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 무신년(1728, 영조 4)

■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이인좌(李麟佐 : 1695~1728)의 난은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所論)과 남인(南人)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李麟佐의亂)이라고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배경] 경종(景宗)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肅宗)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蓬命)에게 연잉군(延艀君 : 뒤의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老論) 측은 경종이 아들..

란후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 란 후 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전쟁을 논평하고, 대책을 강구한 이항복의 논설차문)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병조(兵曹)의 장관(長官)이 되었고 또 비변사(備邊司) 유사(有司)의 직임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야(草野)의 한천(寒賤)한 선비와는 체통과 형세가 절로 달라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참예하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양(平壤)으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이곳으로 환가(還駕)하기까지 해가 장차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소장(疏章)이 구름처럼 쌓였으나, 신만이 유독 소장을 올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재의 일에 미편(未便)함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까닭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뜻을 행하는 자리가 있고 말씀을 아뢰는 길이 있으며, 조정에 나가면 회의(會議)가 있고, 어전에 나아..

박춘(朴春)이 왜군의 포로로 잡혀 적의 장군이 된뒤 본국으로 투항하려하다

■ 임파재인 박춘(朴春)이 왜군의 포로로 잡혀 적의 장군이 된 뒤 본국으로 투항하려하다. [임피재인 박춘피로이위장후후욕투귀본국(臨陂才人朴春被擄而爲將後欲投歸本國)] 글쓴이 : 백사 이항복 임피(臨陂)의 재인(才人) 박세동(朴世同)의 아들 박춘(朴春) 또한 재인이었는데, 그는 임진년의 변란 때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적(賊)에게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공을 쌓아 장수가 되었다. 급기야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 적은 박춘을 전봉(前鋒)으로 삼아 군사 천인(千人)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러자 박춘은 전라도(全羅道)로 향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자기 옛 집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리저리 옮겨 싸우면서 곧장 임피(臨陂)의 옛 집을 찾아가 보니, 옛 집은 이미 빈 터가 되어 버렸..

1914년에 이미 한국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 1914년에 이미 한국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1919년 이전에 이미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존재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설립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가 그것이다. 3.1운동 이전에 한국 임시정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일인 1919년 3월 2일보다 5년 이전인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도 보다 연장되었다. 1914년의 한국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은 이승만(李承晩)이 아니라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이었다.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은 1914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한국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정통령=대통령, 대한민국 정부수립 뒤에도 정부통령 선거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과 정통령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했다..

천첩(賤妾)과 날이 새도록 한가하게 대화하다 - 이항복

■ 신축칠월십구일야여천첩달서한화 (辛丑七月十九日夜與賤妾達曙閑話)/이항복 (신축년 칠월 구일 날 밤에 천첩(賤妾)과 날이 새도록 한가하게 대화하다/이항복) 신축년(1601 선조 34) 7월 19일 밤에 천기(天氣)는 매우 덥고 성월(星月)은 휘영청 밝은데, 잠이 오지 않아 베개에 기대어 천첩(賤妾 : 종이나 기생의 신분으로서 남의 첩이 된 여자)과 함께 새벽까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첩이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심장(心腸)이 지나치게 강하시어 과감하게 떨쳐 버리는 일이 많으므로, 급한 때에 믿고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하였다. 인하여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첩이 말하기를, "임진년의 변란 초기에 변보(邊報)가 날로 급해진 다음에야 감역(監役)이 기종(騎從)을 첩에게 보내 대인과 만나서 결별(..

임진전란 후 여러 장군의 공적을 논함 - 이항복(李恒福)

■ 임진 전란(壬辰戰亂) 후 여러 장군의 공적을 논함-이항복(李恒福) 우리 동방(東方)에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아무리 큰 사업(事業)이나 큰 시비(是非)가 있었더라도 몇 년만 지나고 나면 깜깜하게 전하지 않아서 고증할 데가 없게 되므로, 내가 일찍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년의 변란 때에 내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평양(平襄)에 이르러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초배(超拜)된 이후 7년 동안 중외(中外)를 드나들면서 항상 중병(中兵)을 주관하였으므로, 제장(諸將)의 공죄(功罪)와 시위(施爲)와 사공(事功)에 대해서 대략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후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번(南藩)에 나가서 기억나는 것과 들은 것을 참작하여 공론(公論)에 질정해 본 결과 더욱 그 사실이 밝게 드러났으나, 세..

영윤자문(令尹子文)/초나라의 신하

■ 영윤자문[令尹子文: (楚)나라 성왕(成王:671~625)]때의 신하.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투곡어도(鬪穀於菟)이다. 세 번이나 영윤(令尹=춘추시대 초나라의 지방관) 직(職)에 임명(任命)되고 세 번 파직(罷職)을 당했으되 조금도 희온(喜慍: 기뻐하거나 성을 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며 공자(孔子)가 이를 칭탄(稱歎)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초(楚)의 3대 명문의 하나인 투약오(鬪若敖)의 아들인 투백비(鬪伯比)와 우(虞)나라 공녀(貢女)사이에 태어났다. 출생 직후 들판에 버려졌으나 호랑이가 젖을 먹여 길러 다시 데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곡(穀)이라 하고 범을 오도(於도)라 하는 초나라 말에 따라 이름을 곡오도(穀於菟)라 이름짓고 자를 자문(子文)이라 했다.영윤(令尹..

우리나라의 이름난 필예가(筆藝家)

■우리나라의 이름난 필예가(筆藝家) 통일신라시대 에는 김생(金生 : 711(성덕왕 10)~791(원성왕 7)이고 고려시대에는 문공유(文公裕)와 설경수(偰慶壽)가 가장 저명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ㆍ양사언(楊士彦)ㆍ한호(韓濩)ㆍ청선당(聽蟬堂) 한석봉(韓石峯)이다. [참고문헌] ◇성호사설 제30권 >시문문(詩文門)

상여(喪輿)

■ 현종(顯宗)의 장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喪輿) 김우명(金佑明) 장례(1675년)에 사용한 상여 ◇종목 : 중요민속자료 제120호 ◇명칭 : 청풍부원군상여(淸風府院君喪輿) ◇민소자요 지정등록일 : 1982. 08. 07 ◇소재지 : 강원 춘천시 석사동 27-1 국립춘천박물관 ◇소유자 : 국유 ◇관리단체 : 국립춘천박물관 ◇자료내용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초상때 나라에서 하사하여 사용하였던 상여(喪輿)이다. 청풍부원군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둘째 아들로서 본관이 청풍(淸風)이며 현종의 장인이다. 상여(喪輿)는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이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밝은 천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몸체에는 봉황머리와 용..

신라가 처음으로 병부령(兵部令)을 두었다./서기 518년

■ 신라가 처음으로 병부령(兵部令)을 두었다. 정유년 신라 법흥왕 4년, 고구려 문자왕 26년, 백제 무령왕 17년(북위 효명제 희평 2, 517)/서기 518년 ------------------------------------------------------------------------------------------------------------------------- 하4월신라가 병부령(兵部令)을 두었다. [안]신라에는 처음 17위(位)가 있었으나, 관부(官府) 제도는 없었다. 처음에 태보(大輔)가 국정을 주관하였고, 그 뒤에 이벌찬(伊伐飡)ㆍ이찬(伊飡) 등의 벼슬로써 혹 국정에 참여케 하고, 병마(兵馬)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 조분왕(助賁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석우로(昔于老)를 대장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