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151

백이(伯夷)와 숙제(叔齊)형제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BC1100년경 ↑백이(伯夷)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

주문왕 /주공(周公)/소공(召公)

■ 주문왕(周 文王) 이름)는 창(昌). 계(季)왕의 아들이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태임이다.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호경(鎬京)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주왕(紂王)이 산동반도를 정벌하는데 여념(餘念)이 없는 틈을 타 제후(諸侯)의 지지(支持)를 받아 세력을 길렀다. 강태공(姜太公)의 도움을 받아 덕치에 힘을 썼고 은(殷)나라로부터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西伯)의 칭호(稱號)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은(殷)나라와는 화평주의를 취하였으며 여러 제후들의 신뢰(信賴)를 얻어 천하의 3분지 2가 그를 따랐다. 그가 죽은 뒤 무왕이 주(周)나라를 세우고 그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존(推尊)했다. ■ 주공(周公) BC 12세기>고대정치(古代 政治)와 문물제도(文物制度)를 다진..

고공 단보(古公亶父)

■고공 단보(古公亶父, BC 15~12세기경) 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祖父)로 무왕(武王)이 즉위한 뒤, 태공(太公)으로 추존(推尊)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조상인 후직(后稷)은 농업을 중시했으며, 공유(公劉)에 이르러 빈(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빈 현[彬縣])으로 부락을 옮겨 농업과 유목에 종사했다. 그러나 다시 단보에 이르러 융족(戎族)과 적족(狄族)의 약탈이 심해지자, 단보는 부족(部族)을 이끌고 빈을 떠나 주(周:지금의 산시 성 치산 산[峙山] 북쪽)로 옮겨 갔다. 성(城)과 집을 짓고 읍락(邑落)을 나누었으며, 종묘와 궁전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토(司土)· 사구(司寇)의 5개 사직관(司職官)을 두었으며, 융족과 적족의 풍습(風習)을 ..

중국 상((商)나라 말기(末期) 세 사람의 인자(仁者)

■중국 상(商)나라 말기 세 사람의 인자(仁者). 즉 미자(黴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을 말한다. ●미자(微子) 주왕(紂王)이 주색(酒色)에 빠져 정치가 혼란(混亂)하여 반란(叛亂)의 조짐(兆朕)이 보여서 주(紂)에게 자주 간(諫)하였으나 주왕(紂王)은 듣지를 아니하여, 미자(微子)는 태사, 소사와 상의(相議)하여 주왕을 내쫒기로 하였다. 훗날 주(周)나라 초대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 했을때, 미자(微子)는 제사그릇을 들고 무왕(武王)에게 가니 무왕武王)이 복직(復職)시켜 주었다. 무경(武庚 : 주왕의 아들)과 관채(管蔡)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공이 무경을 토벌하고 미자를 후임으로 은에 보내어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기자(箕子)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이다. 기(箕,..

주(紂)왕과 달기(妲己)

■주(紂) : 은(殷) 나라의 마지막 왕. 하(夏)나라 걸(桀)왕과 더불어 폭군(暴君)의 대명사(代名詞)로 불리고 있다. 성품이 포악(暴惡)하고 주색(酒色)을 탐(貪)해서 주나라 무왕에게 나라가 망했다. 달기(妲己)라는 여색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고 왕에게 간(諫)하는 者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렸다. 목야(牧野)의 전쟁(戰爭)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전쟁을 하다 대패(大敗) 하여 녹대에서 죽었다. 미자계, 비간. 기자(箕子)가 자주 간하다가 불이익을 당했다. -------------------------------------------------------------------------------------------------------------------------------..

부열(傅說)

▲부열(傅說) 상(像) ■부열(傅說) : 상(商)나라 무정(武丁)때의 현신(賢臣)/ 최초의 성인 원래 죄인(罪囚)이였으나 무정(武丁)에게 발탁(拔擢)되었다. 무정(武丁)이 나라를 일으키려고 자나 깨나 고심하는데 꿈속에서 성인을 보았다.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다. 꿈에서 본 인상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서 전국을 찾게했는데 부험(傅險)가운데에서 열을 찾아냈다. 그래서 부열(傅說)이라고 했다. 부열(傅說)은 무정을 도와 상왕조(商王朝)의 國力을 크게 증강(增强)시켜 번영(繁榮)하게 했다

이윤(伊尹 : 商나라의 賢臣)

■ 이윤(伊尹 : 商나라의 賢臣) ↑이윤 화상(伊尹 画像) 탕(湯) 임금을 도와 하(夏)나라를 멸말(滅亡) 시키는데, 공(功)이 많았다. 4대 까지 상(商) 왕조를 보필(輔弼) 하면서 국가 정치에 중요한 역할(役割)을 했다. 탕(湯)이 죽고 손자(孫子) 태갑(太甲) 즉위(卽位) 하였는데, 포악(暴惡)하고 현명(賢明)하지 못해서 이윤(伊尹)이 탕(湯)왕의 묘(墓)가 있는 동궁(東宮)으로 추방(追放)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도록 지도(指導)하여 복위(復位)한 태갑(太甲)에게 대권(大權)을 넘겨 주었다.

반경(盤庚)과 무정(武丁)

■ 문성왕 반경(文成王 盤庚) : (BC 1314~1287) - 은(殷)의 제19대왕) 시호는 세조(世祖). 이름은 자순(子旬)으로 양갑의 동생. 하북의 수도를 집권 초기 하남의 은(殷)으로 천도하여, 쇠퇴해가는 은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퇴폐풍조(類廢風潮)와 사치(奢侈)를 추방(追放)하고 민심(民心)을 새롭게 하여 은(殷)을 중흥(中興)시켰다. 이때부터 은왕조라 불리우고. 은나라의 국운은 다시 번성해 졌으며 황금기가 시작됨. 당시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되었는데 이는 반경이 성탕의 덕정을 따랐기 때문이다. -------------------------------------------------------------------------------------------------------------..

주자(朱子=朱熹)

■朱子(1130~1200) - 儒敎를 集大成함. ↑주자 상(朱子 像) 이름은 희(熹). 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둔옹(遯翁).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선생은 북송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 계승하는 한편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를 섭렵함으로써 송대의 유교를 집대성하였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28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약 20년 동안 유교 학문에만 정진하여 성리학을 완성시킴으로써 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정호(程顥)와 정이(程), 주돈이(周敦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尊敬을 表示했고 이들의 철학을 集大成하여 자신의 哲學을 完成시켰다. 그의 가..

탕왕(湯王)

■ 탕(湯) : 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을 무너뜨리고 은(殷)의 始祖가 됨. ↑은(殷)나라 탕(湯)왕 이름은 리(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이다. 탕은 字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설(契)의 14세손에 해당한다. 상(商)은 하(夏)의 속국(屬國)이었는데 걸(桀)왕의 학정(虐政)으로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었으나 성탕(成湯)은 유덕(有德)하여 백성들이 따르고 제후(諸侯)들이 성탕(成湯)에게 복종(服從)하여 세력이 날로 증강(增强)하였다. 걸(桀)왕이 이를 눈치 채고 成湯을 하대(夏臺)에 유폐(幽閉)하여 죽이려 했으나 재화(財貨)와 교환하여 돌아올 수 가 있었다. 탕왕은 명조(鳴條)에서 제후(諸侯)들을 소집(召集)하여 하(夏)나라 정벌을 선포(宣布)하고 재상(宰相) 이윤(伊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