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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덕수궁)의 역사

야촌(1) 2012. 12. 4. 03:35

■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조선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능은 태종 때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8)의 저택이 들어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1593년 10월 왕과 조정이 서울로 돌아와서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규모가 좁아서 인근에 있던 계림군(桂林君, ?∼1545)과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저택을 합하여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른 것이 후일 덕수궁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를 한 뒤 이 곳에 살면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현재 덕수궁의 자리는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 婷)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다. 그래서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을 할 때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 아들인 잘산군(乽山君)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1593년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로 피신했던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온 뒤에 이 곳을 임시거처로 하여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내가 협소하여 계림군 류(桂林君: 瑠)의 집을 포함하였으며, 궁궐 안에 있어야 할 관청들도 처음에는 궐문 밖에 두었다가 점차 면적을 넓혀 모두 궁궐 안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 담을 둘러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뒤 1608년 2월 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정무(政務)를 보았으며, 광해군(光海君)도 이 곳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에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그리고 1611년(광해군 3) 10월 창덕궁(昌德宮)을 보수하여 거처를 옮긴 뒤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하였다.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약 2개월간 살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1615년 4월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한 뒤에 경운궁에 유폐(幽閉)하였으며, 당시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불렸다.

 

그리고 1620년에는 궁궐의 아문(衙門) 등을 허물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하였지만, 곧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뒤 가옥이나 대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때문에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 뒤 영조(英祖)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 60년이 3번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1일 세손(후의 正祖)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高宗)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경운궁이 다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태후(太后)와 태자비(太子妃)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였다.

 

그리고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전각 등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 해 9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세워지고,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한 뒤에는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4년에는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에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에,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고종이 이 곳에 거주하였다. 

 

이 때 명칭을 경운궁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으며, 1910년에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현재 6만 1500㎡의 면적에 대한문(大漢門), 중화문(中和門), 광명문(光明門)이 있으며, 중화전(中和殿), 석어당(昔御堂), 준명당(俊明堂), 즉조당(卽祚堂),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석조전(石造殿) 등의 전각이 있다.

 

조선 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덕수궁 | 두산백과

 

 

↑대한문의 편액은 소농(筱農) 이종태(李鍾泰) 선생의 글씨이다.

 

● 이종태(李鍾泰)

   [생졸년] 1850년(철종 1)∼미상

   [역과] 고종(高宗) 11년 (187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8위/25歲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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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자(字)는 공래(公來), 호(號)는 소농(筱農). 본관은 경주(慶州). 조선 선조때의 사자관(寫字官)이었던 이해룡(李海龍)의 10대손으로, 증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사자관(寫字官) 이경국(李擎國)이고, 조부는 정헌대부(正憲大夫) 사자관(寫字官) 이동현(李東鉉)이며, 아버지는 첨지(僉知) 이재환(李載煥)이다

 

그는 1874년 (고종 11) 25세의 나이에 역과(譯科)  증광시(增廣試) 8위로 합격, 벼슬은 부경(副卿-從二品)을 지냈다. 

집안이 대대로 글씨를 가업으로 하였으며,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 편액(扁額) 글씨가 그의 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