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국의전통문화

상여(喪輿)

야촌(1) 2010. 8. 12. 18:31

 

 

 

■ 현종(顯宗)의 장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喪輿) 김우명(金佑明) 장례(1675년)에 사용한 상여

 

◇종목 : 중요민속자료  제120호

◇명칭 : 청풍부원군상여(淸風府院君喪輿)

◇민소자요 지정등록일 : 1982. 08. 07

◇소재지 : 강원 춘천시  석사동 27-1 국립춘천박물관

◇소유자 : 국유

◇관리단체 : 국립춘천박물관

◇자료내용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초상때 나라에서 하사하여 사용하였던 상여(喪輿)이다.

   청풍부원군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둘째 아들로서 본관이 청풍(淸風)이며 현종의 장인이다.

상여(喪輿)는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이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밝은 천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몸체에는 봉황머리와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고, 검은 천 위에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려는 의미로 보여진다.

요여(腰輿)는 혼백과 죽은 이의 이름을 적은 위패를 모셔 나르는 작은 가마이다. 긴 멜대 위에 사각형의 방처럼 생긴 몸체를 얹고 맨 위에 네 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구형의 지붕을 올렸다.

명정대(銘旌帶)는 붉은 천에 청풍부원군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깃발로서 상여의 오른쪽에 세워두었다가 시신을 운반할 때 영구 앞에 서서 행차를 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만장대(輓章帶)는 망자를 애도한 글을 적은 깃발로 명정의 뒤쪽으로 배치된다.

조선 숙종대에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궁중에서 쓰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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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명(金佑明)

     [생졸년] 1619년(광해군 11)∼1675년(숙종 1).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20년 (164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10위/합격연령 : 24世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字)는이정(以定). 시호는 충익(忠翼).아버지는 육(堉), 현종(顯宗)의 장인이다. 지(址)에게 출계했다.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참봉(江陵參奉)· 세마(洗馬)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16년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이어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總府都總管)과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였다.송시열(宋時烈)과 같은 서인(西人)이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 : 실성한 아버지 대신 손자가 상주가 된 것에 대한 대립문제)를 계기로 남인인 허적(許積)에 동조하였다.

또한, 숙종 초에 복창군(福昌君)정(楨)· 복평군(福平君)남(枏) 형제가 궁중에 드나들면서 궁녀들을 괴롭힌 사실을 들어 이들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그 뒤 남인 윤휴(尹鑴)· 허목(許穆)등과 알력이 심하여짐으로써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였다. 


 [자료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그 뒤 남인 윤휴(尹鑴)· 허목(許穆)등과 알력이 심하여짐으로써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