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 전란(壬辰戰亂) 후 여러 장군의 공적을 논함-이항복(李恒福)
우리 동방(東方)에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아무리 큰 사업(事業)이나 큰 시비(是非)가 있었더라도 몇 년만 지나고 나면 깜깜하게 전하지 않아서 고증할 데가 없게 되므로, 내가 일찍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년의 변란 때에 내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평양(平襄)에 이르러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초배(超拜)된 이후 7년 동안 중외(中外)를 드나들면서 항상 중병(中兵)을 주관하였으므로, 제장(諸將)의 공죄(功罪)와 시위(施爲)와 사공(事功)에 대해서 대략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후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번(南藩)에 나가서 기억나는 것과 들은 것을 참작하여 공론(公論)에 질정해 본 결과 더욱 그 사실이 밝게 드러났으나, 세상에는 그 실상을 분명하게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사대부들의 논의를 들어 보면 번번이 서로 모순을 일으켜서 정적(情跡)이 도치(倒置)된 자가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데 만일 이 일이 전해진 지 오래되면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는 격이 되어 시비(是非)가 천양지차로 달라지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상(上)이 일찍이 수륙(水陸) 제장(諸將)의 공을 논하여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이 해상(海上)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것과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의당 수공(首功)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곡절(曲折)은 다 드러나지 못한 것이 있다. 권 빙군(權聘君 : 장인 권율장군을 칭함)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 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로 웅치(熊峙)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熊峙)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요점을 얻었다.
그리고 원균(元均)의 경우는 다만 남을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킨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李舜臣)과는 공을 겨룰 수가 없다. 이순신(李舜臣)의 공은 당연히 수군(水軍)에 으뜸이다.
그런데 만일 그 심적(心迹)을 추구해 본다면 또한 반드시 그 공을 나누어 가질 자가 있으나, 일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문서(文書)에 나타나지 않았고, 내가 길에서 얻어 들은 말들도 꼭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내가 해진(海陣)을 왕래하면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제장(諸將)들의 용병(用兵)이 어떠했는가를 물었는데, 해진 사람들이 꽤나 상세하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영남(嶺南)이 함몰되던 날 이순신(李舜臣)은 수영(水營)에 있으면서 어찌할 계책을 몰라서 노량(露梁)의 입구에 전함(戰艦)들을 죽 배열시켜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성(城)을 수리하여 스스로 지키려 하였고, 또 본도(本道)만을 굳게 지키고 한산(閑山)의 어귀는 엿보지 않으려고 하여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일어나게 하고 몸소 스스로 달려가서 바다로 내려갈 계책을 극력 협찬해서야 비로소 이순신이 군대를 일으켰다고 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권준과 어영담이 의당 그 공을 나누어 가져야 하겠거니와, 그 공을 논하자면 이순신이 실로 수공(首功)에 해당하지만, 그 심적으로 말하자면 이순신이 이 두 사람에게 약간 부끄러운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성(城)을 지킨 공(功)으로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유독 연안(延安)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정암(李廷馣)만 일컫고 진주(晋州)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은 언급하지 않으니, 이 또한 도치(倒置 : 뒤바뀜)된 일이다.
이정암(李廷馣)의 공은 진실로 칭찬하고 장려할 만하나, 김시민(金時敏)과 똑같이 놓고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차등이 없지 않다.
대체로 이정암(李廷馣)이 상대했던 적은 흑전장정(黑田長政)으로서 그 군대는 만 명도 채 되지 않았고, 이정암이 거느린 군대는 또 수천 명을 넘었으며, 여기에 와서 회합한 여러 의병장들 또한 이정암의 군세(軍勢)와 서로 맞먹을 만한 이가 많았다.
게다가 이때 본도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공(功)을 세우지 못했는데, 오직 이정암만이 이런 공을 세운데다가 진중(陣中)에는 또 선비들이 많아서 이정암(李廷馣)의 전공(戰功)을 꾸며 작성하기가 쉬웠고, 행재소도 멀지 않아서 소식을 쉽게 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정암은 평소의 명성이 인심을 충분히 복종시킬 만하였으므로, 그 공이 크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민(金時敏)의 경우는 자기에게 소속된 군대만을 거느렸고 구원병은 매우 적은데다 상대했던 적은 소서행장(小西行長)으로서 흑전장정(黑田長政)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각채(各寨)의 여러 적들이 진영(陣營)을 통틀어 합세(合勢) 함으로써 적병(賊兵)의 수가 사군(四郡)에 널리 퍼져서 십수 만으로 헤아릴 수도 없었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산(山)을 들어서 새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은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김시민은 끝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능히 거대한 적을 물리쳤으니, 그 형세의 난이도(難易度)가 이정암의 처지에 비하면 월등히 어려웠다.
그러나 이 때는 본도가 패하여 흩어져서 그것을 보아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멀리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행궁(行宮)는 워낙 거리가 멀어서 그 소식이 미치지 못했으니, 이 일을 연안(延安)의 일과 동등하게 놓고 비유하는 것은 또한 정론(定論)이 아니다.
세상에서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의 죽음을 절의(節義)라고 하는데, 만일 왕사(王事)에 죽었다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절의(節義)라고 까지 칭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조헌 등은 일개 서생(書生)으로 팔뚝을 걷어붙이고 급히 일어나서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니, 그 충의(忠義)는 가상하다.
금산(錦山)의 싸움에 이르러서 제군(諸軍)이 어둠으로 인해 패하여 무너져서 적들이 칼을 뽑아 들고 튀어 나오자, 지세(地勢)가 험하고 협착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는 와중에 조헌(趙憲)은 난병(亂兵)에게 죽었고, 고경명(高敬命)은 마침 술에 취해 말고삐도 잡을 수 없게 되어 그 또한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그들이 패한 것을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끝내 왕사(王師 : 임금이 거느리는 군사)에 죽은 것으로 말하자면 과연 포장(褒獎)할 만하나, 만일 절의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조용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자기 지조를 잃지 않은 이로는 오직 김천일(金千鎰)과 양산숙(梁山壽) 두 사람뿐이다.
진주(晉州)가 포위되었을 때에 김천일(金千鎰)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 들어갔으니,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이 급해진 뒤에는 군중(軍中)에서 김천일이 사인(士人)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군대를 부장(副將)에게 소속시키고 성(城)을 급히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전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김천일(金千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촉석루(矗石樓) 일면(一面)을 굳게 지키다가 적병(賊兵)들이 성을 타고 올라옴에 이르러서도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조용하게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고 죽었다.
또 양산숙(梁山壽) 같은 이는 바로 시골 구석의 포의(布衣)로서 다만 김천일의 참모인(參謀人) 이었을 뿐이니, 비록 따라 죽어도 괜찮겠지만 설령 죽지 않더라도 또한 괜찮은 처지였다. 그런데 김천일이 그로 하여금 성(城)을 빠져나가서 함께 죽지 말도록 권하자, 그는 말하기를, “이미 일을 같이 하였으니, 의당 함께 죽어야 한다.” 하고, 끝내 김천일을 따라서 죽었다.
소행(素行)이 독실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의 논변하는 자들은 범범하게 이상의 네 사람을 똑같은 등급으로 치고 있으니, 이 또한 정론이 아니다. 그리고 박진(朴晉) 같은 사람은 전후로 종군(從軍)하는 동안에 황산(黃山)과 경주(慶州) 두 곳에서의 패배만 있었을 뿐이고 적봉(賊鋒)을 꺾거나 적진(賊陣)을 함락시킨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제장(諸將)들의 논의가 매양 박진(朴晉)을 으뜸으로 칭하여 감히 그와 더불어 고하(高下)를 겨룰 자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박진(朴晉)이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있을 적에 정면으로 적로(賊路)의 문호에 위치했는데도 변란을 당해서 당황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일부(一府)의 군졸로 대규모의 적군과 맞서 황산에서 적을 가로막아 직접 봉인(鋒刃)을 무릅쓰고 혈전(血戰)을 벌이다가 퇴각하였으므로, 그가 꺾여 패배한 상황을 또한 제장들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기세가 충천하여 온 도내(道內)의 크고 작은 장관(將官)들이 머리를 부둥키고 바람에 쏠리듯이 무너져서 감히 적에게 대항하도록 군대를 강력히 지휘하는 소리를 한 마디도 내는 자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박진은 시종일관의 지조로 백 번 꺾여도 돌아서지 않고 고군(孤軍)을 독려하여 충의(忠義)로써 권면하고 동서(東西)로 출몰하면서 가는 곳마다 적을 쳐부수다가 비록 누차 위태로운 지경을 당하였으나 어렵고 험난함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황(戰況)을 치보(馳報)하고 한편으로는 군대를 수습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 적정(賊情)을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박진의 첩보(牒報)가 있을 뿐이었으니, 만일 박진이 죽었더라면 영남(嶺南)의 소식은 거의 끊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상(上 : 임금) 또한 박진을 가상히 여기며 감탄하여 이르기를, “박진의 행위를 보니 다만 죽음을 면치 못할까 염려된다. 박진이 만일 죽는다면 국사(國事)는 그만이다.
박진이 어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의당 형편을 보아서 진퇴(進退)해야 하는데, 박진이 혹 이런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진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으니, 박진을 애석히 여기는 뜻이 이 말 속에 넘쳐흐른다.
박진(朴晉)은 끝내 도내(道內)의 장사(將士)들을 수습하여 점차로 진영(陣營)의 모양을 이루어서 거의 끊어져 가는 온 도내의 기맥(氣脈)을 다시 소생시켰으니, 사람마다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권응수(權應銖)는 항오(行伍) 사이에서 일어나 드러난 명성도 없이 박진의 절도(節度)를 받아서 능히 향병(鄕兵)을 독려하고 인솔하여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영천(永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적수(賊首) 7백여 급(級)을 베고 나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져서 한 도(道)의 수창자(首唱者)가 되었다.
안위(安衛)는 일개 현령(縣令)으로 이순신(李舜臣)의 분부를 받아 큰 전함(戰艦) 한 척을 가지고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명량(鳴梁)의 어귀에서 적진(賊陣)에 충돌한 다음 더욱 강력하게 혈전(血戰)을 벌이어 끝내 적선(賊船)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격파하여 물리쳤으니, 적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전라 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곧장 충청도(忠淸道)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안위의 힘이었다.
당시에 안위(安衛)의 승첩(勝捷)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한산(閑山)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장차 충청도를 곧장 범하여 바다를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이를 물리쳐 금할 사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변란이 일어난 이후 10년 동안에 걸쳐 영천과 명량의 전투를 가장 장쾌(壯快)하다고 칭하는데, 그러나 안위의 일은 권응수의 일에 비하면 또 어찌 만 배만 더 장쾌할 뿐이겠는가.
이시언(李時言), 김응서(金應瑞),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은 크고 작은 싸움을 백여 차례나 치르는 동안에 일찍이 좌절한 적이 없었고, 한마(汗馬)의 노고와 참획(斬獲)한 것이 많기로 항상 여러 장수의 선두가 되었다.
그리고 박명현(朴名賢), 한명련(韓明璉), 홍계남(洪季男), 구황(具滉), 이남(李楠) 등은 가장 굳세고 용감하다고 일컬어져서 한때 여러 장수들이 감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었다.
진영에 임하여 갑옷을 착용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박명현(朴名賢), 등을 으뜸으로 삼았으나, 그들이 종군(從軍)한 지 10년 동안 모두 특별히 지명(指名) 할만한 큰 공훈을 세운 것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조우(遭遇)의 기회가 사람마다 서로 다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가(大駕 : 임금이 타는 수레)가 서쪽으로 순행하던 때를 당해서는 사람들이 서로(西路)를 죽을 땅으로 보아서 모두 ‘끝내 반드시 적에게 유린당하여 심지어는 극도로 궁지에 빠져 모두가 아주 피폐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여러 장수(將帥)들이 서로(西路)로 가려고 하지 않고 모두 경기(京畿)와 황해(黃海)의 사이에서 그럭저럭 배회하다가 형편을 보아서 전진하거나 후퇴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임진(臨津)이 패하자 각진(各陣)의 여러 장수들이 일시에 궤멸하여 흩어져서 각기 스스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런데 오직 이빈(李薲)만은 패배한 곳으로부터 곧장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로 들어가서 함께 평양(平壤)을 지켰다. 급기야 평양이 함락되자 사람들은 모두 일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여 다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심지어 식견 있는 문신(文臣)들 또한 그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빈(李薲)은 또 정주(定州)로 물러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합하여 다시 순안(順安)에 진(陣)을 치고 적을 차단할 계책을 세웠다. 이때 행조(行朝)의 일이 급하여 교서(敎書)를 급급히 보내서 날로 여러 장수들을 근왕(勤王)하도록 불렀으나, 여러 장수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서쪽으로 가려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혹은 겉으로 근왕한다 핑계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바닷가로 내려가 첩(妾)이 사는 곳을 찾아 만나서 그를 말에 싣고 함께 돌아간 자도 있었고, 혹은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파하고 도망쳐 돌아가 관망(觀望)을 꾀하다가 징병(徵兵)하는 글을 보고는 다른 사람을 대하여 냉소(冷笑)하는 자도 있었으니, 인심(人心)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직 전라 병사(全羅兵使) 최원(崔遠)만은 자기 소속 부대를 인솔하고 서쪽으로 올라가는데, 군정(軍情)이 중도에서 크게 변하자, 하루는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50여 인을 참수(斬首)하게 하여 필사(必死)의 뜻을 보였다.
그래도 끝내 금지할 수 없게 되자, 강화(江華)로 들어가 웅거하면서 군사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1년이 넘도록 애써 지키는 동안에 굶어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으나 끝까지 마음을 변치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그 마음은 또한 충분히 가상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변란이 일어난 이후의 여러 장수들 중에는 오직 이빈(李薲)과 최원(崔遠)만이 신하된 의리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백사집 > 백사별집 제4권 > 잡기(雜記)
'■ 역사 > 국사(國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란후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0) | 2010.08.18 |
---|---|
천첩(賤妾)과 날이 새도록 한가하게 대화하다 - 이항복 (0) | 2010.08.18 |
우리나라의 이름난 필예가(筆藝家) (0) | 2010.08.14 |
왜인(倭人)들의 사로(斯盧 : 신라이전의 국호)침범. (0) | 2010.08.09 |
마패(馬牌)의 역사 (0) | 201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