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유종원(柳宗元, 773~819)/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야촌(1) 2006. 4. 19. 00:51

유종원(柳宗元, 773~819) -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

 

자는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邊境地方)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이러한 좌절(挫折)과 13년간에 걸친 변경(邊境)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思想)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韓愈)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對立的)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傳統主義) 인데 반하여, 유종원(柳宗元)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參酌)하고 신비주의(神秘主義)를 배격(排擊)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描寫)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官僚)를 비판(批判)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述懷)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完熟)미와 표현의 간결(簡潔) · 정채(精彩)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詩)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送別詩) ·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류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