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란후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야촌(1) 2010. 8. 18. 14:58

■ 란 후 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전쟁을 논평하고, 대책을 강구한 이항복의 논설차문)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병조(兵曹)의 장관(長官)이 되었고 또 비변사(備邊司) 유사(有司)의 직임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야(草野)의 한천(寒賤)한 선비와는 체통과 형세가 절로 달라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참예하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양(平壤)으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이곳으로 환가(還駕)하기까지 해가 장차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소장(疏章)이 구름처럼 쌓였으나, 신만이 유독 소장을 올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재의 일에 미편(未便)함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까닭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뜻을 행하는 자리가 있고 말씀을 아뢰는 길이 있으며, 조정에 나가면 회의(會議)가 있고, 어전에 나아가면 인대(引對)가 있으니, 의리상 당연히 들어가서는 좋은 계책을 고하고, 밖에 나와서는 조용히 그대로 따를 뿐이었고, 아뢴 계책을 드러내서 말하여 명성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혹 한 가지 쓸 만한 계책이 있으면 일에 따라서 그때그때 논의하여, 아무리 미세한 정성이나마 생각한 것이 있으면 진계(陳啓)해서 마음속에 품은 사소한 지혜까지도 남김없이 다 말씀드렸으므로, 비록 헌의(獻議)하라는 명을 받더라도 실로 채택할 만한 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무(時務)의 급한 것이나 시행과 조처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전후의 성교(聖敎)에서 대강(大綱)을 펼쳐 놓으면 여러 경(卿)들의 논의에서 세목(細目)을 매우 정밀하게 제시하여, 신의 어리석은 논설을 기다리지 않고도 강론한 것이 이미 익숙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팔로(八路)가 매우 피폐해서 대세(大勢)가 진작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재물이 고갈됨에 따라 군량은 떨어지고 배가 고픔으로 인해 군사들은 흩어져서, 일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계책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니, 다만 힘써 행함이 어떠했는가를 반성해 볼 뿐입니다.


그러나 다만 신이 걱정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습니다.

지금 의원이 병을 진찰하는 데는 맥(脈)을 살피어 증세(證勢)를 확정해서 병이 생긴 원인을 분명히 안 다음에 그 증세에 합당한 약제(藥劑)를 투여해야만 약효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병은 양명(陽明)에 있는데 음경(陰經)에 침(針)을 놓는다든지, 울화증(鬱火證)을 앓는 데다 함부로 조약(燥藥)을 복용시켜서, 진찰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여 병과 약이 서로 어긋난다면 그 통증만 가중시킬 뿐 약효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국가를 도모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지금 국가는 큰 그릇과 같아서 한 사람의 힘으로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일로 그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갑자기 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온갖 일이 다스려지지 않고, 온갖 폐단이 함께 일어나서 온갖 재변(災變)이 경계를 보여 주는데도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또 국가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온갖 일을 다 다스리고 온갖 폐단을 다 제거하여 온갖 재변에 응답해야만 일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망하게 되는 원인을 생각하고 흥하게 되는 원인을 강구하여 잘못된 과거사를 반대로 돌리어 모두 힘을 합해서 새롭게 고쳐 나가지는 않고, 이에 별도로 다른 계책을 구하려 하고 있으니, 신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국가가 변란을 만난 때로 부터 상하(上下)가 모두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이 조정에서는 공의(公議)를 하고, 항간(巷間)에서는 무리지어 이야기를 하였는데, 변란을 부른 까닭을 추구해 보았으나 그 연유를 알아 내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의논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의 번폐(藩蔽)가 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중국을 도모하려고 하면 조선은 기필코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땅이다. 그런데 평수길(平秀吉)이 흉악한 계책을 기르고 거만(巨萬)의 군대를 훈련시켜서 갑자기 쳐들어왔으니, 강약(强弱)의 차이가 너무나 동떨어진다. 

 

이 때를 당해서는 비록 문왕(文王), 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위에 계시고, 주공(周公), 소공(召公) 같은 이가 밑에 있으며, 장량(張良), 진평(陳平), 제갈량(諸葛亮) 같은 이가 안에서 모의를 완벽하게 하고, 한신(韓信), 경포(黥布), 항량(項梁), 항적(項籍) 같은 이가 밖에서 있는 힘을 다하더라도 옛날 주 태왕(周太王)이 적인(狄人)을 피해 빈(邠) 땅을 떠난 것과 같은 행행(行幸)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항간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정(政)은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지금은 백성을 해치고, 신(信)은 백성을 자립시키는 것인데 지금은 신의를 잃었다.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킴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이 생기고, 부역(賦役)이 중해짐으로써 백성들이 탄식을 하는 실정이니, 나라가 실로 잘못된 정사를 하고 있는데, 백성이 어떻게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만사가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버린 것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살펴보면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을 사랑하여 좋아하는 것에 공변됨이 가리워지고, 서민들은 강포(强暴)하여 임금을 지나치게 원망하고 있으니, 상하(上下)의 서로 다른 의논이 모두 그 요점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 두 가지 의논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싸움을 벌여 가면서 밤낮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倭)가 감히 중국을 엿보지 못한 것은 조선이 중국의 한폐(扞蔽)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강성(浙江省)을 경유하여 곧장 공격해 가자면 천 리나 먼 바다를 건너게 되고 길은 먼데다 수비(守備)도 있게 되지만, 우리 나라를 얻어서 계획을 시행할 경우 하루 동안의 순풍(順風)만 타면 무방비 상태인 중국에 곧장 출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가령 평수길(平秀吉)이 지혜가 있는 자일 경우에는 조선은 참으로 반드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연전에 처음으로 적(賊)의 서계(書契)를 보고 즉시 이런 뜻을 탑전(榻前)에서 진계(陳啓)했는데, 당시 한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신더러 오활하다고 하였고, 상께서도 꼭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체로 수길은 교활한 적입니다.

몸소 해도(海島)에 숨어 있으면서 이미 천하(天下)의 형세를 간파하고 마치 직접 가서 본 것처럼 계획을 작성하였거니와,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사자(使者)를 연달아 보내서 모든 동정(動靜)을 더욱 자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쳐들어온 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격노(激怒)하여 군대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에 앞서 우리의 허실(虛實)을 탐지하여 강약(强弱)을 헤아려 본 결과 이용할 만한 약점은 있으나 갑자기 도모할 만한 힘이 없음을 알고 난 다음에야 지금 군대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서 급격히 진군(進軍)하여 우리 나라를 이토록 유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가령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지(宗義智)가 왔을 때 우리 나라가 군신간(君臣間)에 서로 믿음이 있어 조정(朝廷)이 서로 화협하고, 기율(紀律)이 엄숙 명백하여 군정(軍政)이 잘 닦여졌으며, 상벌(賞罰)이 모두 타당하게 시행되어 온갖 기예(技藝)가 다 극도로 숙련(熟練)되어 있는 등, 저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는 만반의 준비를 먼저 하여 저들에게 보여 주었다면, 서계(書契)의 패악스러운 말도 굳이 계교할 것이 없었습니다.  

 

종의지가 재차 오는 것도 굳이 거절할 것 없이 예의를 갖추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더라도 저들이 스스로 전쟁을 그만둘 줄을 알게 되어 단정코 오늘의 변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살펴보니, 상하(上下)의 정의(情義)가 서로 막혔고, 조정의 분위기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며, 기율이 밝지 못하여 군정이 실추되었고, 상벌이 중정의 도리를 잃어서 온갖 기예가 태만해졌으며, 심지어는 오랑캐의 사자(使者)로 하여금 겁이 나서 숨을 죽이고 왔다가 곁눈질로 노려보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기필코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땅에 앉아서 저들이 이용할 만한 약점을 보여 주었으니, 적이 쳐들어 오지 않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변방(邊方)에서 사소한 경보(警報)가 한 번 있자 열군(列郡)이 마치 쥐가 달아나 숨듯, 서로 도망치는 데에 미쳐서는 사람마다 윗사람을 친애하는 마음이 없고, 백성들은 이반(離反)하는 뜻을 가지어, 임금의 과실을 캐내서 원망하고 욕하는 소리가 길에 그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망하여 이반한 백성들을 몰아서 잘 교련(敎鍊)된 적군(賊軍)을 방어하게 하였고, 게다가 강약의 차이가 월등함으로 인해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방이 먼저 함락되었으니, 이때 백성들이 창을 반대쪽으로 겨누지 않고 스스로 패하여 무너지기만 한 것은 요행이요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적추(賊酋)가 인의(仁義)를 빙자하여 거짓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무(慰撫)했더라면 인심(人心)의 거취(去就)에 있어 혹은 저들의 편을 든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나는 곳마다 잔인하고 포악한 짓을 마구 하였고, 도성(都城)에 들어와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 적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안 다음에야 각각 자신을 위하는 계책으로 일어나서 서로 적에게 대항하게 되었고, 이를 이어서 천병(天兵)의 위세(威勢)가 그들을 두려워 떨게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백성들을 도륙(屠戮)시킨 것이 적의 입장에서는 방도를 잃은 것이요. 우리 나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나라를 회복시킨 것은 인력(人力)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지금 적들이 물러간 뒤에도 지난날 항간에서 의논하던 자들은 아직까지 강포한 노염을 품고서 나라가 망한 것을 오로지 임금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임금을 지나치게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논하던 인사들에 이르러서도 아직까지 지난날의 미혹된 판단을 고집하여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천운(天運)이 떠나지 않고 민심(民心)이 조국을 생각한다면 적(賊)이 아무리 인심을 얻고 천병(天兵)이 비록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는 자연히 흥복(興福)되는 것이다.” 하면서, 중흥(中興)의 큰 공훈을 국가가 스스로 취한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자못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나라가 망하게 되거나 흥하게 되는 까닭을 전혀 강구(講究)하지 않아서 아직도 지난날의 잘못된 행위를 반대로 돌려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도 가까이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허망되고 요원한 데에서만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국사(國事)가 마치 통증이 일어난 후에 환자의 육맥(六脈)을 미처 진찰하지 않아서 병증(病證)을 확정짓지 못한 채 무턱대고 조약(燥藥)을 쓰다가 열(熱)만 더 조장시킴으로써 양명(陽明)의 병세가 약과 서로 어긋나게 되는 것과 같은 꼴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헌의(獻議)에서 다른 계책을 찾으려고 한다면 진언(進言)하는 자가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조항을 가지고 사람의 머릿수대로 세금을 거둬들이면 군수(軍需)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아무 도(道)에서 군대를 뽑으면 군세(軍勢)를 조장할 수 있다. 

 

적이 물러가면 의당 아무 성(城)을 쌓아야 하고, 일이 안정되면 의당 아무 병기(兵器)를 수선해야 한다. 조총(鳥銃)과 칼 꼽은 대창[筤筅]은 적(敵)을 제어할 수 있고, 높은 보루(堡壘)와 험고한 성책(城柵)은 적(賊)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평상시에도 국가에서 이것을 강론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갑자기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멀리서 적을 바라만 보고도 바람에 쏠리듯이 흩어져 달아나는데, 창고를 불지르고 떠나는 자는 곡식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고, 줄을 타고 성(城)을 내려가는 자는 성루(城樓)와 성첩(城堞)이 높은 것을 걱정하며, 병기(兵器)를 이끌고 달아나는 자는 오직 병기의 예리함을 염려할 뿐입니다.

 

그래서 무고(武庫)를 완전하게 수리하는 것은 다만 무기(武器)를 적에게 빌려 주는 행위가 될 뿐이고, 창고에 곡식을 많이 쌓아 두는 것은 모두 도적에게 군량(軍糧)을 보태 주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얻어서 잘 지키면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 같은 요새가 평지에서 생겨날 수도 있거니와, 방법이 없이 적을 방어하려고 하면 골육(骨肉)도 시호(豺虎)처럼 사납게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지금 굳이 먼 옛날의 일을 끌어댈 것도 없이 우선 눈앞의 일로 증거를 대 보겠습니다. 해주(海州)에서 험고하기로는 연안(延安)만 한 데가 없고, 도성(都城)에서 험고하기로는 행주(幸州)만한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개 진주성(晉州城)이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김시민(金時敏)은 홀로 지키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서예원(徐禮元)은 군대를 더 지원받고도 부족하였습니다.

 

무기가 많기로는 도성의 무고(武庫)만한 데가 없으나 적이 도성에 들어왔을 때는 감히 그들을 검문(檢問)할 자도 없었는데, 황폐한 초야의 인사들이 작은 무기 하나라도 가진 것은 없었지만 의기(義氣)가 북받쳤기에 혹은 적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성은 참으로 쌓지 않을 수 없고, 못[池]은 참으로 파지 않을 수 없으며, 무기는 참으로 견고하게 수선하지 않을 수 없으나, 옳은 방도를 얻으면 공고(鞏固)해지고, 방도를 잃으면 정사가 어지러워지며, 정사가 어지러워지면 백성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니, 백성이 이미 흩어지고 나면 비록 높은 성이 있더라도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습니까.

 

정사를 바로세워서 백성을 보존하는 방도는 다만 힘써 행하려고 뜻을 기울이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계책을 아뢰어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곧 아뢴 말을 폐기한다고 하는 것이고, 받아 들이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이것은 또한 빈말[空言]이 되는 것이며, 행하면서도 힘써 행하지 않으면 중도에 나태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을 듣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을 쓰기가 어려운 것이고, 말을 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쓰면서도 힘써 행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임금이 학문(學問)을 힘써 행하면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덕이 날로 진취되며, 정사(政事)를 힘써 행하면 백공(百工)이 서로 면려하여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훌륭한 계책을 힘써 행하면 여러 가지 계책이 들어오고, 뭇 사람의 생각이 결집되는 것이니, 뭇 사람의 생각이 결집됨으로써 총명(聰明)함이 넓어지고, 여러 가지 계책이 들어옴으로써 온갖 정사가 잘 거행되는 것입니다. 정사를 하는 방도는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고 힘써 행하지 않아서 한 마디 말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문득 사색(辭色)에 드러내고, 비록 억지로 위유(慰諭)를 한다 해도 의례적으로 해관(該官)에게 내려 버린다면, 구언(求言)의 분부를 날로 내린다 하더라도 말하는 이는 날로 멀어질 것입니다.

 

혹 이와 반대로 허심탄회하게 아랫사람의 말을 채납(採納)하되, 사람들의 장소(章疏)를 보는 데 있어 항상 계(啓) 자를 찍지 않은 것과 성상의 뜻에 거슬리는 곳에 대하여 반드시 반복해 읽어서 깊이 뜻을 기울여야 할 것이요, 화평한 얼굴로 읽어 내려가면서 가상히 여겨 칭찬할 만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한 반드시 속으로 반성하여 도리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좋은 계책을 얻어서 이것을 미처 다 실행하기 전에 오히려 또 좋은 계책을 들을까 염려하신다면, 훌륭한 말이 날로 이름에 따라 이것을 날로 정사에 시행하는 가운데 이것이 사지(四肢)에 달하고 혈맥(血脈)에 통해서 천하 국가(天下國家)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일, 한 가지 정사가 어디를 가나 좋은 계책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지금 비록 누차 장수를 선발하였으나 장수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재목이 없어서이고, 비록 누차 말을 구하였으나 말을 올리지 않는 것은 좋은 계책이 없어서이며, 전하가 자신을 탓하는 하교가 전후로 연달아 내렸으나 백성들이 감동하지 않는 것은 풍속이 사납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임금의 성의(誠意)가 지극하지 못하고 행하기를 힘쓰지 않아서, 실지에 입각하여 사람들에게 진실한 노력의 효과를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므로, 은미한 가운데서 조짐이 일기만 하면 이미 아주 밝은 데에 나타나서 사방(四方)에 유행하고 상하(上下)에 통달하는 것이니, 화복(禍福)의 사이에 전이(轉移)되는 기틀이 오로지 여기에 있습니다.

 

우선 신의 귀와 눈으로 보고 기억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모두 네 번 변하였는데, 첫번에는 변해서 맑아졌고, 두 번째는 변해서 각박해졌으며, 세 번째는 변해서 추잡해졌고, 네 번째는 변해서 더러워졌습니다.


즉위(卽位)하신 처음에는 곳곳마다 도(道)를 담론하고, 사람마다 책을 끼고 학문에 힘쓰며, 안색을 단정히 하고 걸음걸이를 점잖게 하여 옛 풍속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론(士論)이 한 번 갈라짐으로부터 각기 서로 남의 은미한 흉허물을 끝까지 찾아내어 일어나서 서로 공격을 함으로써 충후(忠厚)한 기상(氣象)은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계미년(1583 선조 16) 이후로는 유장(儒將)을 존중하여 등용함으로써 유생(儒生)들은 무예(武藝)를 익히고 명사(名士)들은 병사(兵事)를 담론하여 집집마다 책상 위에 모두 궁전(弓箭)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년 이래로는 죄를 지은 자는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죄를 면하려 하고, 출세의 길이 침체된 자는 각각 부정한 문로를 통해 등용되기를 희망하며, 명류(名流)나 대관(大官)들은 왕실의 폐척(嬖戚)과 결탁하기를 바라서 남의 치질을 핥는 것보다 더 심한 아첨을 하면서도 전혀 후안무치한 상태이니, 세도가 더러워진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고 들은 데서 얻은 것이 아니며,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부녀자들도 모두 항상 말하는 바입니다. 인심의 향배(向背)는 상(上 : 임금)의 지향하는 곳을 보아서 정해지므로, 아주 밝은 데에 나타난 것은 곧 은미한 상의 마음에 대하여 메아리처럼 응한 것이니, 지금 만일 성심으로 인재를 구한다면 어찌 인재를 다른 시대에서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상께서 몸소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면 명령을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가르침을 따를 것이니, 깊고 은미한 가운데서 통렬히 스스로 자신을 책망한다면 자신을 탓하는 하교를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이 먼저 감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백성들이 날로 더욱 흩어지고, 나라가 날로 더욱 깎이며, 일이 날로 더욱 실패되는 경우를 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가장 큰 요점은 힘써 행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고, 지금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또한 상하(上下)의 뜻이 서로 막히고 조정이 화합하지 못한 것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이 한 가지 요점을 굳게 지키고 저 두 가지 걱정거리를 제거한다면 그 나머지 절목(節目)들은 모두 강론할 것도 못 됩니다.  

 

대체로 아무리 총명(聰明)하여도 나라를 혼자서는 운영할 수 없고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야만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금의 공통적인 논의이며 필연적인 이치이니 신이 오늘 새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의 재상들이 모두 먼저 스스로 닦고 신칙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서 이것을 도리어 임금을 존경하여 예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여겨 먼저 비밀을 캐내는 방법을 베풀어서 그들의 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상께서 마음을 터놓지 않고 아랫사람들과 담을 쌓아 대치하시면 아랫사람들이 먼저 의혹하여 상의 심중을 탐색하여 시험하게 되는 것이니, 고식적이고 구차하게 일시적인 미봉책만을 강구하는 행위가 참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근세에 중용(重用)된 신하들은 처음에 군신(君臣)이 서로 잘 만나서 분발하여 힘써 국사를 담당하다 보면 뭇 사람의 비방이 마구 일어나서 끝내 이것으로 죄를 얻었는데, 그 잘못된 전철(前轍)을 뒷사람이 또 밟곤 하여 서로 연달아 한 구덩이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국사에 힘쓰는 자는 먼저 관재(官災)를 받게 되고, 이름도 없고 모남도 없는 자는 끝내 많은 복을 누리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눈으로 직접 보아서 밝은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조(公朝)의 대회(大會)에서 매양 성교(聖敎)를 받들 때에 이르러서는 좌우로 곁눈질을 하면서 마치 서로 말이 없는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비록 성교의 사지(辭旨)가 화평하여 더 이상 다른 뜻이 없더라도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어서 뜻밖의 뜻을 찾곤 합니다.

 

그리고 성교에 대답할 때에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매우 신중히 놓아서, 혹시라도 성상의 진노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절실한 말은 깎아 버리고 애써 모호하게 얼버무려서 마치 과시(科試)에 응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리하여 구차하게 견책(譴責)을 면하고 물러가 집에 돌아가서는 각기 품은 생각을 토로하면서 그 생각을 조정에서 다 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곤 합니다. 이 어찌 전후의 재상(宰相)들이 모두가 용렬한 위인이어서 그렇겠습니까. 실상은 상하(上下)가 서로 간격을 쌓은 것이 이미 풍습을 이룬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선(善)을 개진한다면 어찌 생각한 바를 다하겠으며, 이런 자세로 국사를 도모한다면 어찌 깊이 품은 계책을 다 발휘하겠으며, 이런 자세로 사람을 천거한다면 어찌 아는 바를 다하겠으며, 이런 자세로 사람을 논한다면 어찌 미워하는 바를 다하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삼공(三公)을 두었더라도 인원을 채운 데에 불과할 뿐이니, 국사가 문란해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권간(權姦)이 나라를 해칠 경우에는 그 병폐를 받는 것은 비록 깊으나, 정사는 한 군데서 나오기 때문에 일은 많이 단서를 이루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 분개하고 원망하는 말로 쇠퇴한 세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비록 뛰어난 슬기를 지닌 사람을 얻어 쓰지는 못할지라도, 만일 허물이나 없는 평범한 사람을 얻어서 작은 과실은 따지지 말고 외인(外人)의 말에 동요되지도 말고 직임을 맡겨 주어 성취하기를 책임지운다면 반드시 오늘날처럼 질서가 없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상하가 서로 막힌 것을 오늘날의 제일가는 걱정거리로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고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에 대한 설(說)에 이르러서는 말을 하자면 이가 아프므로 지금 다시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온 나라에 만촉(蠻觸)의 전쟁이 일어나서 원기(元氣)가 날로 피폐해지고, 붕당(朋黨)을 갈라 서로 헐뜯음으로써 공론(公論)이 절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세력을 얻은 자가 위엄을 떨치면 그가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다녀도 남들이 그를 비웃지 않고, 세력을 잃은 자가 외로이 한쪽 구석에 있으면 그가 단정히 앉아 있어도 온 나라가 그를 비난합니다.

 

그래서 나라에 공론이 없는 것이 마치 배에 노가 없는 것과 같아서, 심지어는 작은 감(監)이나 하급 관사(官司)의 한 가지 일, 한 마디 말도 걸핏하면 서로 견제하여, 대소(大小)의 관원(官員)들이 손만 놀려도 법에 저촉되므로, 각자 숨을 죽이고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조정이 화협하지 못한 것을 제2의 걱정거리로 여기는 바입니다.

 

설령 오늘 힘써 행하여 명일에 군신(君臣)의 사이가 서로 간격이 없어지고 또 명일에 조정이 서로 화합한다 하더라도 적(賊)이 반드시 그 즉시 물러가지는 않겠지만, 그 병통을 받은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 근원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병통을 치유하려고 생각하면 먼저 그 근원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우리 동방을 보우하심에 따라 환연(渙然)히 깨달으시고 나라에 크게 명(命)을 내리어, 좋은 계책을 힘써 행하고 적합한 사람을 얻어 직임을 맡겨서, 뭇 신하들을 면려하여 그 마음과 힘을 하나로 단합시킨다면,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전쟁을 말할 수 있고, 지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나라 다스리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계책이 행해지고 나면 그 상세한 절목(節目)들은 차례에 따라 절로 거행될 것이니, 굳이 마음과 힘을 써서 억지로 강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빈청(賓廳)에서 일상적으로 일에 따라 조목조목 열거해서 진술한 것 외에 한두 가지 진술할 것을 아래에 조목조목 열거하는 바입니다. -올리지 않았으므로 조목을 열거한 부분은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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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文] 

 

白沙先生別集卷之四>雜記

 

臣以不才。待罪本兵。且兼備邊司有司之任。其與草莽寒賤。體勢自別。事無大小。皆所與聞。故自平壤至義州。旋軫于此。歲將再更。章䟽如雲。臣獨闕然者。非謂當今之事未有未便。盖以行志有位。進言有路。朝而有會議焉。進而有引對焉。義當入告而順外。不欲顯言而買之。間有一得。隨事輒論。雖微甚芹曝。有懷則陳。囊底小智。皷盡無餘。雖承獻議之命。實無可採之言。其於時務之急。施措之宜。前後聖敎。張踢大綱。諸卿所論。目理甚密。不待瞽說。講之已熟。而只緣八路瘡殘。大勢不振。粮匱於財盡。兵散於枵腹。事未就緒。以至於此。謀非不多。顧力行如何耳。第臣所憂者。不于此而于彼。今夫醫門胗疾審脉定證。知病之所由生。然後投之當劑。百無不効。若病在陽明而針及陰經。傷於痞憫而妄進燥藥。胗視不明。病藥相戾。則祇益其痛而難以收功。雖存乎圖國。亦若是焉。今夫國。大器也。非一夫所能傷。非一事所能誤。又非一朝一夕之所能猝然而亡之也。其將亡也。必有百事不理。百弊俱興。百灾示警。而人不覺悟。以至於此也。其將興也。必能盡察百事。盡祛百弊。以答百灾。事乃可集。今不思所以亡。講所以興。反前之爲。咸與更化。而乃欲別求他策。臣所未解也。自國家遭變。上下遑遑。大小臣庶。公議于庭。耦語于巷。究其致亂而不得其由。庭議者曰。朝鮮。中國之藩蔽也。欲圖中國。朝鮮爲必爭之地。秀吉畜謀養兇。鍊兵巨萬。猝然入寇。强弱懸殊。當此之時。雖文,武在上。周,召在下。良,平,諸葛。畢議于內。信,布,梁,籍。輸力於外。遷邠之擧。不得不已。巷語者曰。政所以養民。而今者害之。信所以立民。而今者失之。土木興而嗟怨生。賦役重而民愁嘆。國實有疵政。民焉能戰。一敗塗地。萬事瓦裂者。無乃是歟。於是庭臣愛君。蔽於所好。小民强暴。過於怨上。上下異議。咸失其要。臣執此二者而交戰于心。晝夜以思。倭所以不敢窺中國者。以朝鮮爲之扞蔽也。由浙▣而直擣。則越海千里。路遠而有備。得我國而經營。則風便一日。01出於不虞。如使秀吉有智。朝鮮誠必爭之地。故臣於頃年。初見賊書。卽以此陳於榻前。而當時在席者。皆以爲迂。自上亦以爲未必如此也。夫秀吉。猾賊也。身伏海島。固已揣摩天下之形勢。而爲之籌度。如履親覩。其於我國。則往返相望。凡所動靜。得之尤詳。今之來寇。非一日暴怒而動兵。必且探得虛實。稱量强弱。知有釁之可乘而無力以圖猝。然後起而跨海。一皷而蹂之。如使我國當其義智之來。君臣相信。朝廷協和。紀律嚴明。軍政修擧。賞罰咸得其宜。百藝咸精其能。先爲不可勝。以示於彼。則書契悖語。不必較。義智再來。不必絶。拱手揖讓而彼自知戢。保無今日。今也不然。入國而觀之。上下之情義阻隔。朝廷之氣象携貳。紀律不明而軍政廢。賞罰失中而百藝怠。至使夷使。屛氣而來。睨視而歸。處必爭之地。示可乘之端。而欲敵之無來也難矣。及夫邊塵一驚。列郡鼠竄。則人無親上之心。民有得反之志。捃摭君過。怨罵盈路。驅怨叛之民。禦敎鍊之戎。加之以强弱懸殊。根本先拔。民之不倒戈而自潰者。幸也匪灾也。萬一賊酋托義假仁。僞撫愚民。則人心去就。或有右袒。而所過便行殘暴。入都四散搶掠。民知此賊之不可與並居。然後各爲身謀。起而相格。而繼有天聲。爲之震疊。以此言之。民之屠戮。賊之失道。而我國之幸也。臣以爲復國。非人力也。今賊退之後。前日巷議者。尙懷强暴之怒。以國之亡。專罪於君。則誠過於怨上。至於庭議之士。猶執前迷。相卛而言曰。天運未去。民心思漢。則賊雖得人心。天兵雖不來。國家自然興。殊不知中興大勳。非國所自辦。而至於所以亡。所以興之由。專不講究。尙不思所以反前之爲。凡所■籌畫。在邇不見。求於虛遠。臣恐痛作之後。六脉尙未胗。病證尙未定。燥藥適足以助熱。而陽明之二竪。與藥相戾也。今欲求他策於獻議。則進言者。必曰某條會斂。則可以資軍需。某道抄兵。則可以助軍勢。賊退則當築某城。事定則當繕某器。鳥銃筤筅。可以制敵。高壘險柵。可以防賊。平時國家非不講此。猝然有警。望風披02。焚倉而去者。嫌其積聚之多。縋城而下者。憫其樓堞之峻。曵兵而走者。惟恐器之尖利。武庫之所繕完。祇藉寇兵。幣藏之所儲峙。皆資盜粮。故得人而守之。崤函起於平地。無法以禦之。骨肉化爲豺虎。今不必遠引古昔。姑以目前證之。海州之險。孰如延安。都城之固。孰如幸州。晉州一城。前後當敵。金時敏獨守而有餘。徐禮元添兵而不足。器械之多。無如武庫。賊入都城。莫敢誰何。荒野之士。手無寸鐵。義氣所激。或能殺賊。以此言之。城固不可以不築。池固不可以不鑿。器械不可以不繕完。得道則鞏固。失道則政亂。政亂則民散。民旣散。雖有高城。君03與守之。立政保民。只在勉强力行。加之意而已。夫謀而不納。是謂廢之。納而不行。亦爲空言。行而不力。中道而隳。故聽言非難。用之爲難。用言非難。用而力行之。爲尤難也。人君力行學問。則智益明而德日進。力行政事。則百工勉而萬事理。力行嘉猷。則羣策來而衆思集。衆思集而聡明廣。羣策來而庶政擧。爲政之道。如斯而已。其或不然。而行之不力。一言忤旨。輒加辭色。雖强慰諭。例下該官。則求言日下。言者日遠。其或反是。而虛懷採納。見人章䟽。常於不踏啓字。及聖意觸拂處。必反覆而三致意焉。至於和顔讀下。曲加嘉奬處。則亦必內省而求諸道焉。得一善策而行之未盡。猶恐有聞。則嘉言日至而日施諸政。達於四肢。通於血脉。以至於天下國家。一事一政。無所往而非善謀也。說者曰。今雖累選將。將不登。無將才也。雖累求言。言不進。無良謀也。罪己之敎。前後相望而民不感動。風俗惡也。是皆誠意未至。行之不力。不能脚踏實地示人眞功也。人主之心。萬化之源也。兆於冥冥。則已現於昭昭。流於四方。達於上下。轉移之機。亶在於是。姑以臣之耳目之所覩記者言之。數十年來。人心世道。凡四變焉。一變而淸。再變而薄。三變而麤。四變而汚。卽位之初。處處談道。人人挾冊。正色徐趨。舊風大變。自士論携貳。各相疵嗸。鉤深摘微。起而相攻。忠厚氣象。蕩然掃地。癸未以後。尊用儒將。靑衿挾矢。名士談兵。家家几案。皆有弓箭。近數年來。負罪者皆思曲免。沉淪者各希斜逕。名流大官。求結嬖戚。諂甚吮癰。靦顔忘恥。世道之汚。一至此哉。此在目前。非待於聞。尺童愚婦。皆所恒言。而人心向背。視上所指。其現於昭昭者。響應於冥冥。今若心誠求材。何借於異代。以身先之。不令而行。幽深隱微之中。痛自刻責。則不待罪己。民先感動矣。如此而民日益散。國日益削。事日益墮者。臣未見也。是故。今之大要。莫先於力行。而今之大患。亦莫先於上下意阻。朝着不協。執此一要。去彼二患。則自餘節目。皆不足講也。盖雖有聡明。不能獨運。明良相遇。事克有濟。此古今之通論。理勢之必然。非臣今日創爲新說也。近世宰相。皆不能先自修飭。以格君心爲所尊禮。則誠有罪也。待遇之道。不宜謂彼有隱。先設鉤距。以疑其心也。上置城府。對壘於下。下先疑惑。探試於上。姑且悠泛。良由於是。竊觀近世柄用之臣。始焉際會。奮勵擔當。則羣謗橫生。終以獲罪。前轍旣覆。後亦蹈之。項背相望。同歸一坑。故力於國事。則先受官灾。無名無稜者。終享厚福。人皆目見以爲明鑑。至於公朝大會。每承聖敎。則左右睨眴。密若無言。雖辭旨平和。更無餘意。必再三讀下。意外求意。上對之際。一字難愼。恐誤批鱗。减削實語。務存糊塗。如應科試。苟免譴責。退而歸家。各陳所懷。恨不得伸。此豈前後宰相皆庸才也。實由上下積阻。已成流風。以此陳善。豈盡所思。以此謀國。豈盡底蘊。以此薦人。豈盡所知。以此論人。豈盡所惡。雖置三公。備貟而已。國之渙散。職此之由。諺曰。權姦蠧國。則受病雖深。政出於一。事多就緖。此皆憤惋之辭。衰世之語也。今雖不得上智而用之。如得無咎平人。不錄小過。不搖外言。委任責成。則必不如今日之無倫。臣故以上下阻隔。爲今日第一患也。至於東西之說。言之酸齒。今不當更陳。而擧國蠻觸。元氣日困。分朋醜詆。公論自㓕。得者鴟張。則被髮而人不笑之。失者向隅。則端拱而擧國非之。國無公論。猶舟捨楫。甚至小監下司。一事一言。動相牽制。大小之官。搖手觸禁。各自屛息。苟苟度日。臣故以朝着不協。爲第二患也。設令今日勉强力行。明日君臣相得。又明日朝着相和。賊未必卽自退遁。究所以受病之源。則皆在於是。而思所以醫病之方。則先理其源。幸而天祐我東。渙然覺悟。大戒於國。勉强而力行之。得人而委任之。砥礪羣臣。一乃心力。如是而國亡者。未之有也。如此然後。可以言戰。可以言守。可以言治國。三策行然後節目之詳。次第自擧。不必勞心力强求之也。姑以賓廳日用隨事陳列之外。一二陳言。條列于左。 未上條列闕 <끝>


[01]經 
[02]摩 
[03]雖 

 

출전 : 백사집(白沙集) >白沙先生別集卷之四 >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