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독립운동

1914년에 이미 한국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야촌(1) 2010. 8. 18. 11:39

■ 1914년에 이미 한국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1919년 이전에 이미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존재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설립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가 그것이다.

 

3.1운동 이전에 한국 임시정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일인 1919년 3월 2일보다 5년 이전인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도 보다 연장되었다.

 

1914년의 한국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은 이승만(李承晩)이 아니라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이었다.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은 1914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한국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정통령=대통령, 대한민국 정부수립 뒤에도 정부통령 선거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과 정통령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했다.)으로 당선되었다.

 

대한제국 광무황제에 의해 헤이그 특사로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선생과 함께 파견된 3인의 밀사중의 정사(正使)이다.지금까지 알려진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은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이 아니라 보재 이상설이었다.

 

그동안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은 이승만으로 1919년 4월 11일 한성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 1919년 9월 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통합)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1대, 2대 수반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25년 3월 3대 수반 박은식, 9월 4대 수반 이상룡 등으로 지도권이 승계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초대 수반으로 이상설이 확인된 이상 이승만은 2대와 3대, 박은식(4대), 이상룡(5대)로 한 대씩 뒤로 밀리게 되었다. 1914년 설립된 임시정부에 관련 백과사전 항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이종호(李鍾浩), 정재관(鄭在寬)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당선되었다.

 

백과사전에 등재된 내용을 기초로 한 결과 1914년 대한광복군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보재 이상설이 당선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얼마 못가 한국광복군임시정부는 해산되었지만 3.1운동 이전에 이미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주권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의 순종황제((純宗皇帝)와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고 한일병합을 묵인하였다. 고종과 순종이 민족 지도권을 포기한 이후 1919년까지 한민족의 국가지도자 자리는 사실상 공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서 지도자 공백기간은 불과 4년으로 단축될 전망이다.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은 1914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한국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이었다. 그리고 초대 총리는 이동휘(李東輝)·였다.

 

4월 11일 총리가 된 이승만의 뒤를 이어 4월 25일 상해 임시정부의 총리, 노령 국민회의 총리, 한성정부의 총리로 임명됐던 그 이동휘이다. 1914년의 임시정부가 1919년의 상해 임시정부나 한성 정부로 바로 계승되지는 않았다.

 

비록 1914년의 대한광복군임시정부(大韓光復軍政府)가 바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구성원 중 상당수가 1919년 4월의 노령 하바로프스크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이어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나 한성임시정부도 1914년의 대한광복군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봐야 된다.

러시아 대한광복군임시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발견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단순히 5년 연장한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것이 대한제국이 멸망한지 한참 지난 뒤의 일이지만 이미 한국인 스스로가 일본의 침략통치를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보재 이상설 초대 임정수반은 비록 재임기간이 짧고 초대 주석 재직 기간 중 특이사항이 없던 점으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이라고 해서 곧 국부나 국가의 시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므로 김구나 이승만을 국부로 추종하는 측이 반발할 사유도 없다.

 

러시아 임시정부의 존재는 3.1운동 이후 활력을 받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것이다.

3.1 운동 이전에 한국의 임시정부가 존재했고, 한국의 임시정부 기관들은 3.1운동 이후 힘을 받아 활력을 띈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미 3.1운동 이전에 일제의 통치를 부정하고 한국인 스스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주권을 행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19년 3월 1일 3.1 만세운동 이전에 한국인의 임시정부가 있었고, 3.1운동 이전에 한인들은 일본의 침략식민 통치를 부정하고 독자적 주권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19년 4월의 임정수반 이승만 이전에 1914년부터 임시정부가 존재하였고 그 임시정부의 초대 임정수반으로 있었던 이상설, 초대 총리 이동휘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출처 : 플러스코리아 진실을 밝히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