6 cm 용도 및 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신표(信標) 마패(馬牌) 소장기관 학교(學校) / 전주대학교 ↑마패(馬牌). 조선 1434년. 성암 고서박물관 소장 ●유물명칭 : 마패 ◇연대 : 조선시대(1624년) ◇크기 : 경 11.8cm (출처 : 숙명여대) ●유물명칭 : 마패 ◇국적/시대 : 한국..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이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보낸 5.16 통보 서한

■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이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보낸 5.16 통보 서한 존경(尊敬)하는 참모총장(參謀總長閣下) 각하(閣下)의 충성(忠誠)스러운 육군(陸軍)은 今十六日 (세시)三時를 기(期)하여 해공군(海空軍) 및 해병대(海兵隊)와 더불어 국가(國家)의 위기(危機)를 극복(克服)하기 위(爲)하여 궐기(蹶起)하였습니다. 閣下의 사전승인(事前承認)을 얻지 않고 독단거사(獨斷擧事)하게된것을 죄송(罪悚)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국가민족(國家民族)을 구(求)하고 명일(明日)의 번영(繁榮)을 약속(約束)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방도(方途)는 오직 이길 하나 밖에 없다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信念)과 민족적(民族的)인 사명감(使命感)에 일철(一徹)하여 결사감행(決死敢行)하게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