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151

요(堯) - 중국 전설상의 성천자(聖天子)

■ 요(堯) : 중국 전설상의 성천자(聖天子) 중국 전설상의 성천자(聖天子). 요(堯)의 성은 이기(伊耆)요. 이름은 방훈(放勛), 호는 도당씨(陶唐氏), 또는 제요(帝堯), 당요(唐堯)라고도 한다. 그는 어질고 덕망있는 사람들을 초빙해서 국정을 보좌케 했다. 그리하여 후직(后稷)은 농사(農師)를, 수(人+遂)는 공사(工師)를, 고요(皐陶)는 법관을, 기(夔)는 악관(樂官)을, 순(舜)은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를, 설(契)은 군대를 담당하는 사마(司馬)를 각각 맡았다. 이리하여 천하는 태평해지고 비와 바람도 순조로와져, 백성들은 모두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어린 자식같이 사랑하는 정치(政治)를 함으로 모두 격양가(擊壤歌)를 불렀다함. 7년의 홍수(洪..

동방삭(東方朔)

■동방삭『東方朔 (BC154~93)』 / 三千甲子를 살았다는 익살의 文人 전한(前漢)의 제(齊)나라 태생. 무제(武帝)때의 문인으로. 字는 만천(曼倩). 기언기행(奇言奇行)으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아 수십 년간 측근으로 있으면서 태중대부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까지 올랐다. 재산을 모두 미녀들에게 탕진했으며, 광인이라고 불렸다. 한때 부국강병책을 상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하여 《답객난(答客難)》·《비유선생지론(非有先生之論)》을 비롯한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한대(漢代)부터 그에게 황당한 글들을 가탁(假託)하는 것이 유행하여 지금도 《신이경(神異經》·《십주기(十洲記》가 그의 저서(著書)로 전해지지만 모두 진(晉) 이후의 위작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를 먹어 대단히 오래 ..

곽광(藿光)-중국 전한(前漢) 때의 대신

■ 곽광(藿光) ?~BC 68. - 중국 전한(前漢) 때의 대신. 자(字)는 자맹(子孟). 하동(河東)의 평양(平壤) 사람이다. 무제(武帝)때 봉거도위(奉車都尉)와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다.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8세에 즉위하자, 상관걸(上官桀)· 상홍양(桑弘羊)과 함께 무제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소제를 보필하며 모든 정치를 도맡았다.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어 상서(尙書)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총지휘했고, 박륙후(博陸侯)에 봉해졌다. BC 83년에 소제가 상관안(上官安)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이자, 황후의 외할아버지 신분으로 조정 일을 전담했다. 여러 차례 재정지출을 삭감했으며 조세와 농지세를 감면했고, 공전(公田)을 하사했으며, 종자와 식량을 대출해 주었다. BC 81년에는 현명한 ..

소하(蕭何). 장량(張良)

■ 소하(蕭何, BC? ~ 193) 검약(儉約)과 청렴(淸廉)의 처세술(處世術)로 고조의 의심을 피한 재상(宰相)이다. 패현(沛縣:지금의 장쑤 성[강소성(江蘇省)]에 속함) 사람으로, 전한 건국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다. 그는 패현의 하급관리를 지내다가 BC 209년 훗날 한(漢)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을 도와 진(秦)의 수도 셴양(咸陽)을 점령했다. 그 후 진의 승상(丞相) 어사부(御史府)에 있던 율령집(律令集)들을 거두어 전국의 호구(戶口)와 민정을 장악했다. 항우(項羽)가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했을 때도 그는 한의 승상으로 있으면서 관중『關中:산시성(陝西省) 웨이허 강(渭河) 일대』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확대에 주력했고, 한신(韓信)을 유방에게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기도 했다. 초(楚). 한..

사마천(司馬遷)

■사마천(司馬遷, BC 145경~BC 85경). 중국의 천문관, 역관(曆官),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歷史家)이다.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기원전(BC) 105년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誹謗嫌疑)로 심문(審問)을 당했다. 무..

유종원(柳宗元, 773~819)/중당기(中唐期)의 시인.

■ 유종원(柳宗元, 773~819) -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 자는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邊境地方)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이러한 좌절(挫折)과 13년간에 걸친 변경(邊境)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思想)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韓愈)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對立的)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傳統主義) 인데 반하여, 유종원(柳宗元)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參酌)하고 신비주의(神秘主義)를 배격(排擊)한 자유·합리..

왕망(王莽)/신(新)나라 건국자

■왕망(王莽, BC 45~AD 23) ↑왕망화상(王莽画像) 자 거군(巨君). 산둥[山東] 출생.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王莽)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王鳳)의 인정을 받았다. BC 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 8년 38세로 ..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재(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 본명은 무조(武曌). 무후(,武后), 무측천(武则天)이라고도 한다. 당(唐)나라고종(高宗)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實際的)으로 통치(統治)했다. 생애(生涯)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基盤)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統一)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入闕)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 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 중국 최초 농민 봉기의 지도자

■ 진승(陳勝)과 오광(吳廣)/(BC 209~208) 맨 처음 진(秦)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로. 진승은 하남(河南) 출신인데, 자(字)가 섭(涉)이므로 진섭(陳涉) 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머슴 살이를 하였으며. 오광(吳廣) 또한 같은 하남(河南) 출신으로 집이 매우 가난하였었다. 진승과 오광 이들 두 사람은 진시황의 아들이 황제를 계승한 기원전 209년에 변방의 성(城) 을 쌓는 노역자(勞役者)로 징발된 자들의 인솔(引率)을 맡은 책임자(責任者)인데,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홍수를 만나 길이 막혀 도저히 기일(期日) 내에 도착(倒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은 목적지에 기일내 도착하지 않으면 참형(斬刑)에 처(處)하는 게 진(秦)나라의 법(法)이였으므로. 이에 진승(陳..

유방(劉邦). 진평(陳平). 한신(韓信)

■ 유방「劉邦 (BC247~BC195)」-漢나라를 통일 한(漢:BC 206~AD 220)나라를 세운 첫 번째 황제로. 자(字)는 유계(劉季), 묘호는 고조,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1911년까지 유지되었던 중국 황제제도의 특징은 대부분 이때 갖추어졌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진(秦:BC 221~206)의 하급관리인 쓰수이[泗水] 지방의 정장(亭長)으로 출발하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다음 모반을 일으켰다. 반군은 명목상 항우(項羽)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항우는 진(秦)의 군대(軍隊)를 쳐부수고 많은 옛 귀족들을 복권시켰으며 자신의 장수(將帥)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면서 진나라이전의 봉건제도를 다시 시행(施行)했다. 그때 주요한 반군 지도자(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