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151

도연명(陶淵明)과. 사안(謝安).

■ 도연명[陶淵明, 365~427, 東晉 말기부터 南朝의 宋때의 詩人 ▲도연명(陶淵明) 초상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淵明)은 자이다. 도연명(陶淵明)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官僚生活)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隱遁生活)에 들어간 시기(時期)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彭澤) 현령(縣令)이 된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退官)했다. 퇴관의 결정적(決定的)인 동기(動機)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進言하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 손가"라..

예양(豫襄)과 형가(荊軻)

■ 예양(豫襄)과 형가(荊軻) ●예양(豫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 자객(刺客)으로. 처음에는 범(范)씨를 섬기다가 중행(仲行)씨를 섬겼는데 중용(重用)되지 못했다. 뒤에 지백(智伯)을 섬겼고 지백은 예양을 총애(寵愛)했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려다가 조(趙), 한(韓), 위(魏)의 연합군(聯合軍)에 패망(敗亡)하여 죽고 지백의 땅은 조(趙), 한(韓). 위(魏)가 나누어가지고 지백의 해골은 조양자(趙襄子)가 옻칠을 해 요강으로 쓴다는 것을 알고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고 항상 비수를 품고 다녔다. 조양자(趙襄子)가 궁궐로 들어가 죽일 기회를 엿보았지만 들통이 났는데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게 자기의 이름과 목적을 이야기 하니까 조양자(趙襄子)가..

왕희지(王羲之) - 중국의 첫째가는 서예가

■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낭야(瑯邪) 린이[臨沂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 동진(東晉)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그는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예가로서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진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 348~388)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

측천무후(則天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 625~705, 중국 역사상 유일한 女帝) ↑당 태종의 후궁에서 당 고종의 황후가 되어, 황제자리까지 오른 측전무후 성은 무(武), 이름[諱]은 조(曌),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 당태종「598∼649(재위 626∼649) 唐의 2대 皇帝」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이름은 이세민(李世民). 서량(西凉: 五胡十六國의 하나)의 군주 이호(李暠)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아 가계가 분명하지 않다. 아버지는 이연(李淵; 당나라 초대황제 高祖), 어머니는 두씨(竇氏)이다. 총명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무술과 병법에 능했고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따라서 소년시절 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국가붕괴의 기색이 짙어지자 수나라를 타도하기로 마음먹고 타이위안[태원(太原] 방면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당 왕조를 수립했다. 당나라가 각처에 있는 군웅들을 평정하..

두보(杜甫)/중국 최고의 시인, 시성(詩聖)

■ 두보(杜甫), 712~770. ↑베이징 쿵먀오 전청의 두보 초상화.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고향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李白)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

이백(李白) - 중국 당대(中國唐代)의 시인

■ 이백「李白, 701~762. 중국(中國唐代)의 시인」 ↑이백(李白)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창밍 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이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과,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설, 또는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

백거이(白居易)/中唐時代(772~846)의 시인.

■ 백거이(白居易) ▲백거이(白居易) 중당시대(中唐時代,772~846) 의 시인으로. 자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이다. 그는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5세 때 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왕발(王勃)/당나라 초기의 시인

■ 왕발(王勃, 650~676) ↑왕발(王勃) 자는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강주(絳州) 용문(龍門 : 지금의 山西省 河津縣) 출생이다. 그는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로.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이미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자는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강주(絳州) 용문(龍門 : 지금의 山西省 河津縣) 출생이다. 그는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로.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이미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왕족인 패왕(..

사마광(司馬光)/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정치가· 시인

■ 사마광(司馬光) 1019년-1086년 -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정치가· 시인. ▲사마광 초상 중국 북송시대의 역사가이자 뛰어난 정치가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재상(宰相)을 지냈다. 사마광(司馬光)은 섬주(陝州)의 하현(夏縣) 출신인 아버지 사마지(司馬池)가 광산(光山-지금의 하남성)에 근무할 때에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천장각(天章閣) 대제(待制)를 지냈다. 사마광의 자(字)는 군실(君實)이라 하고 속수(涑水)선생으로 불리었으며, 죽은 다음에는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고결(高潔)한 도덕성(道德性)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조예(造詣)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政治家)로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編纂)하였다. 유교경전(遺敎經典)을 공부했으며, 과거(科擧)에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