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증 정부인 경주이씨 묘갈명(박문수 어머니)

[찬 인] : 이광덕(李匡德) [서 자] : 이광사(李匡師) [규 모] : 전체 높이 303㎝, 비신 높이 185㎝, 비신 폭 61.5㎝, 비신 두께 57.5㎝ ----------------------------------------------------------------------------------------- ■ 증 정부인 경주이씨 묘갈명(암행어사 박문수 어머니)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의 장녀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태좌[李台佐, 1660년(현종 1)∼1739년(영조 15)]의 누이동생 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수 홍문관 대제학(守 弘文館 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이광덕(李匡德..

송석 최명창 묘(경기도 기념물 제178호)

■ 최명창선생 약사「1466년(세조11)~1536년(중종 31)」 선생은 개성최씨(開城崔氏)로 자(字)는 여신(汝愼), 호(號)는 송석(松石) , 송음(松陰)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 천보(天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철손(鐵孫)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찰방(察訪) 예경(禮卿)의 딸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89년(성종 20년), 진사(進士)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이어 저작(著作), 전적(典籍), 정언(正言),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이조정랑(吏曺正郞), 지평(持平),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좌부승지(右左副承持旨)를 역임하고, 1519년, 예조참판(禮曺參判)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전주부윤, 원주목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

사대주의 용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사대주의 용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빛나는 조선국'이 아닌 비석 첫 머리에 새겨진 조선의 ‘사대주의’ OhmyNews 2006-12-12 18:09 백유선(loza) 기자 ↑대부분의 조선 시대의 비석이 그렇듯, 비석의 첫머리에 '유명조선국'이라 쓰고 있다.ⓒ 백유선 서울역사박물관의 앞뜰에는 무덤 앞에서 가져온 석물들이 있다. 비석을 비롯해 망주석·장명등·문인석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서있는 이 석물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촬영장소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도 있어서 나름대로 박물관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처럼 이 비석들을 살펴보다가 조선 선비들의 사대주의 사상의 일면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조선 ..

수(壽)와 향년(享年)에 대하여...

어제 시(市),의회 의장으로 봉직하는 지인의 부친께서 별세 하셨는데 신문 기사의 부고(訃告)란에 향년(享年) 80세(歲)라 했기에 아래와 같이 바로 잡고자 합니다. 70세(歲) 이상의 장수를 누렸을 때는 수(壽)라 기록하고, 70세(歲)가 못되어 별세했을 때는 향년(享年)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20세 이전에 죽었을 때는 요(夭)나, 조요(早夭)라고 씁니다.

일본인의 족보를 보니......

일본인의 족보를 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천하통일(天下通一)을 하는 과정에서 오랜 내전(內戰)으로 남자들이 너무 많이 전장(戰場)에서 죽자 왕명(王命)으로 모든 여자들에게, 외출할 때는, 등에 담요 같은걸, 항상 매고 아랫도리 내의(內衣)는 절대 입지 말고 다니다가 어디에서건 남자를 만나면 애기를 만들게 했다. 이것이 일본여인의 전통의상(衣裳)인 기모노의 유래(流來)이며 오늘날에도 기모노를 입을 땐 팬티를 입지 않는 풍습(風習)이 전해지고 있다. 그 덕에 운이 좋아 전장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아무 여자고 맘에 들면 다 차지 할 수 있는 행운(幸運)이 주어졌다. 그 결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이름을 지을 때 할 수 없이 애를 만든 장소(場所)를 가지고 작명하였는데, 그것..

종묘 진설 제수

■종묘 진설 제수 제수는 제사 때 상에 올리는 제물로 국가제사인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수는 가정제사와는 달리 옛날식 의례에 따라 매우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졌다. 즉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종묘의궤(宗廟儀軌)」에 보면 삼생(三牲). 이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粱). 이제(二齊). 삼주(三酒). 육과(六果). 육병(六餠) · 이포(二脯). 사해. 사저(四菹). 율료. 모혈(毛血)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곡식이나 고기 등은 익히지 않은 날 것을 그대로 올리는데 이는 선사시대 이래의 오랜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묘제례의 진설 상을 크게 나누어 보면 동쪽에 마른 제물, 서쪽에 물기 있는 제물, 남쪽에 술잔, 중앙에 오곡과 육류를 놓게 된다. 제수는 익힌 것과 날것이 있고, 양념을..

종묘제례(宗廟祭禮)

종묘제례(宗廟祭禮) 종묘제례(宗廟祭禮)는 고려가 이성계에 의하여 멸망한 후, 조선이 건국 되었고 태조 이성계는 종묘를 모시기 위해 1394년 정전을 지었으며 세종은 1421년 그 옆에 영녕전을 지어 제례를 올리면서 부터 입니다.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불 탔으나, 1608년 재건되고 그 후 보수 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정전은 국가지정문화재 국보227호이고, 영녕전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821호이며, 종묘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25호이고, 종묘제례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이며, 종묘제례악은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입니다. 종묘제례는 지금까지 600여년 넘게 지속되온 제례로서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으며, 2110년에는 유네스코가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윤관장군 묘.

↑윤관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의 묘' [파주=뉴시스]기사입력 2007-12-23 17: 42 조선시대 명문가였던 파평윤씨와 청송심씨간에 400년 묵은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다툼)'이 두 문중 후손들의 화해로 막을 내리게 됐다. 23일 경기도와 중앙문화재위원회는 두 문중간의 화해정신을 기리고 두 종중의 타협안을 존중해 묘지 이전을 가결했다고 밝혔다. (사진=경기도2청 제공)/김형수기자 vodokim@newsis.com ↑윤관 대원수(1040년(정종 6)~1111년(예종 6))는 고려 때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쪽 9성을 차지해 고려의 지도를 넓힌 명신이고, 심지원(1593년(선조 26)~1662년(현종 3))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대사헌을 거쳐, 좌, 우의정과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2007.05.01. 08:43 명나라 이여송은 한국계… 유학사 연구에도 단서 제공 씨족의 병력도 드러나 유전병 예방에 도움도 조선조 1850년 무렵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사망인구가 급증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전염병의 이동 경로를 보자. 외국인 선교사, 상인 등의 이동에 따라 외래 병이 서울에서 창궐한 경우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남까지 확산되는데 충북 대다수 지역은 빠져 있다. 그 후 전염병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호남으로 내려간 다음 북상해 평안도로 옮아가고 다시 내려와 경상도에 퍼진다. 이후 강원도로 북상한 전염병은 평안북도까지 올라갔다가 강원도로 내려와 머물다 북상하지만 함경북도 일부에서 멈춘다. 현대 의..

수서양단(首鼠兩端)

■ 수서양단(首鼠兩端) 首(머리 수), 鼠(쥐서), 양(두양), 端(실마리 단),자(字)로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라는 뜻으로 (1) 진퇴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태 또는 (2) 두 마음을 가지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전한의 7대 황제인 무제(武帝)때의 일이다. 5대 문제(文帝)황후의 조카인 위기 후(魏其候) 두영(竇+女+霜)과 6대 경제(景帝) 황후의동생인 무안 후(武安候)전분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낙일(西山落日)하는 고참 대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장군이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모인 주연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