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왜인(倭人)들의 사로(斯盧 : 신라이전의 국호)침범.

야촌(1) 2010. 8. 9. 17:42

■ 왜인(倭人)들이 사로(신라이전의 국호)를 침범하여 오다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신미년 마한 신라 시조 8년(한 선제 감로 4, B.C. 50) 

 

왜인(倭人)들이 사로를 침범하여 오다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왜국(倭國)은 사로의 동쪽 대해(大海) 가운데로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산으로 된 섬을 다 덮어 사는데, 무릇 백여 나라이다.

 

그 땅은 동서가 4천여 리이고 남북이 8백여 리인데, 사방으로 바다에 닿게 된다. 당초에는 곳곳이 스스로 보장(保障)하여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만들었는데, 주(周) 평왕(平王) 49년에 그 시조(始祖) 협야(挾野) 곧 그들의 소위 신무천황(神武天皇) 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모든 나라를 통합하였다. 나라 안을 나누어 다스리며 대대로 계통을 이어받으니, 중국의 봉건(封建)과 같으나 그다지 통속(統屬)되지는 않는다.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킨 때부터 한과 교통하기 시작한 것이 30나라쯤 된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한 성(姓)으로 서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는다. 그 풍속은 문신(文身)하고 칠치(漆齒)하며, 습성이 교활하고 강한(强捍)하며, 칼을 잘 쓰고 배 다루기에 익숙하여, 이웃 나라를 노략질하기 좋아한다.

 

그 서북의 여러나라가 삼한(三韓)과 서로 가까운데, 사로가 가장 가까우므로 늘 변방의 걱정 거리가 되어 왔는데, 이때에 침범하여 오다가 왕이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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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왜사(倭史)을 상고하니, 이해는 왜황(倭皇) 숭신(崇神)의 48년이다. 《후한서》에 비로소 왜전(倭傳)이 들었다. 또 동사(東史)를 상고하니, 왜의 침범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왜의 땅은 여진(女眞) 땅 흑룡강(黑龍江)의 동쪽 바다에서 시작하여 비스듬히 신라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뻗치어서, 형상이 일자(一字)와 같다. 해도(海島) 중의 큰 나라인데, 각자 나라라고 칭하는 부속된 작은 섬이 많다.


성질이 강한하고 교활하며,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이득을 좋아하여, 배를 타고 남북으로 가서 쌀을 사 들여 오직 장사를 업으로 삼는다. 곳곳마다 무리를 지어 노략질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가 늘 그 해를 입는데, 반드시 모두가 그들의 임금의 명령으로 온 나라가 도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한 종류의 악한 무리가 있어 틈을 타서 침범하고 노략질 하는 것이니, 마땅히 교제를 조심하고 불화(物貨)를 상통하고 약속을 밝혀서, 호의(好誼)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랑캐의 성질은 믿기 어려우니, 우리의 방어하는 대책에 있어서는 하루라도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신라ㆍ백제 때에 반드시 변에 대응하여 마련해서 시행하던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현명한 임금이 덕을 지키매 사방 오랑캐가 모두 손님되어 간다.’ 하였으니, 이는 신라의 시조가 덕을 닦으매 왜인들이 두려움을 안 것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는 성패는 반드시 내부의 정사를 닦기에 달려 있다.

 

[자료문헌]

동사강목(안정복 저) > 동사강목 제1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