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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

야촌(1) 2012. 12. 6. 05:05

↑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 [소재지]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99(와룡동) (창경궁 내 1동)

 

보물 제813호(1985.01.08)로 지정되었다.

인정문은 이궁(離宮)인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면서 300년이나 조선의 정사를 다루어 온 인정전의 정문이다.

 

1405년 태종(太宗)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역사적으로는 1494년 연산군이 인정문을 지나 왕위에 올랐고, 이후 1649년(인조 27) 효종, 1659년(효종 10) 현종, 1724년(경종 4) 영조, 1800년 순조, 1849년 철종, 1863년 고종이 인정문을 지나 인정전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건물, 5량가구(五樑架構)의 팔작지붕이다. 삼문 중 넓은 가운데 칸은 임금이 출입하였고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이 출입했다. 길게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기간을 쌓았고 가운데 돌계단 난간에 석수를 조각하여 설치했다.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편액과 함께 창덕궁의 인정문(仁政門)의 편액(扁額)은 가로 200cm, 세로 80cm 크기의 검정바탕에 흰글씨 양각문으로 경천군 이해룡(慶川君 李海龍, 15세기 중~16세기 초)의 글씨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한대도 누대없이 10여대를 대대로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서 사자관을 역임하였으며,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 편액도 그의 10대손인 부경(副卿-從二品)을 지낸 소농(筱農) 이종태(李鍾泰, 1850~미상)의 글씨이다.

 

단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편액 글씨를 쓴 사람이 조선시대 경천군(慶川君) 북악 이해룡(北嶽 李海)의 글씨란 설과 능성군(綾城君) 이신(李伸, 1542~1615)의 글씨란 설이 존재하는데, 이신(李伸)의 글씨라고 적어 놓은 것의 하나로 순조때 사람 류본예(柳本藝)가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