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최명길 가계도(崔鳴吉 家系圖)

■ 최명길 가계도 崔秀俊 ∣ ∟____崔起南/永興 府使 ∥ 全州柳氏 監司 柳永立의 女 ∥ ㅣ ∥ ∟____崔夢吉/早夭 ∥ ㅣ ∥ ∟____崔來吉/參判 ∥ ㅣ ∥ ∥ ㅣ 益城君 李享齡의 女 ∥ ㅣ ∥ ∟____최명길(崔鳴吉)/領議政 ∥ ㅣ ∥ ∥ ㅣ 仁同張氏 贊成 張晚의 女 ∥ ㅣ ∥ ㅣ ∥ ㅣ ∥ ∟____崔後亮(系子)/僉正 ※生父 : 崔惠吉 ∥ ㅣ ∥ ∥ ∥ ㅣ ∥ 安獻徵의 女 ∥ ㅣ ∥ ∥ ㅣ 陽川許氏 宗廟令 許嶙의 女 ∥ ㅣ ㅣ ∥ ㅣ ∟____崔後尙/執義 ∥ ㅣ ∥ ∥ ㅣ 李澥의 女 ∥ ㅣ ∥ ∟____崔惠吉/監司 ∥ ㅣ ∥ ∥ ㅣ 李春元의 女 ∥ ㅣ ㅣ ∥ ㅣ ∟____崔後定/縣監 ∥ ㅣ ㅣ ∥ ㅣ ∟____崔後亮 出系 ∥ ㅣ ∥ ∟____崔敬吉(崔晚吉)/正郞 ∥ ㅣ ∥ ∥ ㅣ 趙珉의 女 ∥ ㅣ..

고령김씨 세계도高靈金氏世系圖)

■ 고령김씨 세계도高靈金氏世系圖) 계통도가 틀린부분을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 잡겠습니다. 김의(金宜) ㅣ 1世 남득(南得) *득관조(得貫祖) 문하평리(門下評理-從二品) ㅣ 2世 무(畝) *이랑묘. 이랑무 사간공 (司諫公) ㅣ 3世 사행(士行)-사문(士文)-사충(士忠)-사신(士信)- 부사공 집의공 승지공 군수공 (府使公) (執義公) (承旨公) (郡守公) ㅣ 4世 자숙(子肅)-자예(子睿)-자철(子哲)-자모(子謀)-자성(子省) 참의공 ㅣ (參議公 양생 5世 ㅣ ㅣ ㅣ 임 6世 ㅣ ㅣ ㅣ 수문(秀文) 7世 ㅣ ㅣ ㅣ 자(滋) 8世 ㅣ ㅣ ㅣ 5世 형생(荊生)-장생(莊生)-양생(楊生) 감찰공 참판공 참판공 (監察公) (參判公) (參判公) ㅣ ㅣ ㅣ ㅣ ㅣ 繼子 임(銋) ◇生父 : 형생(荊生) 6世 ㅣ ㅣ ㅣ 탁(..

최명길 신도비명(崔鳴吉 神道碑銘)

●崔鳴吉 神道碑 ◇시대 : 조선 ◇연대 : 1702년(숙종28년)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 지정 : 시도지정문화재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59호 ◇비의 크기 : 높이 270cm, 너비 37cm, 두께 : 24cm ◇소재지 :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忠淸北道 淸原郡 北二面 大栗里) 산15-2번지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박세당(朴世堂) / 최창대(崔昌大) / 미상 --------------------------------------------------------------------------------------------------------------------------- 영의정 완성부원군 최공 신도비명 (領議政 完城府院君 崔公 神道碑銘) 박세당 찬(朴世..

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

↑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 [소재지]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99(와룡동) (창경궁 내 1동) 보물 제813호(1985.01.08)로 지정되었다. 인정문은 이궁(離宮)인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면서 300년이나 조선의 정사를 다루어 온 인정전의 정문이다. 1405년 태종(太宗)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역사적으로는 1494년 연산군이 인정문을 지나 왕위에 올랐고, 이후 1649년(인조 27) 효종, 1659년(효종 10) 현종, 1724년(경종 4) 영조, 1800년 순조, 1849년 철종, 1863년 고종이 인정문을 지나 인정전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건물, 5량가구(五樑架構)의 ..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의 영여(靈輿)가 대한문을 나서고 있다.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문인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고쳤다. 1904년의 덕수궁에 큰 화재로 1907년에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대한문의 편액(扁額) 글씨는 1874년 (고종 11) 25세의 나이에 역과(譯科) 증광시(增廣試) 8위로 합격, 벼슬은 부경(副卿-從二品)을 지낸 소농(筱農) 이종태(李鍾泰)가 썼다.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조선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능은 태종 때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8)의 저택이 들어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1593년 10월 왕과 조정이 서울로 돌아와서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규모가 좁아서 인근에 있던 계림군(桂林君, ?∼1545)과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저택을 합하여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른 것이 후일 덕수궁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

경복궁 향원정(景福宮 香遠亭)

↑만추(晩秋)의 경복궁향원정(景福宮 香遠亭) 경복궁의 향원정(景福宮 香遠亭)은 1867년(고종 4)에 지어진 건축물로 원래는 건청궁(乾淸宮)과의 연결 통로로 취향교(醉香橋)란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그리고 향원정 연못은 1894년(고종 31)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참석한 가운데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겨스케이팅 시연회가 열렸떤 장소로 우리나라 최초의 스케이트 장소인 셈이다.

장례절차

■ 장례절차 죽음은 현세(現世)에서 최후로 통과하는 관문이며 내세(來世)로의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인간의 생(生)은 현세의 이승에 한하는 것이 아니고, 저승에 가서 새로운 영생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을 의미한다고 보는 내세사상(來世思想)으로 인해 사자(死者)를 극진하게 후장(厚葬)하여 왔으며 존경, 추앙을 표시하여 왔다. 내세는 현세의 계속으로서 저 세상에서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보는 영혼불멸(靈魂不滅)과 내세영생(來世永生)의 이러한 생사관(生死觀)은 상 · 제례(喪 · 祭禮)는 물론 일상에서도 보편적이며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치관(價値觀)이라 할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 이라는 것은 슬픈 의미를 가지면서도 내세에 대한 경건한 의미..

찰방(察訪)

■ 찰방(察訪) 조선시대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문관(文官)으로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명(官員)을 두어, 공문서(公文書)를 전달하고 공용여행자(公用旅行者)에게 숙소제공‧ 마패에 의한 마필공급 등 편리를 도모하는 기관(機關)을 역참(驛站)이라 하였다. 약간의 역참(驛站)을 1구(區)로 하여 이를 역도(驛道)라 칭하고, 그 구간의 마정(馬政)을 맡아보는 관직(官職)을 마관(馬官)이라 하여, 교통로(交通路)를 이용하여 정보수집(情報蒐集)도 하였다. 고려 후기부터 역승(驛丞)이라고 하다가 1535년(중종 30)부터 찰방(察訪)이라고 개칭하였다. 경국대전에 보면 조선 초기 전국에 23명의 찰방과 18명의 역승(驛丞 : ..

박강선생 묘(朴薑先生 墓) /박치선생 묘(朴緇先生 墓)

↑세양공 박강선생 묘(世襄公 朴薑 先生墓) ↑양공 박강신도비(世襄公 朴薑神道碑) ↑세양공 박강묘우(世襄公 朴薑 廟宇) ●박강(朴薑) 1405(태종 5)∼1460년(세조 6). 본관은 반남(潘南). 좌의정 박은(朴訔)의 아들이다. 성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1444년(세종 26)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이듬해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어 항시 이 직무를 맡고 있었다. 1449년 공조참의와 이조참의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 황해도도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중추원부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협력, 그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정되고 금천군(錦川君)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